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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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몰리션 Demolition (2015)

멧가비|2021년 11월 16일

슬프지 않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 라는 말과 달리, 액자식으로 삽입되는 결혼생활을 보면 거기에 분명히 사랑이 있다.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포장해서 드러내는 남자가 아니다. 그저 모르거나 잊어버렸을 뿐일 것이다. 생산적인 재화를 창출하는 대신 숫자놀음으로 이윤을 떼어먹는 직업, 장인의 회사라는 뒷배경에서 장인의 입김이 작용한 요직이라는 점을 짐작 가능하다. 새끼의 털을 끊임없이 다듬는 일본원숭이처럼, 데이비스의 결혼 생활과 직장은 으리으리한 처가에 의해 대외적으로 보기 좋게 포장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말끔하게 하얗고 각진 외벽 그러나 밖에서 모두 들여다 보이는 전면통유리로 이루어진 그의 집이 그의 지난 생활을 짐작케 한다. 이렇게 안팎으로 타인을 의식해

카페 드 플로르 Cafe De Flore (2011)

멧가비|2021년 11월 16일

운명이라 믿었던 관계를 잃어버린 상실감, 거기로부터 몽유병이라든가 환각이라든가 발현되는 것?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 하면서도 영화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뭔가 더 있다,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게 만든다. 나의 이 영화에 대한 감정은 이 의심 혹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을 빼앗긴 기분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쳐도 카롤의 저 운명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너무 굳건한 거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모난 구석 없이 특별히 난봉꾼도 아닌데 조강지처 버리고 다른 여자한테 가버린 앙투안도 이해가 안 되고, 단지 남의 남자 뺏는 금발 빗치처럼 보였던 로즈도 알고보면 첫 눈에 운명적인 사랑에 함락되어버린 가련한 여자라는 점에서도 갭을 느끼고, 새로 맺어진 그 커플은 사실혼 관계가 저럴 수 있나 싶을

새 The Birds (1963)

멧가비|2021년 11월 15일

히치콕에 대해 몇 가지 일화들을 읽어보면 인간 자체가 서스펜스의 화신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거의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서스펜스 거장 다운 고약한 유머감각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그런 히치콕의 뒤틀린 유머감각이 극한 까지 발휘된 영화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때는 냉전의 긴장감, 소련과의 우주 경쟁으로 외계에서 온 침략자 SF가 쏟아지던 시기다. 내가 생각하는 히치콕이라면, 외계인이 그렇게 무서워? 공산주의자들이 무서워? 에헴 진짜 서스펜스가 뭔지 보여주지. 전봇대에 앉은 새들을 보며 공포를 느껴본 적은 있나들? 그러면서 신나게 찍었을 것 같잖아. 적어도 원작 소설을 발견했을 때 히치콕이 대단히 신나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히치콕, 서스펜스 마스터라는 칭호에는 자잘한 내러티브의 핍진성보

싸이코 Psycho (1960)

멧가비|2021년 11월 15일

히치콕의, 특히 [현기증]의 열렬한 팬인 박찬욱은 평론가 시절 이 영화에 대해서는 "버나드 허먼의 음악과 샤워실을 빼면 아무 것도 없는 과대평가 된 영화"라며 혹평을 남겼다고 한다. 교묘한 상징들과 치밀한 내러티브 등이 조화를 잘 이룬 예술적으로 빈틈없는 영화와, 오로지 효과와 연출에만 집중한 극한의 오락영화, 그 둘에 대한 관점 차이 혹은 취향 차이에 따른 엇갈린 평가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현기증]과 이 영화를 견주어서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그 어느 쪽도 완전히 히치콕스럽다고 말하기 힘든, 히치콕의 평균값에서 각자 반대 방향 맨 끝에 위치한 양 극단과도 같은 한 쌍이다. 이 영화는 천하의 히치콕이 싸구려 피범벅 영화도 찍느냐며 개봉 전부터 비웃음을 샀던 일화로 유명하고, [현기증]은 히치콕 영

현기증 Vertigo (1958)

멧가비|2021년 11월 14일

원작자들은 처음부터 히치콕의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집필했노라고는 하는데, 실제로 히치콕의 손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정작 히치콕 필모그래피 중에서 꽤나 이질적이다. 잘 알려진 히치콕 영화의 주인공들은 음모, 누명 등 외부적 요인에 발목이 잡히지만 주인공 그 자신은 언제나 스마트하고 용맹한 전형적인 닥 새비지식 영웅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 퍼거슨은 작품 시작과 동시에 치명적인 내면적 약점을 지니게 된다. 주인공을 둘러싼 음모와 그에 따르는 위기도 철저하게 이 고소공포증을 중심으로 한다. 덕분에 연출과 효과 위주였던 다른 히치콕 영화들과 달리 인물의 심리가 조금 더 세밀하고 집약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히치콕 같지 않은 영화에서 히치콕 본인의 자의식이 가장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