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is Disease
Posts
71 posts
아메리칸 스나이퍼
영화는 전쟁영웅을 기려서는 안 되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를 보고 떠오른 의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왜 내가 불만족을 느끼는지 자문해 보았다. 이 영화는 분명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다. 주인공 크리스 카일이 겪는 전쟁의 체험은 매우 리얼하게 묘사돼 있으며,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장인적 솜씨도 흠잡을 데 없다. 하지만 왜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이리도 기분이 찜찜한가? 기대했던 것만큼 반전영화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전쟁을 다루는 영화는 꼭 반전영화여야만 하는가? 왜 전쟁 영웅을 기리는 영화여서는 안 되는가? 나는 곰곰이 자문해 보았다. 우선, 왜 우리는 반전영화여야만 그것을 예찬하는가? 지금까지 추앙받은 ‘전쟁

목숨
졸업영화의 시나리오를 탈고했을 때, 나는 서두에 불경에서 발췌한 다음 인용구를 적어두었다. "부처가 열반을 앞둔 무렵, 제자인 아난다는 슬픔에 빠져 있었다. 이를 안 부처가 아난다를 불러 말했다. '아난다여,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일찍부터 가르쳐준 바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 친한 사람과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난 모든 것은 죽지 않을 수 없다. 죽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각색하는 작품에 불경이라니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구절이 작품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주인공이 공항에 '왔다가 떠나는', 우리 모두의 여정의 무상한 본질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자유의 언덕
상영관을 혼자 전세 내고 봤다. 홍상수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을 마치 자기 속옷 다루듯 갖고 논다. 그의 영화에 열광하는 편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작가적 세계를 확고히 구축하고 거기서 누가 보건 자유로이 노니는 어떤 경지에 오른 모습만은 신작을 볼 때마다 감탄하고 만다. 아직까지도 를 가장 좋아하지만, 이번 것도 유쾌해서 좋았다.

부부의 거처 (Domicile Conjugal, 1970)
신혼의 아내는 인도를 걸어간다. 카메라는 그녀의 싱그러운 종아리를 줄곧 따라간다. 아내는 과일가게에서 귤을 조금 산다. “여기 있습니다, 마드모아젤.” 가게 주인이 그렇게 말하자 아내는 당차게 대꾸한다. “아뇨, ‘마담'이에요.” 남편의 직업은 꽃을 염색하는 일이다. 공동주택 앞마당에서 그는 하얀 꽃들을 앞에 두고 있다. 2층에 사는 이웃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에게 뭐라고 하자 카메라는 그에게 이동한다. 카메라가 다시 돌아오면, 꽃들은 감쪽같이 빨간색으로 변해 있다. 아내는 바이올린 가르치는 일을 한다. 꽃을 물들이던 남편의 귀에 때마침 아내가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를 신호로 남편의 시선이 공동주택 입구를 향하자, 아니나다를까 아내의 어린 제자와 엄

'군도'를 집어삼킨 '조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는 예고편을 볼 때부터가 범상찮았다. 본격 상업영화로(그리고 시대극으로) 전향한 때부터, 윤종빈 감독의 영화는 예고편에서 엿보이는 의상과 프로덕션 디자인만으로도 반드시 보아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여느 영화들과 달리 고증과 디테일에 대한 감독의 집요함이 느껴졌고, 이러한 집요함은 영화 전체의 완성도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뚜껑을 열어본 결과 는 기획과 캐릭터, 캐스팅, 촬영, 의상, 프로덕션 디자인 등의 면에서 봤을 때 한국영화에서 실로 오랜만에 보는 눈부신 수작임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최동훈 감독의 이후로 이토록 장쾌한 영화적 활력을 지닌 한국영화는 간만이었다.

![[일상] Eave 65와 목새 택타일 | 토프레 무접점 느낌 | 타건 영상 있음](https://img.zoomtrend.com/2026/06/07/1780838085-SE-77297eb3-90bf-43a7-9629-75fd8530e37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