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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사랑을 알다

말은 때때로 얼마나 교활할 수 있을까. 말은 얼마나 완전하고, 또 동시에 취약할까. 아마도 10여 년, 시간이 흘러 다시 본 스파이크 존스, 아니 호와킨 피닉스의 ‘그녀'는 내게 어김없이 수많은 말들에 관한 영화였다. 연인들 사이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회사의, 불특정 ‘그녀'에게 보내는 말들로 시작하는 영화는 수많은 남녀 관계를 (말들로) 지휘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관계는 챙기지도 못하는 이별 1년차 테오도르의 건조한 일상에 이야기를 편다. 애매한 거리감의 친구 여자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와 조금 더 애매한 남자 친구 폴(크리스 프랫)과의 얼마 되지 않은 친분이 있지만, 그는 대부분 혼자이고, 테오도르가 대화을 건네는 상대는 의뢰인 편지 속 타인이거나 가슴 포켓에 쏙 들어가는 ‘인공지능 운영체계' 단말기 뿐

일본 영화는, 망했나?

며칠 전에 ‘일본 영화는 망했다'는 류의 글을, 어쩌다 클릭해버렸는데 너무나 화가나 슬퍼지고 말았다. 기사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까지 들먹이며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망했다'의 이유는 이미 오래 전 문제화되었던 ‘제작위원회' 방식의 폐해거나 원작에 의존하는 일본영화의 10년 넘은 고질적 딜레마, 애니메이션과 도호의 독과점과 같은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이야기하나 싶은 것들 투성이들. 10년, 2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일본 영화는 그 세월도 거스르며 퇴보의 시간을 걷고있나. 그건 또 얼마나 영화적 플래쉬백인가. 필자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같은 영화들로 일본 영화의 나름 전성기를 설명했지만, 그건 꼭 그런 영화들만 사와 장사했던 당시 한국의 외화 시장 사정의 이야기일 뿐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망상'이 꾸는 꿈, 어쩌면 '일드'가 돌아왔다

일본의 12년차 배우 마츠자카 토오리에겐 일명 ‘망상의 기록'이라 불리는 두 권의 책이 있다. 제목도 있는 그대로 ‘망상'과 ‘망상2’인데, 이건 내게 좀 놀람, 그리고 배신이었다. 처음엔 그저 사전에 적힌 그대로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주관과 허황의 가벼운 수필 정도라 생각했지만, 주문을 하고 1주일, 집에 도착한 건 그럴싸한 사진집과 같았다. 판형부터 단행본의 국판이나 사륙판이 아닌, A4를 꽉채우는 국배판. 표지는 반짝반짝 코팅되어 있었고, 띠지에 적힌 문구는 ‘사상 최초 플라이어 북.’ 아마존 카트를 채울 때 난 왜 그걸 보지 못했을까. 그러니까 이 책은 가상의 영화에 대한 전단지 홍보물, 그것만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영화 일련의 과정을 촬영, 편집, 그리고 홍보를 포함 개봉 준비라고 한다면, 마츠

'모기리 카타기리 하이리'의 미니멀 아오모리産 SF, 이건 말장난이 아니고요.

카타기리 하이리를 아시나요.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갓차맨'의 주제가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던 40대 일본 여성. 독특한 외모 탓에 이름은 모른 채 그의 영화를 봐왔던 게 십수년인데, 카타기리 하이리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영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1인임에 틀림없다. 40년차 배우이지만 그녀는 '쉬는 날이면 자신의 고향이자 동네 극장 '키네마 아오모리'에 가 자원봉사(아르바이트가 아닌)를 하고, 명색에 배우의 자원봉사이지만, 그 일이라는 게 고작 상영관 문앞에서 표를 검수하는 것 뿐이다. 일본에선 그걸 '모기리'라 하는데, 카타기리 '하아리'와 '모기리,; 이 딱 들어맞는 라임은 그냥 우연일까. 코로나 이후 뉴스들은 '잃을 잃은 배우의 극장 아르바이트' 식으로 보도를 하곤했지만(나도 그렇게

'돼지'가 '우물'에서 깨어난 날, '인트로덕션' -홍상수 영화의, 어쩌면 '창세기'

세상 모든 영화는 하나의 ‘시작'을 암시하는 '오프닝'이라 생각하지만, 홍상수의 25번째 영화는 제목이 ‘인트로덕션'이다. 우리 말로 옮겨보면 시작이거나 도입, 혹은 입문이거나 첫 번째 챕터.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의 제목은 어떻게도 영문인 ‘인트로덕션'이 되어야 한다는 감각이 있다고 이야기했고(심지어 예고편 오프닝이 그 설명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그 다운, 모호하고, 심층적인 이 뉘앙스의 이야기는 그의 ‘인트로덕션'이 우리가 쉽사리 생각하는 여타 ‘시작'들과 (기본적으로) 다름을 ‘선언'하고 있다. 오로지 이곳에만 존재하는, 어쩌면 그조차 아닐지도 모르는. 홍상수 영화에서 제목이 언제 한 번 단순한 타이틀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 역시 스스로 ‘강조'를 했듯 ‘인트로덕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