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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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posts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1936)
유성영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슬슬 채플린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는 "떠돌이(The Tramp)"캐릭터. 이 영화도 시작은 떠돌이가 아닌 나름대로 성실한 공장 노동자로 시작한다. [자유를 우리에게]에서 그대로 옮겨온 끔찍한 노동 현장. 그리고 이내 다시 떠돌이로, 시대는 노동자 채플린에게 다시 떠돌이가 될 것을 종용한다. 발작에 가까운 직업병에 시달리고 기계에 집어삼켜지는 끔찍한 일을 겪고 나서도 일자리가 생기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렇게 웃지 못할 코미디로 채플린은 대공황을 스크린 위에 함축적으로 재현한다. 기괴하게 위엄있는 공장, 그렇게 으리으리한 기계 장치들이 있는데도 그 옆에 나사 조이는 노동자들이 줄 지어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노동자와 기계 장치 사이에 구분이 없는 것이다. 오랜 시
시티 라이트 City Lights (1931)
도시의 위정자들은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동상 앞에서 자신들의 형편을 자축하지만 같은 프레임 안에서 떠돌이(The Tramp)는 등 대고 맘 편히 누워 잘 곳 하나 갖지 못한 채 도시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쫓겨난다. 높으신 분들이여, 당신들이 뻑적지근하게 자축하는 그 도시의 풍요는 대체 누굴 위한 것인지요. 떠돌이 혹은 부랑자라 불리우는 하나의 캐릭터로 수십년, 이제서야 드디어 떠돌이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이 영화는 첫 씬부터 문제 하나를 툭 던지고 시작한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설립 이후, [황금광 시대]에 이어서 또 한 번 떠돌이 캐릭터와 함께 장편 영화로 돌아온다. 제목이 중요한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떠돌이에게는 세 가지의 빛이 있다. "눈
퀴즈 쇼 Quiz Show (1994)
텔레비전 드라마와 극장 영화의 차이, 영화관은 결국 팝콘 장사가 본질이고 영화 앞에 광고도 붙이지만 어쨌든 관객은 영화 자체에 돈을 지불한다. 하지만 드라마, 아니 텔레비전의 모든 컨텐츠는 전적으로 기업 광고에 의해 지탱된다. TV쇼는 인문학에 정통한 평론가들이 너나없이 달라붙어 예술적 가치를 발굴해내지도, 컬트 팬들에 의해 유의미하게 재소비되지도 않는다. TV쇼 시청률이라는 것은 정확히는 광고가 노출된, 즉 기업이 지불한 광고료에 대한 "밥값"을 그 프로그램이 해냈냐 못했냐에 대한 지표에 다름 아니다. TV는 ([네트워크]에서 신랄하게 지적되었듯이) 결국 광고를 붙여주는 기업이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TV쇼의 모든 것은 사실은 광고주의 의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해도 된다. 신념있는
네트워크 Network (1976)
50년대,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된 이후 가정에서의 일상은 경천동지하게 패러다임이 바뀌고 만다. 이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그림을 보면서 같이 울고 웃게 되고야 만 것이다. 90년대 인터넷 보급도 그 변화에는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그렇게 텔레비전은 단지 매체로서 화려하게 등장했을 뿐 아니라 매체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삶을 뒤집어 놓았다. 장 보드리아르가 "시뮐라시옹" 이론을 통해 경고한 현상을 실제로 세상에 구현한 것이 바로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실제 삶을 기록해 보여주는 대신 어떠한 "경향"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해 대중에게 보여주고, 시청자는 그것들 받아들여 실제 삶에 반영하게 된다. 미디어가 삶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미디어를 흉내내는 현상, 가짜가 실체를 대체하는 상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