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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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16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나는 이 대구를 사랑했다. 진정 도달하기 어려운, 아니 일상이고 여행이고간에 숨 쉬고 살기에도 벅찬 시대란 것을 모르던 시절의 일이었다. 단편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젠틀하고 스윗했던 곳. 이 긍정적인 나라에서 나는 별 탈 없이, 그러니까 여행자 보험의 약관을 들여다 볼 일 없이 무난히 여행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몰래 소매치기 당하지도 않고(바르셀로나), 대놓고 소매치기 당하지도 않고(역시 바르셀로나), 공무원에게 돈을 뜯기지도 않았다(쿠바). 처음으로 총기 소지 허용국을 밟는 탓에 어느 뒷골목에서 실제 총을 보는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본다면 그게 총구가 아니길), 뉴요커들의 손엔 리볼버 대신 아이폰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벤티 사이즈의 음료(여름이니

뉴욕 15
원래는 가족 여행이 될 뻔했던 여행. 홀로 이 주 조금 넘게 떠돌게 된 데에는, 각자의 욕망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의논을 거듭하며, 우리는 휴가와 휴가 비용을 각자 원하는 곳에 쓰기로 합의했다. 나는 미리 예약해 둔 비행기표와 숙소를 변경하지 않았다. 여행에 필요한 몇 가지 준비물들을 사고, 먼지가 내려앉은 캐리어를 펼쳤을 때도 여행 전 무드는 여느때와 다름 없었다.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지우며, 가방을 꾸리는 틈틈이 설레는 마음. 걱정 어린 말들은 전화를 타고 건너왔다. 정말 괜찮겠니, 위험하지 않겠니. 어조는 따스했으나 듣는 나는 달갑지 않았다. 행간의 의도는 이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남편 없이 혼자서 여행이라니. 거기엔 뭐랄까, 보호자의 동행 없이 그러니까 겁도 없고, 철도 없다는 느슨한 꾸지람이 있었
뉴욕 14
국물이 먹고 싶어 들어간 일본 라멘집에서,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오픈 키친 안의 주방장과 서버들부터 손님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아사히였나 삿포로였나, 생맥주를 한 잔 마시며 기다리자니 곧 주문한 라멘이 나왔다. 나는 적당한 고명을 곁들여 야무지게 면을 들어올리며, 이곳에서 젓가락질 제일 잘 하는 사람은 나다. 라는 자신감에 뿌듯해했다. 이것이 나의 글로벌 감각이다. 상대성과 민족성을 전제로 한 초라한 승리. 이를테면, 손재주가 뛰어난 민족이다. 에서 기인한. 여차하면 걸어서 떠날 수 있는 공간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정서는 다르지 않을까. 인천으로 향하던 어드메 국도에서, 커다란 표지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초록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진 흔한 표지판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시안
뉴욕 13
출국을 며칠 앞두고 찾은 은행. 직원은 환전의 목적을 묻더니 친절하게도 여러 단위의 지폐를 꺼내들었다. 백 달러부터 일 달러까지 그득그득. 덕분에 내 지갑은 색색의 종이로 가득 찼다. 여행의 나날이 지날수록 지갑은 뚱뚱해졌다. 동전들은 단위만큼 색과 크기도 다양해서, 이방인의 눈엔 쉽게 헤아려지지 않았다. 수줍게 한 손에 동전 뭉치를 올려두고, 알아서 골라가셔요 란 눈빛을 보내는 것도 살짝 부끄러워질 때. 때가 왔다. 지갑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동전을 털어야 할 때가. 까페에 들어가 벽에 붙은 메뉴를 흘깃거리며 줄을 선다. 가격 끝단위까지 정확히 맞춰 한 손에 동전들을 쥐고 차례를 기다린다. 능숙하게 주문을 하지만 언제나 내야할 금액은 모아쥔 동전보다 많다. 고국과는 사뭇 다른, 택스와 팁이란 관습 때

잠시 시카고 2
친구와 친구 남편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호수 부근의 공원을 거닐었다. 우리는 서로 작은 선물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친구의 부른 배는 자연스러웠다. 부옇게 흐린 하늘 아래, 살짝 흩날리는 분수 앞에 앉아 우리는 함께 해 지는 것을 보았다. 거대한 건물들 뒤로 그날의 해가 조용히 저물고 있었다. 지내는 것은 어때, 일 하는 건 어때, 같은 이야기들. 우리의 과거와 지금과 앞으로의 일들. 혼자 조금 긴 여행을 할 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쓸쓸함. 만날 것을 고대하고 헤어짐을 미리 아쉬워하며 나는 그 쓸쓸함을 달큰하게 즐겼다. 예전처럼 내일 만나, 하고 헤어질 수 없는 거리. 우리는 만났던 밀레니엄 파크에서 다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나는 한밤의 다리를 지나고, 골목들을 지나 숙소로 돌아와 누웠다. 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