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이』

호텔 키.

By  | 2017년 11월 1일 | 
호텔 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걷는 듯 천천히』에서 풀어 놓은 에피소드 하나를 필사해 둔 적이 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베를린 천사의 시>에 출연했던 브루노 간츠가 가까이 와서는 방 열쇠를 자리에 두고 식사(뷔페)를 가지러 갔습니다. 잠시 후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그 자리에 오더니 방 열쇠가 놓인 걸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 식사를 시작해버렸습니다. '어떡하지... 말해줄까.' 생각하는 사이, 브루노 간츠가 돌아왔습니다. 순간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춰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곧 상황을 이해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접시를 들고 자리를 옮기려 몸을 일으켰지만, 브루노가 그것을 막고는 윙크를 한 뒤 다른 자리로 옮겨갔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야기의 서막

부러웠던 세 사람.

By  | 2017년 10월 31일 | 
부러웠던 세 사람.
여행 중 지나친 부러운 모습의 세 사람.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두바이의 아주 작고 조용한 모스크 한 편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생각을 하다가, 두툼한 노트에 뭔가를 끄적이다가, 또 주위를 둘러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간 패키지 여행이었던 만큼 거의가 이동하는 여정이었으니 가만히 앉아 한없이 생각하는 일은 사치였다. 그런 사치스러운 행보를 늘 최고로 생각하던 나에게는 여행 첫날부터 만난 이 남자가 매우 매우 부러웠다. 헐렁하게 벗어 놓은 슬리퍼조차 그림이었고, 구석에 놓인 물병과 담배꽁초도 여유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볕 좋은 낮에 홀로 독서하는 기쁨이라니. 루체른 강가에 앉아 글자가 빼곡한 책을 읽던 여성은 내가 다리를 다 건널 쯤엔 사라졌지만,

23일의 달.

By  | 2017년 11월 1일 | 
23일의 달.
달을 그렇게 자주 보는 사람은 아닌데. 비교적 한가한 상태에 놓이니 스쳐 지나가는 불빛 하나도 눈여겨보게 되었다. 피우지의 숙소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걷던 중이었다. 나무 사이로 떠 있는 손톱달이 선명하네 감탄하다가 이 상황이 왠지 익숙해서 생각해 보니 오늘이 23일이지, 깨달았다. 9월의 23일에도 달이 예뻐 찍었던 사진이 있다. 이러다 23일마다 달을 찍게 되는 건 아닐까.

새벽 나들이.

By  | 2017년 11월 2일 | 
새벽 나들이.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작은 폭포가 있습니다.' 친절하게 한국어로 적힌 안내문이 로비 카운터에 붙어 있다. 안내문을 읽은 때는 캐리어를 끌고 들어온 늦은 저녁이었다. 다음날 조식 시간은 일곱 시였고, 먹고 바로 짐을 챙겨 루체른으로 떠나야 하니 그 전밖에 시간이 없었다. 일찍 일어나 가볍게 산책 삼아 올라갔다 와볼까 생각했지만... 산자락의 새벽은 안타까울 정도로 끈질기다는 것만 배웠다. 아침 산책은커녕 술 한잔 해야 할 것 같은 어둠에 올라가는 길을 내딛기 어려웠다. 사람도 없고 차도 없고, 어디선가 개는 짖고, 여기저기 놓아 기르는 소의 목에 달린 방울 소리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이 정도면 올라가도 폭포를 제대로 볼 수 없겠다 싶어 호텔 근처만 빙빙 돌다가, 고양이 한 마리 만나서 친근한 척

별 밭.

By  | 2017년 11월 2일 | 
별 밭.
오늘 밤엔 별이나 볼까 하고 베란다로 나갔더니 별 밭이 펼쳐지는 상황. 내가 한 일이라곤 커튼을 젖히고, 손잡이를 돌려 잠긴 문을 열고, 두 발짝 나온 것밖에 없는데. 스위스 멜히탈의 밤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