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장 좋아했던 태그팀입니다. 시간차는 좀 있지만 더 드림팀, 락커스, 부쉬웩커스, 스트라이크포스, 데몰리션, 파워앤글로리, 비버리브라더스, 내츄럴디제스터, 하트파운데이션, 트윈타워, 머니Inc, 내스티보이즈, 브리티쉬불독스, 브레인버스터즈, 콜로샬커넥션 등등~ 스타이너브라더스나 퀘벡커스등이 나오기 전까지! 태그팀 경기를 참 좋아했는데.. 그 후엔 하디보이즈, 더들리 등이 나오기 전까진 태그팀이 재미가 없었어요.
15. 일반지에서 사라진 프로레슬링 보도 그 후에도 역도산 시대는 계속 된다. TV중계되는 프로레슬링은 국민적인 오락이 되었고 소년 시절의 내가 완전히 그 박력에 사로잡혀버렸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다. 63년 5월 24일, 도쿄체육관에서 '하얀 복면의 마왕' 더 디스트로이어와의 사투를 펼쳐나간 역도산. 이 시합은 64.0%라고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올리며 현재도 니혼테레비 역대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기무라 마사히코와의 대결에서는 '짜고치기 의혹'을 지적 당했던 역도산이었지만 그 후, 프로레슬링붐이 퍼져나감과 함께 짜고치기설은 그 모습을 감추었다. 각종 스포츠신문을 섭렵했던 나도, 64년 즈음부터는 프로레슬링이 가짜승부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기사는 보질 못 했다. 당시 사정을 아는 베테랑 기자에
16. 역도산이 기획한 시멘트매치 '관서의 어금니' 그럼, 프로레슬링을 하나의 흥행으로서 대성공으로 이끈 '프로레슬링의 아버지' 역도산에게, 시멘트를 지향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냐고 한다면 또 그건 아니다. 니혼프로레스 도장의 지옥 트레이닝을 아는 선수도 이제는 몇 남지 않게 되었지만, 바벨 몇 백 회, 스쿼트 몇 천 회라고 하는 엄청난 훈련량은 실제로 있었고, 트레이닝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린제자에 대한 역도산의 혹독한 대우는 일상다반사였고 자이언트 바바, 토요노보리를 제외한 선수들, 즉 요시무라 미치아키, 이노키, 김일, 여건부, 야마모토 코테츠, 그레이트 코지카 같은 선수들은 무자비한 역도산의 폭력을 항상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장 역도산에게 '귀여움' 받았던 것이 안토니오 이노키였는데, 도
17. 니혼프로레스 시절의 앵글 ‘벨트 해외 유출’ 역도산 시절의 프로레슬링은, 요새 말하는 앵글이라고 불리는 탄탄한 짜임새나 스토리라인은 거의 없이 역도산이 미지의 강호 외국인 선수를 맞아 격파하는 것만으로도 흥행이 성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역도산이 세상을 뜨자, 흥행을 고조시키기 위한 궁리가 조금씩 시작되었다. 예를 들면 니혼프로레스 후기인 66년, 프리츠 본 에릭이 처음 일본에 오기 전의 일. 도쿄스포츠는 ‘만약 바바가 에릭의 아이언크로에 걸리면 그걸로 끝날 것이다’ 라며 사과를 손으로 짓이기는 에릭의 악력을 소개했다. 당시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었다. ‘나치의 생존자’라는 기믹도, 실은.................. 계속 보시려면로 오세요.
프로레슬링의 ‘실전인 척’은 무죄 이제까지 써내려온 것처럼, 일본의 프로레슬링은 ‘가짜승부설’과 세트로 묶여 출발했고, 그 비판에 저항하는 형태로 강인하게 성장을 이루어 왔다. 나는 니혼프로레스 시절의 프로레슬링에 푹 빠져있던 팬이었고, 프로레슬링이 식상해 져서 그 열의가 식었던 것도 역시 니혼프로레스 시절이다. 결국 내가 순수한 팬이었던 기간은, 1960년부터 1970년 정도 까지로, 약 10년 정도 뿐. 나이로 치자면 8살부터 18살 정도까지 다. 그러나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면, ‘역도산, 바바에게 속았다!’하고 원망스럽게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사람을 이만큼 빠지게 만들고, 즐겁게 만들어주었던 프로레슬링의 대단함에 대해서 몹시 감탄해버릴 정도다. 나에게는 그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