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L ME YOURS I WILL TELL YOU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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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밤하늘은 파랗게 빛난다, 도쿄의 밤하늘은 가장 짙은 블루
냉소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자가 있다. 이름은 미카(이시바시 시즈카),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은 수많은 사람을 죽여왔다 생각하고 그래서 피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녀의 삶을 수식하는 단어는 단 하나, '어차피'다. 어차피 버림받을 거 마음을 줄 이유 없고, 어차피 헤어질 거 사랑할 필요 없으며, 어차피 죽을 거 애쓰며 살아갈 일 없다. 차별과 아이러니, 그리고 공포가 그녀가 생각하는 세상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출구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내일이 찾아와 오늘을 살 뿐이고, 그저 오늘이 물러가 내일을 살 뿐이다. 낮에는 간호사로, 밤에는 스나쿠 점원으로 일하는 그녀에게 삶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난다. 세상을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이름은, 신지(이케마츠

일본 TV엔 있고, 한국 TV엔 없는 것
일본에 '집, 따라가도 될까요? 家、ついて行ってもいいですか'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도쿄 테레비에서 하는 심야 방송으로 도쿄 밤거리를 걷는, 혹은 앉아 있는, 때로는 누워있는 사람에게도 말을 걸어 '집에 따라가도 되냐고' 물으며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OK를 하면 집까지 찾아가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이모저모를 묻는다. JTBC에서 강호동과 이경규를 내세워 '한끼줍쇼'란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 이 방송을 보고 따라한 게 아닌가 싶었던 방송이기도 하다. 그런데 두 프로그램, 제목부터가 수상하다. 야밤에 집에 따라가도 되냐니 황당하기 그지없고, 생판 처음보는 사람에게 한끼줍쇼라니 이렇게 무례한 구걸도 없다. 실제로 '집, 따라가도 될까요?'에서 꽤 많은 사람들은 제안을 거절하거나 손사례를 친다. '한끼줍쇼'

椅子不椅子 의자이기를 거부하는 의자, 오카모토 타로의 예술
의자를 생각하다. 몇 년 전 일본의 잡지 '브루타스'에서 본 제목입니다. 가구를 디자인이나 브랜드, 트렌드로 설명하지 않는 소박한 제목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의자를 도구가 아닌 존재로 사고하는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패션도 일상의 품 안에서 풀어내는 사람들이기에 사실 별 새로운 제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에게 이 제목은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라는 말보다 충격이었고, 그만큼 새로웠습니다. 제목의 기사는 의자가 놓인 자리, 의자가 놓인 시간, 의자가 놓인 삶을 얘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의자가 단순히 가구를 넘어 그 이상일 수도 있음을 기사는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앉기를 거부하는 의자 座ることを拒否する椅子',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어불성설입니다.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고 그

절망을 그리는 희망, 카이탄시 풍경
쿠마키리 카즈요시 감독의 '카이탄시 풍경 海炭市叙景'을 보고 스다 마사키가 부른 요시다 타쿠로의 '오늘까지 그리고 내일부터 今日までそして明日から' 영상을 보았다. 어떤 흐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무언지 모를 무언가에 의해 하루가 채워지는 순간이 더러 있다. 어찌됐든 두 영화와 노래는 내게 차례로 다가왔다. 숨이 막혀올 정도로 막막했고, 감정이 내 몸을 뚫고 터져 나올 듯 벅차 올랐다. 어쩌면 영화는, 노래는 내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는 카세 료가 나온다. 오래 전, 아마도 '씨네21'에 다니던 무렵 한 일본 통신원이 올해의 일본 영화로 '카이탄시 풍경'을 꼽은 적이 있다. 카이탄시는 가공의 도시다. 홋카이도에서 촬영을 했을 만큼 극한에

진짜 사랑은 단어 밖에 있다, 렛 더 선샤인 인
사람은 종종 멈춰서곤 한다. 세상 모든 게 애매해지고 모호해지는 상황은 불현듯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모든 걸 혼동케 한다. 자리는 흐릿해지고 감정은 장소를 잃으며 생각은 허공을 떠돈다. 이러한 순간은 우리로 하여금 돌연 멈춰서게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지금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하니 나아갈 수가 없다. 사회적 자아의 상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를 단어의 상실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세상의 모든 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꽃은 꽃이라 부를 때 꽃이 된다는 시구절도 있듯이 이름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것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세계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 역시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다. 세계를 세계라 부르기 전에도 세계는 존재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본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