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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지로의 여름

키쿠지로의 여름

엄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어떤 세상일까. 그리움에 이끌려 걷는 푸근한 길일까. 아니면 미움을 억누르며 울부짖는 아픔의 세계일까. 키타노 다케시 감독의 을 보고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자 아이 마사오는 혼자다. 아빠가 세상을 뜬 지 오래라 혼자고, 엄마는 일하러 나가서 혼자다. 할머니가 돈부리, 오니기리를 만들어 주지만 혼자다. 기껏 찾아온 여름 방학에 친구들은 온 데 간 데 없어 혼자고, 그러니까 혼자다. 그가 혼자가 아니게 된 건 어느 정체 불명의 남자를 만나면서부터다. 이 남자는 수상하다. 말로 치고받는 아내가 있지만 정처없이 돌아다니고 있어 수상하고, 직업이 없는 것 같아 또 수상하다. 엄마 찾아 떠나는 마사오의 길에 선뜻 따라가겠다는 것 역

엘르

엘르

폭력은 유전되는 걸까. 폭력을 이기는 방법은 또 다른 하나의 폭력 뿐인가. 폭력 앞에 사람은 무기력한가. 그럼 종교는 어디서 무엇을 하나.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한 영화 를 보고 든 생각이다. 폴 버호벤 감독은 가장 급작스럽고 가장 지독해서 가장 폭력적인 장면을 태연자약하게 던진다. 그것도 수 차례에 걸쳐서. 보고있는 우리는 그저 폭력을 당할 뿐이다. 타인의 폭력은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타인의 고통은 참고 있기 힘들 정도로 슬프다. 하지만 영화는 이내 폭력이 아닌 폭력의 자리, 폭력이 쓸고간 폐허의 기운에서 사람을 얘기한다. 미셸은 강하다. 그녀는 아마 내가 본 영화 속 가장 강한 인물 중 하나일 거다. 강간을 당하고도 직후 자리에서 일어나 깨진 그릇의 조각들을 쓸어 담고, 피

작은 애씀의 빛,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

작은 애씀의 빛,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

손수건을 손에 잡고 있습니다. 움직여봐야 소심하게 접었다 둘 뿐 손수건을 그냥 두지 못합니다. 풋볼 게임에 매달리고 이글스 팀을 응원하느라 병원에서 돌아온 아들을 반기지도 못하는 그는 폭력으로 감호소에 들어갔다 온 아들 팻(브래들리 쿠퍼)의 아빠입니다. 팻의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내 니키(브레아 비)가 학교의 물리 선생님과 함께 샤워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그는 폭력으로 감호소에 들어갔고, 니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혼식 비디오를 찾느라 새벽 세 시에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샤워 신에 흘렀던 결혼식 음악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아픔이 아픔을 낳습니다. 상처에 아파하는 이는 또 한 명 있습니다. 남편의 비극적인 사고로 미망인이 된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회사의 모든 남자와 잠을 자는

꿈의 제인

꿈의 제인

흔들리는 나무 가지, 들려오는 바람 소리, 천장을 빙그르르 도는 미러볼과 뉴 월드라는 간판. 은 처음부터 현실 어딘가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지만 보일 것 같은 세계를 조금씩 드러냅니다. 힘들고 아픈 현실에 비상구라도 내어 쉬게 해주려는 듯 칠흙같은 현실에서 용케도 출구를 찾아내 유영합니다. 제인(구교환)은 체념을 일상처럼 달고 사는 여자고, 소현(이민지)은 갈 곳 없이 쉼터를 떠도는 소녀며, 심터 커뮤니티에 매여있는 무수한 소년과 소녀들은 자본주의의 냉혹한 칼날을 하루도 빠짐없이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갈 곳이 없다는 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건 세상에서 유리될 수 밖에 없는 지옥같은 처지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세상을 비판하는 대신 이들의 삶을 보듬습니다

심호흡

심호흡

어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를 봤다. 어쩌다 오페라 콘서트에 가 '지금 이 순간'과 '나는 문제없어'를 들었고, 어쩌다 사카구치 켄타로가 나오는 을 봤다. 그리고 또 어쩌다 데이빗 O. 럿셀의 영화 을 보았고, 요즘은 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나레구미의 '심호흡'을 연이어 듣고 있다. 어느 건 지나간 과거를 어쩌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을 얘기하고 있었고, 어느 건 지금 이 현재를 어쩌지 못해 과거를 되돌렸으며, 또 어느 건 과거에 매달려봐야 아무 쓸모도 없다며 현재를 그리고 있었다. 수상한 우연, 기묘한 필연.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온다고 하는데, 내게도 그 일이 벌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