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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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계절에
금요일 밤, 즉흥적으로 짐을 꾸렸다. 좋아하는 음악들과 팟캐스트를 들으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도착한 한밤의 산장. 고요할 거라 믿었던 산장 주변엔 오색의 불빛들이 가득했다. 천막과 천막이 잇달아 선 야시장엔 전국 각지의 메뉴들이 넘실거렸다. 달은 속도를 늦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술 한 잔 걸친 사람들이 도로를 가로지르는 탓에 그런가 생각했다. 아니면, 늦은 밤 배가 고파져서 그런걸까. 알고 보니, 일 월에 들렀던 그곳이 맞나 해서 그랬다 한다. 그때는 아주 조용한 허허벌판이었다고. 그러던 곳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떠들썩한 것은 도로 위에 그늘을 드리운 벚꽃 때문인가보다. 우리는 벚꽃 터널을 지나 산장에 짐을 풀었다. 아침에 일어나 산장 뒤꼍으로 나가보니, 볕을 쬐던 고양이가 야옹야옹 운다. 주인

파리에서 12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나름대로 불행하다. 의 첫머리를 읽고 아, 하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에 대해 진지하게 곱씹기엔 아직 어렸던 모양이다. 행복한 가정은 각자 나름대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나는 종종 거꾸로 문장을 되새겼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이것도 맞는 말 같았다. 행복에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한 걸까. 돈, 젊음, 건강, 미모..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명제들이 지나갔다. 여행자의 행복은 일상을 비껴나는 자유에서 왔다. 매일 맞추던 알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잠자리에 드는 밤. 빨리 잠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늦지 않게 일어나지. 그러니 빨리 잠이 들어야, 들어야, 들어야. 로 메아리
짧은 기록
이른 아침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냥 커피나 한 잔 마신다는 애들 앞에서 난 뭐라도 좀 먹어야 겠다고 말했다. 눈 앞의 분식집에서 우동 한 그릇을 시켰다. 우동 한 그릇을 얼른 들이켜고, 쌍화탕과 타이레놀을 먹을 생각이었다. 예전 같으면 목이 쉬고 열이 나도 어지간해선 그냥 버티고 말았을 텐데. 한 살씩 나이를 먹을 수록 그런 대범함은 점점 사라져간다. 의자에 짐가방을 올려두고, 에코백도 얹어두려는데 그만 에코백이 훌렁 떨어졌다. 에이 뭐, 하며 들어올려 툭툭 털어내려는데 뭔가 이상하다. 방금 산 쌍화탕이 깨졌다. 뜨뜻한 갈색 액체가 가방 안을 고루 적셨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가방 안의 내용물을 꺼내고 유리병 조각들을 집어내기 시작했다. 분식집 아저씨가 휴지를 둘둘 말아 건네준다. 조각들을 꺼내며 박혔

파리에서 11
나에겐 쇠털만큼 많은 시간이 있어서, 숙소를 옮기기 전날 오후 새로 옮길 숙소까지 살금살금 걸어가 보았다. 퐁피두까지 걸어간 다음, 구글맵이 인도하시는 대로 골목을 꺾어 들어섰다. 벽에 붙은 파란 번지를 이리저리 살피며 계속 걸었다. 이윽고 확 트인 광장이 나왔다. 몇 번 주위를 가늠하고서 발길을 옮긴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 품 속의 번지를 제대로 찾았다. 나는 아래서 창을 한 번 올려다 보고, 건너편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벤치에 앉아 있고, 몇 몇의 아이들이 뛰어논다. 아저씨 둘이 공원에 놓인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고 있다. 흠, 좋았어.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기에, 나는 다시금 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여전히 고요하고, 가끔 맞은편 창문에서 달그락하고 요리하는 소리가 난다. 흐리다

파리에서 10
다리를 총총 건너 유람선 선착장에 이른다. 표를 한 장 끊고, 승선을 기다리며 풍경을 바라본다. 강을 따라 늘어선 철책마다 겹겹이 걸린 자물쇠들. 사방에 사랑의 맹세가 빼곡하다. 이윽고 오른 유람선. 한 여름 오후의 햇살은 쨍쨍하다. 다들 그 햇살을 담뿍 받으며 이층에 모여 앉았다. 시동을 건 배가 강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기름 냄새가 난다. 커다란 엔진 소리는 이내 익숙해진다. 강물이 뱃전에 부딪치고, 그 속도를 따라 바람이 밀려온다. 보잉 썬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아가씨가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한다. 이어 오늘의 코스에 대해 설명해 준다. 불어로 한 번, 영어로 한 번.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경쾌한 웃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 몸에 꼭 맞는 흰 셔츠와 검은색 스커트. 플랫 슈즈. 손목에는 검은 고무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