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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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정과 짧은 이사
앞좌석에 달린 화면에선 실시간 비행 경로를 보여주었다. 출발지로부터 걸린 시간이 열 시간이 넘어가니 절로 몸이 비틀렸다. 아, 내가 무슨 부귀 영화를 보겠노라고,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밥 한 끼 먹고 눈 조금 붙였다, 책 좀 들여다보면 도착하는 동남아 휴양지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거기엔 드넓은 수영장과, 수영장이 우스운 거대한 바다와 그 곁에 늘어선 야자수, 싸고 싼 과일주스가 넘쳐나겠지. 푹신하고 널찍한 썬베드도 있을테고. 좁디 좁은 이코니미 석에서 이리저리 몸을 구부려가며 버티고 있자니 입맛도 달아났다. 그 덕에 두 번째 기내식은 과일 몇 점만 먹다 말았다. 비행기가 지나온 경로를 보니, 시퍼런 바다가 한가득이다. 마침, 나는 며칠 전 를 다시 보았었지. 그때, 옆자리
떠남
막힘 없는 도로를 줄곧 달렸다. 바다 위에 선 다리를 지났고, 몇 개의 섬들을 곁눈질로 보았다. 살사 음악을 덮는 굉음에 고개를 올려다보니,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었다. 그렇게 비행기의 배꼽을 보았다. 백키로 이상씩 밟는데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실연하고서 혼자 인천 공항까지를 달렸다고 했다. 공항에 도착해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그랬던 친구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졌으니, 그게 또 옛일이다. 덜마른 머리를 털며, 가방 깊숙히 넣어놓은 노트북을 다시 꺼낸 이유는 뭐라도 쓰고 싶어서였다. 밤이 늦었는데, 잠은 오지 않는다. 달과 저녁으로 삼계탕을 먹고, 서점으로 향했다. 우리는 느슨하게 흩어져 각자의 관심사를 뒤적였다. 나는 한국사 서가 아래 쭈그리고 앉아 소설을 읽었다.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아이

미드나잇 인 상하이
금요일 퇴근 후, 김포로 향했다. 급하게 결정된 여행. 나는 출국일 며칠 전에야 비자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비자가 꽤 비싸다는 것도. 아, 이거 일이 커지는 느낌이다. 살짝 주저했으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한산한 공항 면세점을 구경하고, 의자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렸다. 두 시간 남짓 날아, 도착한 상해. 출국장 게이트 앞엔 이 주 만에 만나는 달이 서 있었다.주말에 상해 올래? 연휴도 하루 있고, 마사지 받고 좋잖아. 달은 나를 잘 안다. 다른 것 다 필요없다. 이렇게나 소박하다. 달 없는 사이 나는 두 다리 쭉 뻗고 잘만 잤는데, 며칠 바빴더니 온몸이 찌뿌둥하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바로 동네 마사지샵으로 향했다. 한 시간 동안 발 마사지를 받는데, 둘이서 조잘조잘 떠들다 이

파리에서 13
역 앞의 브라세리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먹는다. 토요일 아침 치고 이른 행보다. 거리도 한결 한산하다. 다들 휴가를 떠나거나, 늦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다. 여행와서 마시는 커피는 그 맛이 다르다. 설탕 봉지를 뜯어 에스프레소 위에 뿌린다. 스르르 녹아드는 설탕을 스푼으로 몇 번 휘젓는다. 그리고 꼴깍꼴깍 마신다. 쓰면서 달콤하다. 향도 강렬하다.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투여한다는 느낌이 없다. 서울에서의 아침 커피는 복용의 느낌이 강했다. 집에서 부지런을 떨며 내려온 커피든, 출근길에 한 잔 사들고 온 커피든 맛과 향의 차이를 구분할 새가 없다. 엄지발가락으로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부팅되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한 모금 마신다. 이내 뜨는 메신저를 확인하고, 그날의 일정을 정리한다. 그러면서 또 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