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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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3
하루 두어 번 밖을 돌아다녔다. 몇 번 걸어보고 나니, 큰 윤곽이 잡혔다. 이 정도 거리는 걸을 수 있겠구나. 여기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여기서부터 이렇게 돌아오면 되겠구나. 하고. 그 나들이의 앞 뒤에 공원이 들어섰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공원은 보주 광장. 이른 아침의 공원은 한가롭다. 비둘기들이 맴을 돌고, 참새들이 쫑쫑거리며 뛴다. 등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 공원을 바라보고 앉았다. 공원의 사 면을 에워싼 오래된 집들을 바라보고, 열린 창과 닫힌 창들 속 사람들을 생각했다. 불행히도 나이를 먹어버렸다. 아름다운 공원을 매일 마주하며 사는 사람들 역시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겠구나, 생각했다. 어렴풋하게나마 도시의 집세를 상상하고나니, 걷다가 만나는 부동산 앞에선 창가에 붙은 매물들

파리에서 2
현관문을 열면, 왼편엔 작은 화장실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짧은 복도. 복도의 벽엔 옷걸이들이 몇 걸려있다. 복도를 지나면, 트인 공간이 나온다. 그 공간이 이 곳의 전부다. 오른편으론 작은 개수대와 가스렌지. 조그만 미니 오븐이 있다. 그 아랜 냉장고와 세탁기. 그리고 쓰레기통이 놓여있다. 개수대 옆으론 나무로 짠 장이 있고, 그릇, 볼, 티팟 등이 천장에 닿도록 차곡차곡 얹혀있다. 그 앞에 식탁이 있다. 부엌엔 커다란 창이 나 있어, 옆 건물의 세모꼴 지붕과 마주한다. 샤워실이 있고. 코드가 뽑힌 라디에이터가 있다. 라디에이터 옆엔 큼지막한 거울이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다. 식탁 의자에 앉아 왼편을 돌아보면, 나름의 거실이 있다. 이 작은 거실에 벽난로도 있다. 방 구석 책상 앞엔 라탄 의자가 있다. 종이가

파리에서 1
그 건물의 문은 모두 빨간색이었다. 여러 번 페인트를 덧칠해 원래보다 조금 더 두툼해진 문. 나는 캐리어와 함께 문 앞에 섰다. 다시 한 번 벽에 붙은 번지를 확인하고 문을 밀어보았다. 열리지 않았다. 벽에 주르르 붙은 초인종을 누르려 했으나, 어떤 단추인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낯설고 긴 번호를 눌렀다. 남자의 목소리. 나는 두서 없는 영어로 더듬더듬 말했다. 나, 여기 건물 앞에 도착했는데 문을 열 수가 없어. 문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이모자라는까닭이다. 문을열려고안열리는문을열려고. 이상의 시가 생각났다. 생활이 모자란다는 것은 그럴싸하다. 나는 아직 그 집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니.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밖의 햇살과 다르게 건물 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고요했다. 좁은 복도 끝에는

제주에 갔다. 두번째
국밥 한 그릇 먹고 돌아오니 깜깜한 밤이다. 저 멀리가 바다라는 것은 파도 소리로 알 수 있다. 손 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가물거린다. 앙꼰의 별들이 떠오른다. 카리브 해의 파도가 철썩철썩 치고, 손으로 만든 둥근 원 안에만 수십 개의 별들이 반짝였다. 지루할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옛다 여기 보렴 하고 별똥별이 떨어졌었다. 서너 개까지 보고선 짜내어 소원을 떠올리지도 않았다. 품성이 소박한 것이 아니라, 상상이 빈곤해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곳, 제주의 밤도 바닷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서울처럼 세차지 않고 촉촉하다. 좋구나, 하며 침대에 눕는다. 평소처럼 침대 발치가 아닌, 저 멀리 짐 가방 근처에 핸드폰을 밀어둔 채. 오전 여섯시와 여섯시 오 분에 맞춰둔 알

제주에 갔다.
제주에 갔다. 항공권 예약 사이트를 며칠 들락날락하며 표를 잡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고심하다 최종 결정을 했다. 그간 잡아둔 표를 취소하며 내역을 살피는데 결제완료라고 뜬 일정 하나가 이상하다. 고객센터에 문의 전화를 하니 돌아오는 답은. 고객님, 그건 이천십삼 년 스케줄인데요. 아,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딱 일 년 전, 이맘때였다. 마치고 공항으로 날아가다시피 하여 비행기를 탔고,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돌아왔었다. 체력이 바닥을 치던 때라, 여행 중 귀한 시간을 쪼개어 병원에 다녀오기도 했다. 무조건 쉬고 싶어서 숲을 찾았었다. 이천십삼년의 제주에서는 숲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일 년 사이 잘 컸다. 공항까지 운전을 해서 가기로 했다. 초보에겐 크나큰 도전이다. 내부순환로를 따라 잘 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