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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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여행, 열네번째 고요한 밤 여기 비냘레스
아바나를 떠나 며칠 머물 곳으로 다른 곳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동쪽으로 더 넘어가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떠나는 비행기를 타러 다시 아바나로 돌아와야 하니까. 떠나기 아쉬웠던 비냘레스로 다시 가기로 했다. 달과 머물 때는 산 속에 위치한 호텔이었지만, 이제는 나 혼자니 마을의 작은 까사에 묵기로 한다. 버스표를 끊으며, 비냘레스의 까사 추천해 줘. 라고 하니 장거리 전화를 거는 잉글라떼라 호텔의 직원. 그리고는 내게 손글씨로 이름을 써준다. 버스에서 내리면 너를 찾을거야. 나는 또다시 짐을 꾸려 버스에 오른다. 아침 나절에 탄 버스는 오후께 도착한다. 버스가 마을의 광장에 도착하자,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버스 옆으로 빼곡히 달려든다. 손에는 저마다 자기의 집을 홍보하는 조악한 팜플렛이 들려있다. 즉석에서

쿠바여행 열세번째, 시티 투어 버스를 기다리며
센트로 아바나, 의자에 앉아 시티 투어 버스를 기다린다. 나중에 필름을 들여다보고 알았다. 연달아 담긴 노랑 노랑 노랑. 바람이 불면 꽃향기가 일렁였다.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한낮의 버스를 탄다. 이층에 올라가 앉아 부는 바람을 맞는다.해변 도로를 쌩쌩 달리고, 늘어선 여럿 호텔들을 지나 거리로 접어든다. 앞앞 자리에 앉은 아저씨와, 그 사이로 보이는 거리의 풍경. 초록의 차들이 스쳐지나간다. 휘청이는 야자수들이 버스를 넘보며 잎들을 늘어뜨린다. 다시 만나는 체의 얼굴. 너른 광장을 한 바퀴 돈 버스는 도심으로 접어든다. 오고 가는 사람들, 좌판들이 모인 시장, 자전거를 타는 아저씨들. 바다를 낀 넓은 야구장. 그리고 소년들.아바나의 주택가들을 지나고 또 지나, 다시금 아까 출발했던 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

쿠바여행 열두번째, 여기 말레꼰
해 질 무렵의 말레꼰. 저녁 시간이 되었다 해도 아직 열기가 남아있다. 방파제 위에 손을 올리면 따끈따끈하다. 그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사람들이 수다를 떤다. 노래를 한다. 귀여운 올드카들의 엉덩이를 좀 바라보다, 눈을 돌려 바다와 하늘과 태양을 찍고 있으려니 누군가 말을 건다. 다시 시작되는 몇 개의 질문들. 여행중이니? 어디에서 왔니? 혼자야? 같은 질문. 빤한 호구 조사 같다거나 무례한 참견처럼 느껴지지 않은 것은, 말을 건넨 이가 가족들을 거느린 아빠였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도 좀 찍어주지 않을래? 하고 물어와서.필름 카메라니, 찍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고 또 사진으로 전해줄 수도 없는데. 그래도 그렇게 웃고들 있다. 나는 또 우노 도스 뜨레스 해가며 셔터를 누른다. 그렇게 헤아리는 숫자에 놀라

쿠바여행 열한번째, 아바나를 걷다
처음 여행을 계획했을 때, 가장 기본적인 문제부터 난감했었다. 대체 그곳까지 가는 항공권은 어떻게 끊을 것이며, 가서 머물 숙소는 어떻게 찾아야 할지. 흔히들 검색하는 항공권 사이트에서 쿠바는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인터넷을 살피다 한국쿠바교류협회를 찾아냈다. 그리하여 토론토를 경유하는 항공권과 처음 머물 아바나의 까사를 예약했었다. 달이 떠나고 난 후, 현금 인출이나 카드 결제에서 모두 막히고서 몹시도 막막한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한국쿠바교류협회의 아바나 지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곳과 연락이 되어 당장 필요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서울에 당도한 달이 대신 돈을 부쳐주기로 한다. 나는 얼마간 홀가분한 기분이 된다. 그리하여 혼자 걷는다. 며칠 다녔다고 눈에 익은 그 길들을. 문이 활짝

<한공주>와 우리
온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 위로 제목이 떠올랐다. 한공주. 그 글씨체는 사뭇 예스러워 유행하는 복고 느낌으로 만들었나 싶었는데, 나중에 되짚어 생각해보니 그것은 너무 익숙한 글씨체였다. 우리가 교복 가슴팍에 달고 있던 명찰이었다. 음각으로 파낸 또렷한 이름들. 그리고 밝아진 화면에선 무리를 지어 모인 어른들의 굳은 얼굴과, 자리에 앉은 공주가 보인다. 이어 메인 포스터의 대사가 등장했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그 말을 들은 어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이 대사를 말하기 위해 영화는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는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들을 흩어진 구슬처럼 오고 가며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새 스르르 꿰어가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거기엔 공주와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과 어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