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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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호스트의 왕관
간결한 삶을 찾아 이곳에 온 지도 닷새째. 트렁크에서 꺼낸 짐들은 단촐하다. 입고 온 것을 포함해 외투 두 벌, 바지 두 벌, 신발 두 켤레. 양말은 여섯 개나 되는데, 그건 가방 안 노트북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였다. 작은 부엌에서 용케 무엇을 만들어 먹고(구운 김을 찍어먹을 간장은 에스프레소 잔에 담고, 양배추에 곁들일 쌈장은 쏘서에 담는 식이다), 또 부지런히 설거지 한 그릇들을 겹치지 않게 얹어둔다. 몇 안 되는 빨래들을 세탁한 후 건조대에 넌다. 좁다란 집에서 오며 가며 만나는 창밖 풍경은,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한다. 날은 쨍하게 춥다. 그 덕에 사방의 풍경이 매우 또렷하게 보인다. 아침이면 집 뒤에서 떠오르는 해가 서쪽을 비춘다. 건물들의 동쪽 벽이 해를 받아 하얗게 빛나는 시간. 남쪽 광화문 아

여장과 살림 사이
쥐도 새도 모르게 새해가 밝았다. 신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맥주를 마시며 타로점을 보았다. 이름하여 새해의 운세. 언니는 내 안에 충동이 일렁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언제나 그렇지. 언니에게 보는 타로점을 내 마음을 뜨끔하게 한다. 그렇게 마음껏 일렁이자며, 우리 언제고 또 특가로 나온 싼 표를 잡아타고 떠나자는 의기투합을 했다. 더운 나라에서 이 술 저 술을 들이부으며 수영하는 상상도 했다. 맥주에 또 무얼 마셨더라. 사 차, 아니 해장국까지 치면 오 차까지를 달렸나. 칵테일로 돋운 흥은 데낄라로 정점에 올랐다. 우리는 이리저리 뛰며 춤을 추었다. 나는 신촌 횡단보도에서 넘어졌고, 왼손 손바닥이 까졌다. 일렁이는 것은 충동이나 머나먼 미래뿐이 아니었다. 숙취에 고생하던 나는 열두 시간만에 정

세밑 일기
시드니에서 온 트레이시와 제시카가 떠났다. 아침 아홉시 비행기라서, 새벽녘 서둘러 나선다 했다. 나는 느지막히 오후가 되어 집에 들렀다. 빨랫감을 세탁기에 돌리고 기다리는데, 알림 메시지가 온다. 트레이시가 후기를 썼으니 확인하라고. 벌써 도착했단 말인가. 나는 아직 호스트 후기도 쓰지 않았는데. 궁금한 마음에 후기를 확인해본다. 언제나 이 순간은 조금 두근거린다. “Beautiful space to stay at and was a great change from the hustle and bustle of Seoul. The living space and sleeping space was so spacious. The bathroom was clean and large enough. The ameniti

제주에서
지난 주 이 시간엔 제주에 있었다. 개운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떠나기 전의 서먹함은 많이 녹아내린 상태였다. 별 계획 없이 제주로 왔고,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별 계획 없이 왔으니, 늘 가던 곳만 가게 된다. 제주의 서쪽 해안, 남쪽 해안 그 어귀를 뱅뱅 돌았다. 연말 전 주중, 아마도 비수기였나 보다. 어디를 가도 사람이 없어, 그 자체가 쉼이 되었다.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릴 때만 해도 우리 사이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멍하니 티비나 보았다. 낚싯배가 전복된 뉴스가 속보로 나오고 있었다. 그냥 너 혼자 가라고 하고 나는 집에 갈까 그런 생각을 했다. 달도 그리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깊이 감추고선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윽고 밤의 제주

마치 그림 같은
처음 만난 날 선생님이 입고 오신 옷을 기억한다. 잔꽃무늬의 반팔 원피스. 우리의 차림은 늦여름에 걸맞았다. 선생님이 가져오신 여러 그림도구들을 열심히 살폈다. 첫 수업을 마치고 나는 호미화방에 갔다. 스케치북과 붓펜 그리고 가느다란 수성펜들. 한 권의 스케치북을 꽉 채워 그렸다. 그러는 사이, 계절이 흘렀다. 그 무렵 어느 화요일의 일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데, 뒷자리의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는다. 마중 나온 이의 전화 같았다. 응, 지금 둔내터널 지나고 있어. 그 덕에 터널의 이름을 알았다. 한참을 지나 터널 밖을 나왔을 때 나는 놀랐다. 산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어서. 서울은 아직 푸른 잎이 가득할 때였다. 강원도의 단풍은 기세가 등등했다. 아무 것도 꺼릴 것이 없다는 듯이 맹렬히 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