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zwonsuv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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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그녀가 흘린게 분명한 침냄새에 대하여
통상적인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간혹 환상에 빠질 때가 종종있다. 통상적인 단어를 배제하면 우리는 늘 연애를 통해서 환상에 빠진다. 그대와 있을 때면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손동작 하나에 갖가지 이유를 덧붙혀 해석하고, 오로지 수단으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송곳으로 찔러대는 영화도 그대와 함께라면 내 안구를 얼마든지 매물로 내놓을 수 있다. 가슴을 울리던 신나는 음악도 이미 심장부터 시작해서 귀로 들려온다. 신난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다. 사랑이다. 사랑이 만들어 놓은 정당한 행복감이다. 우리 모두는 심리학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카타르시스를 연애기간 동안 소비한다. 뭐, 얼마동안은. 잠자리도 영 시원찮고, 가슴 어딘가보루터 슬금슬금 올라오는 권태의 암내가 코끝을 찌른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히치콕의 위대하게 답답한 영화
는 역설적으로 꽤 답답한 영화다. 우선 명확하게 주어지는 힌트가 없다. 주인공 손힐(캐리그랜트)가 배경부터 그렇다. 비서와의 스케쥴을 조율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광고계의 중역쯤 되는 인물로 설명된다. 하지만 그의 실질적인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기도 전에, 그는 히치콕의 구멍에 들어간다. 너무 초반부터 오명을 씌우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서없이 두 괴한들의 레이더에 포착된다. 힌트가 없다. 그들은 왜 손힐의 옆구리에 총을 꽃고, 어디를 대려가는 것인가. 이름모를 대저택을 접어들어 서재에서 문제의 집사 레오나드(마틴랜도)만나서도 그 공백은 이어진다. 손힐도, 관객도 이해할 수 없는 '캐플린'이라는 사람으로 몰아붙힌채 그를 옥여맨다. 당연히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뱉는

<싸이코> 근본적 공포를 부르는 마법
히치콕 얘기를 좀 해야겠다. 반세기가 훌쩍 지나서도 끈임없이 화자되는 이유는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가치도 불필요 하게 느껴진다. 서스펜스의 거장. 스릴러의 거장. 서스펜스랑 스릴러가 뭔차이가 있던, 고추장과 된장의 차이건. 순수하게 히치콕의 영화에 대한. 아니 히치콕과 영화에 대한 짧은 잡담을 적어보려한다.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에 대한 연민의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고, 영화의 내용과 사건에 대한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다. 혹은 영화에 관련한 사람이라면 영화 감독의 테크닉과 표현법에 느낄 수도 있겠고. 여하튼 히치콕은 당시 자기만의 새로운 영화적 기법으로 '스릴러'를 다뤄내는 최고의 감독이었다. 그는 그 자체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감독이

<영화판> 비판하는 방법으로 부터의 부재
한국영화, 문제 참 많다. 80년대 지독한 정치검열에의해서 이념에 부딛쳐 상영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영상예술은 국가의 정치적 이념을 전파하는 수단으로써 이용되고 그에 반하는 영화는 상영은 커녕, 만든 감독은 남산 지하실 어딘가로 끌려 가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오래전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87년 이후, 영화 검열자체가 해제되기 전까지 채 25년 전 이야기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라 여겨지는 60년대에서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독재정치는 이념의 문제로 영화를 짖밟았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자본의 이름으로 짖밟힌다. 대기업의 자회사 그룹들이 영화판에 진출해 말그대로 '수익이 되는 상품'으로써 산업에 꼬리를 틀었다. 1999년, 멀티플렉스 시대의 개막과 동시에 충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