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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8

뉴욕 8

한량|2015년 9월 14일

도시 곳곳의 공원들에 발자국을 찍는다. 주중의 한가한 공원. 나는 눕기 좋은 자리를 물색해 덥썩 누워버린다. 그리고 높다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본다. 이파리들이 저들끼리 부딪쳐 바삭거리는 소리를 낸다. 가을은 멀고, 그래서 낙엽은 아직이다. 촘촘한 가지 사이로 볕이 조각조각 떨어진다. 커다란 개와 산책하는 사람과, 야무지게 헬멧을 쓴 꼬맹이들과,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밀고 가는 이를 보았다. 공원에 피아노가 어인 일인가, 싶었는데 능숙한 밀고 당기기를 보아하니 아마 공원 연주자인 듯했다. 누운 채 연주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피아노만 멀찍이 밀어두고서 총총 사라진다. 내게 다가와 말 붙이는 이는 청설모 뿐. 주머니며 가방에 과자 부스러기라곤 없어, 훠이 손짓을 했더니 재빨리 알아듣고 돌아

뉴욕 7

뉴욕 7

한량|2015년 9월 7일

미드타운은 온갖 종류의 소요로 가득 차 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 나는 눈치껏 신호등에 맞춰 발걸음을 떼고, 요령껏 인파를 헤치며 나아간다. 눈을 든 모든 곳에 전광판이 번쩍인다. 그래서 홍콩 같기도, 상해 같기도 하다 이내 어떤 곳도 아닌 뉴욕이 된다. 코너마다 선 푸드 트럭에서 물 한 병을 사고서, 계속 걷는다. 직각으로 수놓인 이 도시를 드물게 가로지르는 길, 브로드웨이를 따라. 낯설고 물설은 이 곳에서 가여운 방랑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늘에선 인공위성이 반짝인다. 나침반인 양, 켜 둔 구글맵이 걸음 걸음을 점지해 주니 밤이 이슥해도 두렵지 않다. 새삼스레 오래된 나그네들을 떠올려 본다. 별들을 이어 그린 상상력과 성실한 발자국들 덕에 나도 이곳까지 왔나니. 나의 발걸음은 씩씩하고 곧다.

뉴욕 6

뉴욕 6

한량|2015년 9월 3일

첼시마켓과 브루클린, 소호의 서점에 들렀다. 모두 다 우연이었으나 몹시도 익숙한 곳들. 세계 어디서나 서점들은 비슷한 모습들이다.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 테이블에 전시된 책들, 공간을 메우는 잔잔한 음악, 말 없이 책등을 더듬는 사람들. 서점에서 나는 이방인, 여행자, 소비자 그 무엇도 아니었다. 서점에선 친절로 무장한 표정과, 끊임없는 하우아유 앞에 긴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서울의 여느 서점에서처럼 서가를 따라 떠돌고, 그러다 걸리는 책들을 꺼내 으슥한 공간을 찾아 숨어들기만 하면 되었다. 서점의 공기는 언제나 차분하고, 타인에겐 적당히 무심하므로. 화재를 알리는 비상벨이 울려도, 그들은 읽던 책을 잘 덮어 원래 자리에 꽂아둔 후 주위를 돌아볼 것 같으니. 그러나 그들의 등 뒤에 다가가 조심스런 인

뉴욕 5

뉴욕 5

한량|2015년 9월 1일

동네의 그리스 레스토랑에 세 번을 갔다. 세 번 모두 그릭 샐러드를 먹었고, 술은 그때마다 달랐다. 화이트와인, 그리스 맥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칵테일. 쟁반처럼 생긴 접시엔 토마토와 오이, 양파와 올리브. 그리고 치즈가 한가득 올려져 있다. 아직 따뜻한 피타빵과 함께 접시 위 모두를 싹싹 비운다. 몇 알 안 되는 올리브들은 짠 맛이 도드라졌다. 나는 올리브 한 알에, 술을 두세 모금씩 마셨다. 이것이 그리스일까. 나는 그 곳에서 친구에게 줄 엽서들을 썼다. 칵테일이 독했는지, 엽서의 말미에서 눈물이 조금 났다. 이것 또한 그리스일까. 역시 동네에 있는 작은 피자 가게.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서자, 가게가 아니라 화덕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좁은 피자 가게 안은 오븐이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했다. 한 조각에

뉴욕 4

뉴욕 4

한량|2015년 8월 30일

제멋대로의 스케줄 속에, 유독 챙기는 날이 있다. 미술관에 가는 날. 그런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가방을 가볍게 해 집을 나선다. 지하철 역에 내려 사람들이 졸졸졸 걸어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니, 미술관이 나온다. 나는 개장 시간의 미술관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밀도가 높아지기 전의 미술관. 어깨 너머로 기웃거릴 일도 적고, 화장실도 쾌적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위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 나는 흰 벽과 마루바닥으로 나뉜 공간들을 거닐며, 작품 사이를 마음껏 배회한다. 걸음을 옮기기 전 캔버스 한 켠의 작가 싸인에 눈을 맞춘다. 저 싸인을 남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해 보면서. 그렇게 한 층을 둘러보고 미술관 까페의 첫 손님이 된다. 미술관의 까페는 이렇다 저렇다 할 이유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