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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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알록달록한 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는다. 데이트를 준비하는 기분이다. 무릎 위로 훌쩍 올라오는 기장의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선다. 약속 장소로 정한 레스토랑은 7년 전 우리가 갔던 곳이다. 빠듯한 예산에도 두 번이나 갔던 곳. 그곳은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달과 나는 입맛을 다시며 골목길을 걷는다. 시간이 남아 작은 책방에도 들러본다. 나무로 된 나뭇바닥은 걸음마다 낑낑 앓는 소리를 낸다. 서점에 어울리는 소리다.이윽고 횡단보도 저 편에서 두 사람이 걸어온다. 아니 와락 달려왔나. 우리는 반가워 호들갑을 떤다. 우리의 만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만큼 귀한 인연이다. 4년 전 여름, 우리는 집주인과 세입자로 만났다. 숲 속 언덕에 있는 집엔 현관문이 둘 있었다. 같은 번짓수

비행운으로 가득한 하늘
해변 앞 편의점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열린 문 사이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고 간다. 그 틈을 비집고 맥주 두 캔과 감자칩 한 봉지를 집어든다. 썬크림과 태닝오일 판매대 앞에 선다. 코코넛을 좋아한단 이유로 코코넛이 그려진 오일로 고른다. 냄새만 맡아도 바다와 이글이글한 태양이 그려진다. 후각적 심상의 표본이 된다. 시원한 맥주캔을 들고 바닷가로 향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훌러덩 옷을 벗어던지고 몸을 굽고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한 볕이다. 질서 없음의 질서. 한낮의 바닷가에서 누군 누워서 몸을 태우고 누구는 수영을 하고 어떤 이들은 모래밭 위에서 배구공을 튕긴다. 내가 챙 넓은 모자에 얼굴을 숨기는 사이, 달은 태닝할 준비를 마친다. 출발, 요이땅. 나는 달의 등판에 새로 산 오일을 발라준다. 술김에

우리가 살아남는 법
맛난 과일과 맥주의 힘을 빌어 낮잠을 잤다. 낮잠은 낮잠인데, 깨고 보니 열한 시다. 밤 열한 시. 손쉽게 반나절이 사라졌다. 거실 소파에 누운 달을 깨워 밤마실이라도 나가보려 했으나, 도통 일어나질 못한다. 이젠 인정해야 할 때가 왔는가. 내 몸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자는 달을 두고 노트북을 켰다. 의미 없이 원고를 열어본다. 비행기 안에서 조금이나마 일을 해보려 했던 것은 정말 조금이 되었다. 매드맥스와 코코를 보고, 두 끼의 기내식과 쪽잠 사이 그래도 뭔가를 하려 했던 노력은 가상하다. 티끌모아 태산이란 마음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머리가 굴러가지 않을 때면, 남은 페이지 수를 마감 날짜까지 남은 날로 나눠본다. 하, 그럼 하루에 두 페이지씩만 쓰면 되겠네. 물론 날이 갈수록 하루 할당

한 줌의 보리와 홉
간밤 편의점에서 사들고 온 것은 물, 여섯 개 들이 맥주가 다였다. 장을 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 또는 여비의 절약 이전에 기쁨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가벼운 주머니로도 살 수 있는 행복. 집 가까운 곳에 커다란 시장Mercat del Nino이 있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시장 건너편에는 거리 이름을 딴 작은 식당이 있었는데, 지날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렇지, 큰 시장 앞에는 언제나 싸고 인심 좋은 밥집이 있기 마련. 유리문 안으로 들어서자 너른 공간 안에 작은 점포들이 줄을 이었다. 과일, 채소, 고기, 생선부터 치즈나 달걀만 파는 상점도 있다. 색색의 과일들은 흐트러짐 없이 산을 이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가장자리에는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밥집들도 있다. 카운터

보통날의 아침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바르셀로나에서 맞는 아침. 부엌 앞 너른 창밖으론 제비들이 난다. 날은 약간 흐리고 공기도 선선하다. 긴팔 옷을 꿰어입고 집을 나선다. 우리도 제비처럼 배를 채우고 장도 좀 봐서 와야겠다 싶었다. 이른바 동네 탐색의 시간. 정방형의 블럭들이 모인 도시. 그 사잇길을 따라 몇 번 맴을 돈다. 달은 이내 집 근처의 지도를 파악한 눈치다. 저기는 우리 어젯밤 갔던 편의점이네. 라는 말을 들어도 나는 여기가 어딘지를 잘 모르겠다. 24라는 숫자와 Mercat이란 글자, 늘어선 맥주들과 궤짝 속 무른 과일들, 카운터를 지키던 남자의 지루한 표정. 이런 것은 묘사할 수 있지만 그곳까지 어떻게 얼만큼 가야 하는지는 모르는 사람. 이런 내가 기가 막히도록 척척 길을 찾은 적이 있었으니, 그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