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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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오후 세 시부터
마감을 끝냈다는 크세니아를 태우고 낙산공원으로 향했다. 북한산에 다녀왔다는 말에 낙산공원도 가 보라고 추천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그 동네에 다음 숙소를 잡았다고. 날은 무덥고, 우리는 에어컨 바람을 쐬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았다. 드라이빙 까페라며 잠시 웃었다. 크세니아는 마침 나오는 음악을 듣고는 블랙 스커트!라고 외친다. 오! 홀리데이 조 알아? 이거 새 앨범이야, 라고 말하니 그러냐고 되묻는다. 목소리 듣고 알았다고. 그런 크세니아가 서울에서 작업한 일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책을 하나 썼다고, 거기엔 이곳에서의 사진도 들어있다고 했다. 창 밖의 러닝보이를 담은 사진. 그렇지. 거의 대부분의 날들, 창 밖의 러닝보이를 볼 수 있는 집. 그 동네의 계단은 까마득히 높아서, 우리는 함께 망연자

기다리는 마음
특별한 약속, 이를테면 내가 차로 서울역이라든가 공항버스 정류장이라든가 태워줄 일이 있지 않으면 체크아웃 때 부러 마주하지 않는다. 짐을 챙겨 나가는데 오죽 바쁘겠지 싶어서. 괜히 호스트 온다고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체크아웃은 어떻게 하면 되니? 라고 물어오면, 나가고 나서 나한테 메시지 하나만 줘 라고 답한다. 그러면 게스트들은 또박또박 잘 머무르다 간다는 인사를 보내온다. 그 메시지를 받고서, 집을 나서 다시 집에 이르기까지가 자못 떨리는 순간이다. 기상천외한 풍경이 펼쳐지더라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 그러나 지금껏 아이고 아이고 동네 사람들, 이렇게 외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스트들은 설거지도 깨끗하게, 쓰레기 정리도 말끔하게, 그리고 게스트북도 성의껏 써주고 집을 떠났다. 여기서

초록의 방
늦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봄에 이르기까지. 반 년쯤 흘렀다. 좁다란 골목길을 내달아 집에 다다르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마음이 산란하고 복잡할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패브릭 종류를 걷어내 세탁기를 돌리고, 분류해 놓은 쓰레기를 모아 현관 앞에 두고 청소기를 꺼낸다. 오 일의 휴가를 보내고 간 게스트는 게스트북에 첫 날과 마지막 날의 감상을 나란히 적어두었다. 새벽녘 작성했다는 마지막 인사에 나는 조용히 켜둔 스탠드와 한 사람을 위한 책상을 상상한다. 그건 쉽게 묘사하기 힘든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상호 호혜적인 관계. 우리 사이에 합당한 비용이 오고 갔음에도, 서로에게 비용 너머의 고마움을 건넨다. 게스트북을 접고서, 나는 다시 씩씩하게 좁은 집을 돌아다니며 청소기를 민다. 노동의 기쁨, 기쁨의 노동.오늘도

교토에서 머리를
자르기로 했다. 파리에서 머리를 잘랐을 때와도 비슷하다. 이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 뿌리 염색의 속박에서 벗어난 지도 오래지만, 이미 상한 부분들은 어쩔 수 없다. 착 붙은 생머리에 볼륨을 넣고 난 후부터 더욱 그렇다. 쇄골이 넘도록 자란 머리. 손가락을 푹 찔러넣어 끝까지 내려오기 힘든 머리. 어쩔 땐 그냥 어깨 근처에 뭉쳐 모여앉은 머리. 그냥 다 잘라버려야지. 나는 마음 먹었다.체크아웃을 마치고, 짐만 맡겨두고 나왔다. 저녁 비행기라 시간이 여유롭다. 달이 좋다고 가자는 곳으로 향한다. 교토대 안에 위치한 작은 서점과 레스토랑. 가는 길 마침 소풍 나온 꼬맹이들을 본다. 두 줄로 서서 손을 잡고 선생님을 따라간다. 맨 앞에 가는 선생님은 커다란 비닐에 공 몇 개를 담아 들고간다. 아무래도 잔디밭에

발리 7
아침 나절 수영을 하다,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오니 달이 이야기를 꺼낸다. 여기에 좋은 곳이 있다는데 가보고 싶다고. 거기가 뭐 하는 곳인데, 하고 물으니 뭐라 뭐라 설명을 한다. 나는 그러자고 응한다. 나는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굳은 결심을 했다. 서울의 팍팍한 일상에서 도망치는 만큼, 사소한 일에 분개하지 말고, 새로운 제안에 웬만하면 열린 마음으로 협조하자. 아니 이건 흡사 협조 요청 공문이 아닌가. 여튼 그렇게 느지막한 오후, 머나먼 길을 떠났다. 논밭과 건물들이 어우러진 동네, 이름도 귀여운 짱구비치로. 논길을 따라 커다란 건물로 향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발리를 사랑한 서양 멋쟁이들이 차린 공간이라는데. 티셔츠부터 서핑 보드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아이템을 파는 편집 매장이 있고, 레스토랑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