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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니

By  | 2012년 11월 17일 | 
감기기운이 돌길래 퇴근하자마자 목욕을 했다. 따끈한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에 들어앉아19세기 영국산 여행 소설을 읽으며 오렌지 쥬스를 마시다가 현재 나를 둘러싼 완벽한 환경에 다시금 감동하였다. 지금 소설 속의 인물들은 다 젖은 빵에 빗물 섞인 잼을 발라 먹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다. 괜히 여행왔다며 자책하고 서로를 비난하다 제풀에 지쳐서, 집에 얌전히 있었다면 이시간쯤에 먹고 있었을 따뜻한 음식과 보송보송한 침대를 그리워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을 나는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엄마가 끓여주신 맛있는 닭죽 한솥과 시들어가는 귤 다섯알, 냉장고 안에서 차갑게 대기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맥주, 어제 반 잘라 구워먹은 마른 오징어의 남은 반쪽까지도 모두 다 내것이다. 나는 지루해질때까지 목욕을

안나푸르나 트레킹 4일째-트레킹과 장비.

By  | 2012년 12월 17일 | 
산은 아름다웠다. 어느순간부터 짐을 싣고 다니는 조랑말과 귀여운 논밭 대신 야생 원숭이가 보이고 붉은 꽃이 뚝뚝 떨어지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산이 깊어질수록 날씨도 변화무쌍해졋다. 비가 오락가락하며 걷기를 방해했다. 등반을 시작하기 전부터 내심 비를 걱정했었다. 내 신발이 카트만두 여행자 거리에서 구입한 짝퉁 노스페이스였기때문이다. 짝퉁이면 뭐 어떠랴 싶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우선 짝퉁 등산화는 방수가 안된다. 남들은 세계일주 간다고 하면 고어텍스 운동화부터 산다던데 우리는 그런거 없다. 결국 콜롬비아에서 제일 싸구려 트레킹화 하나 샀는데 비가 오니까 습자지처럼 고대로 촉촉히 스며들었다. 그 신발, 겨울 비가 매일매일 내리던 중국 양쒀에서 참다 못해 버리고 입김 호호 불어지는 추운 날씨에 샌달신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 4일째.

By  | 2012년 12월 3일 | 
헉헉 숨이 차오른다. 숨을 한번 쉴때마다 한걸음만 내딛어진다. 나를 둘러싼 풍경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에서 생각이 돌아가지 않는다. 설마 고산병일까.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먹으면서 나는 두 남자에게 이제는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러다가 큰일난다고요" 라던가 "동민씨는 아직 고산지에 올라가본적 없죠" 라고도 "경아, 넌 작년에 고산병 증세 있었잖아. 그런데 술마시면 어쩌려고 그래" 라면서 "산에 끝까지 못올라가면 좋겠어요?" 라고 협박을 했다. 남자들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눈치였지만 나는 기세를 몰아서 다그쳤다. 내가 어저께 당신들 술마신 것때문에 맘 고생한 거 생각하면 듣든 말든 좀더 퍼부어야겠어. 내가 이 팀에서 체력 스피드 등반능력이 모두 열세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

안나푸르나 트레킹 4일째. 처마바위.

By  | 2012년 12월 22일 | 
빗발에 점점 힘이 실린다. 우리는 묵묵히 쟈닐의 뒤를 따라 기계적으로 걸었다. 돌로된 계단길을 올라가고 있을때 쟈닐이 말한다. "저기에서 멈춥니다." 쟈닐이 가르킨 곳에는 거대한 바위가 처마모양으로 튀어나와 생겨난 자연 대피소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십여명의 사람이 비를 피하고 있었다. 다행히 긴 의자 모양의 바위에는 아직 앉을 자리가 남아있어서 나는 피로한 다리를 잠시 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속 다른 트레킹 팀이 도착했고 십수명의 일본인 트레커팀까지 길 반대편에서 등장하여 처마바위는 금새 만원이 되었다. 거대한 협곡 저쪽에서 흰 안개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협곡 너머로 기어왔다. 아무 소리도 없이 느긋하면서도 급류처럼 빠르게 흘러드는 기묘

가을맞이 서울여행

By  | 2012년 11월 4일 | 
가을맞이 서울여행
가을이라 덕수궁에 갔다. 머리도 식히고 사색도 해보려하였지만 여긴 서울, 게다가 주말. 사람이 많아서 덕수궁 입장표를 사려고 줄도 길게 섰고 시청앞에선 교육과 관련한 시위가 있어서 확성기 연설 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심상정씨도 나오시던데 목소리에 기합이.... 덕분에 고즈넉한 가을 오후는 물거품이 되었지만 이게 바로 서울. 덕수궁은 규모가 작은데도 건물의 배치가 흐름을 만들어서 조금도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전각 뒤에 살짝 보이는 다른 전각, 모퉁이를 돌아서면 저 쪽에 나타나는 담벼락, 작은문, 숨어있는 연못, 덕혜옹주가 살았다던 소담한 방, 서양식 정원, 석조건물, 미술관 사이를 걸어다녔다. 전각 사이의 여백이 이 덕수궁 건축의 주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