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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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시카고
시카고에 간 이유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몇 달 전부터 만날 날짜를 꼽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그래! 그럼 시카고에서 만나자. 가 되었다. 시카고를 동네 지하철역 5번 출구처럼 말했으나, 사실 그 도시에 대해서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여행 전까지 뉴욕도 겉핥기로만 훑은 상태였으니. 뉴욕에서 스튜디오를 빌려 혼자만의 시간을 듬뿍 누린 후라, 나는 급격히 가난해졌다. 그리하야 아주 오랜만에 배낭여행자 분위기로 찾은 호스텔의 도미토리 룸. 짧게 머무르는 만큼 도심과 가까운 곳을 원했고, 그러다 보니 당첨된 이층 침대의 한 칸. 그간 다녀본 호스텔들은 다양했다. 어두컴컴하게 좁아터진 방도 있었고, 마당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브라질 청년들과 '각자의' 침대에 누워 담소를 나누던 기억도 아련하고

뉴욕 12
헤드윅에 아직 동베를린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직 헤드윅이란 이름을 얻기 전이기도 하다. 장벽 근처에 엎드려 태닝하고 있던 한셀에게 슈가 대디가 다가온다. 그는 보잉 선글라스를 벗고선 환한 웃음과 함께 젤리를 건넨다. 화려한 색깔에 질감도 다양한 미제 젤리. 한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긍적적인 맛이라고. 얻어 들은 풍문으로도 이 도시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주관적인 여행 난이도를 무척 낮춰주었다. 혼자 거대한 세계를 맞닥뜨렸다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크레딧 카드와 캐시, 그리고 아이폰만 있다면. 구글맵의 빨간 점이 이끄는 곳으로 걷다 나는 종종 다른 길로 빠지곤 했다. 익숙한 브랜드들의 유리문을 밀어젖히면, 에어컨 바람이 목 뒤를 쓸어내렸다.

뉴욕 11
태양을 착즙하면 이런 볕이 뚝뚝 흐를테다. 그리니치 빌리지를 따라 줄곧 걸었다. 작은 레스토랑과 세탁소들을 구경하면서. 첼시 마켓에 이르러 숨을 골랐다. 서늘한 서점에 틀어박혀 한참을 구경했다. 카드 섹션을 빙글빙글 돌리며 친구에게 쓸 엽서를 골랐다. 에코백과 파우치들도 잠시 만지작거리다 나왔다. 마켓 앞에선 조그만 거리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파라솔 아래의 벤치에 앉아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아가씨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은색 샌달을 보고 알았다. 뛰어가 어깨를 툭 치니 그 아가씨가 맞다. 우리 둘은 신기해하며 짧은 인사를 나눈다. 열네시간의 비행이 반쯤 지났을 무렵, 가벼운 인사와 함께 여행 이야기를 나눴던 사이였다. 각자의 숙소까지 가는 방법을 탐구하고, 여행 계

뉴욕 10
백 년을 넘긴 아파트들의 벽엔 진한 컬러의 광고들이 그려져 있다. 나는 생각한다. 어느날 끝없는 눈보라가 밀려와서, 혹은 우주의 무언가가 추락해서, 우리 모두가 사라지고 난 다음 이 그림들을 발견하는 이가 있다면. 저 그림들은 어떤 표지가 될 수 있을까. 현세의 복잡미묘함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희미해진 색을 보며 흥겨운 파티나, 달콤한 오레오를 상상할 수 있을까. 페인트를 칠하는 손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뉴욕 9
타인의 삶과 나를 견주는 것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값싼 우월이나 자기 연민에 허우적대는 일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나 역시 그 사이를 오고 가곤 했다. 쳇바퀴 안에선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번민임을 알면서도. 그러나 나는 고백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몹시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헤드윅이 떠올랐다. 감격에 젖어 사들고 온 오에스티는 씨디였으므로 서울에 와서야 틀어볼 수 있었다. 출근길에선 이를 악물어서 그랬는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언제나 퇴근길이 문제였다. 차창을 모두 올려 나만 존재하는 공간에서 나는 에어컨과 씨디를 미친듯이 틀어댔다. 나에게 강림하는 천사의 음성. 베이스와 기타와 건반과 드럼. 썬글라스 밑으로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땐 사소한 충동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CV] [Comi] 'ファイブスター物語'(더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 19권. 연재분에서 벌어지는 '검성 대 검성'](https://img.zoomtrend.com/2026/06/06/1780766083-ECB2ABEB93B1EC9EA5EB8DB0ECBD94EC8AA4.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