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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내 편처럼 느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 맨 오브 히즈 워드'

이렇게 단도직입적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기아와 폭력, 혐오와 재난, 불평등과 테러의 현실을 훑어가면서도 이렇게나 명확하고, 흔들림없이 뻗어가는 이야기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없다. 하물며 빔 밴더스라는, 베테랑 거장의 이름으로 쓰여진 영화에서 이런 풍경은 다소 당황스럽다. 하지만 영화엔 알지만 모르고 있던 현실의 희망이 아른거리고, 보고도 지나쳤던 날들의 아픔이 스며들고, 앞뒤로 꽉 막힌,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지금, 이 현실에 숨어있을, 어딘가 잠자는 내일에 마음이 시큰해지는 순간이 있다. 결코 이곳을 버리지 않는 거대한 세계의 품 같은 게 영화를 감싸안는다. 교황 프란체스코의 삶이자, 말, 말이자 삶. 영화 '프란치스코 교황:맨 오브 히즈 워드'를 보며 나의 어제가 떠오른 건 어쩌면 어떤 기도의

세상 반쪽이 그리는 로맨스, 모리스

낙서는 지워지지 않았다. 해변에 힘겹게 그려낸 낙서는 썰물에 사라지지만, 어쩌면 지워지지 않았다. 1971년 출간된 E.M 포스터의 소설 '모리스'를 원작으로 제임스 아이보리가 1987년 완성한 '모리스'는 해변에 스쳐간 어떤 찰나의 이야기다. 20세기 후반 제복을 입고, 정해진 말만 쓰고, 정해진 사람과 사귀고, 관계를 갖는 자연 아닌 자연에 살던 시절, 그 말은 왜인지 그리도 힘들어 말이 아닌 낙서가 되었다. 아빠가 부재한 홀(올란도 웰즈)은 어느 오후 학교 선생님과 함께 해변을 걷는다. 선생님은 소년에서 남자, 남자와 여자, 그리고 둘의 어떤 시간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라고는 해도 그 말엔 알맹이가 비어있고, 에드워드 시대 영국에서 그건 좀처럼 말이 되지 못하는 말, '신성한 비밀'이다. 젖은 해변에

그로테스크한 날씨, '날씨의 아이'

그로테스크한 날씨, '날씨의 아이'

지난 10월 7월에 개봉한 '날씨의 아이'는 아직 걸려있었고, 어차피 한국에서 개봉할 테니, 스다의 영화를 보았고, 일본에서 가장 미움받은 만화를 원작으로 한 '미야모토가 너에게'를 보았다. 두 영화 모두 동정받을 수도 없을 만큼 그로테스크한 우울에, 아마도 국내 개봉은 힘들겠지만, '날씨의 아이'는 지금 고작 개봉 1주일차에 종영할지 모른다. 지방의 작은 아트 극장이긴 했지만, '날씨의 아이'를 혼자서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 '너의 이름은'의 국내 성적은 350만, '날씨의 아이'는 일본에서 1천만을 넘겼다. 어떤 우연도 아닌, 시대가 그린 이 그래프가 그로테스크하다. '날씨의 아이'는 '초속 5cm'만큼 애절하지 않지만, 어른이 되기 이전, 오직 너와 내가 자리했던 시간 위에 씩씩하고, 무지개의

이 시절에 도쿄 #01_살롱 개최합니다.

시작된 시간은 어떻게든 굴러간다 느낀다. 매일이 어제같고 멈춰있는 듯한 좌절 한복판 속에서도 시간은 여지없이 꿈틀대고 있는지 모른다. 서른을 훌쩍 넘겨 멈춰있는 시간의 내일을 알았고, 돌연 혼자가 되어버린 자리에서 남아있는 내일을 알았다. 이제는 왜인지 말하는 것 조차 금기가 되어가는 분위기 속에, 연호가 바뀌고, 시대가 교차하는 도쿄의 오늘을 바라본다. 카페가 책방과 섞이고, 호텔이 책장 속에 들어가고, 여기와 저기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지금의 도쿄는 가장 새롭고 신선한 내일로 다가오지만, 그곳엔 왜인지 이상한 어제가 남아있다. 시모키타자와 상점가에 나붙은 '78년간 감사했습니다'란 종이 한 장. 나는 이 말이 이제야 내일의 문장임을 알 것 같다. 6층과 7층 사이, SHELF67. 시부야와 키치죠지 사

이 시절에 도쿄, #02

#01 세상은 정말 살고 볼일인지 모르겠다.. 잘 웃을 줄도 모르는 내가 늦은 오후 일본 개그의 산실이라 할 요시모토 회의실에 앉아 개그와 웃음, 농담과 코미디에 대해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들었다. 오래 전 초등학교를 되살려 개조한 빌딩은 사뭇 진지하고 무엇이든 일종의 크래프트십이 발동하는 일본은 웃음 역시 순간의 시끌벅적이 아니다. 책방에서 시작해 카페, 영화관, 갤러리, 마켓, 술집, 공쟝...그곳엔 모두 사람이 있었고, 같은 곳에서 조금 다른 곳을 함께 바라보는 별 거 아닌 시간에, 나는 만남이란 걸 이제와 새삼 촌스럽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엔화는 오늘도 오르고, 다만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이들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신주쿠 인파에 파묻혀 더딘 걸음으로 조금 느긋하게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