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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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언덕에 있는 알링턴하우스 겸 로버트 리 기념관(Arlington House, The Robert E. Lee Memorial)
1759년에 26세의 조지 워싱턴은 한 살 많은 과부 마사 커스티스(Martha Custis)와 결혼을 하는데, 그녀의 전남편은 버지니아 최고의 부자였으나 일찍 급사를 했다.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아내가 낳은 전남편의 아들과 딸을 키웠지만, 딸은 17세에 간질로 사망하고 결혼한 아들도 1781년 요크타운 전투 직후에 4명의 자녀를 남기고 병사한다. 그래서 워싱턴 부부는 그들 중 어린 손녀와 손자를 데려와 직접 키우는데,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관저에서 함께 살았으며, 나중에는 유산을 상속해주기 위해 법적으로 딸과 아들로 입양을 한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케네디 대통령 무덤을 둘러본 후에 좁은 산책로인 Custis Walk를 따라 언덕을 오르니, 꼭대기에 누리끼끼한 색깔의 그리스 신전같은 건물이 나온다. 바로 위에 설명한 워싱턴의 양아들인 조지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가 자신이 물려받은 플랜테이션에, 워싱턴을 기리는 의미로 웅장하게 만든 알링턴 하우스(Arlington House)로 1802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1818년에야 완공되었다. 1789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The Washington Family"라는 이 그림에서 왼쪽의 남자 어린이가 조지 커스티스인데, 어릴 때는 여러모로 워싱턴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한 때는 재혼한 친어머니 집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는 키워주신 할아버지 워싱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잊지 않았기에, 성인이 되어서 땅과 재산을 물려받은 동시에 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뭔가 좀 이상한게, 거대한 기둥이 나무계단 위에 세워져 있고, 그 바닥도 빨간 벽돌이다... 당시 의사당을 설계한 최고의 건축가를 고용해서 야심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는 땅과 노예만 많지 현금은 없었고 1812년 전쟁으로 물자부족까지 겹치면서, 결국은 벽돌로 지은 건물의 기둥과 벽면을 매끈하게 바른 후에 대리석처럼 보이게 칠을 한 것이란다. 뒤돌아 동쪽 아래로 내려다 보면, 국립묘지의 정문에서 이어지는 알링턴 기념교(Arlington Memorial Bridge)로 포토맥 강을 건너서 바로 링컨 기념관이 나오고, 오른편으로는 워싱턴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편 가족실(Family Parlor)의 좌우 벽난로 위에는 이 집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부부의 초상화가 각각 걸려있다. 왼쪽이 조지 커스티스의 유일하게 장성한 자손으로 알링턴 플랜테이션을 물려받은 딸인 메리 커스티스(Mary Anna Randolph Custis)이고, 1831년에 이 집에서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 오른쪽의 남편이 바로...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로 1838년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그의 아버지도 독립전쟁에 참전했었고 1799년의 워싱턴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할만큼 이미 명문가의 자제였는데, 법적으로 치자면 워싱턴 대통령의 손녀 사위가 후에 남북전쟁에서 남군을 이끌었던 리(Lee) 장군인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이라서 결혼 후 대부분 떠돌며 살았지만, 1857년에 장인이 사망하자 유산 집행을 위해 여기로 돌아온다. 결국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버지니아가 연방을 탈퇴하자, Lee는 이 집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남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부부가 함께 리치먼드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식탁이 차려진 다이닝룸(Dining Room)의 벽에는 조지 커스티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그는 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인 워싱턴 대통령의 소지품 보존과 기념사업 등을 위해 노력했고, 역사 희곡과 책을 쓰기도 하는 등 말년까지 활발히 활동했단다. 신전같은 외관과 달리 내부는 거주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침실과 주방 등의 모습도 옛날 생활상 그대로 복원을 해 놓았다. 실내 투어코스의 마지막인 모닝룸(Morning Room)에 꾸며진 스튜디오인데, 조지 커스티스가 직접 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단다. 여기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 통로의 벽에 국립공원청이 관리하는 이 집의 공식 명칭인 알링턴 하우스, 로버트 리 기념관(Arlington House, The Robert E. Lee Memorial) 명칭이 붙어있다. 박물관 전시는 노예들의 숙소를 복원한 별도의 뒷채에 작게 만들어져 있지만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공원 홈페이지에서 사진과 그림만 몇 장 가져와서 설명을 드린다. 리 부부가 떠난 후에 이 언덕은 수도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바로 연방군이 점령을 했고, 농장에는 자유 흑인들의 정착촌과 흑인 병사들의 훈련을 위한 군부대가 임의로 설치된다. 결국 위 사진이 찍힌 1864년에 세금체납을 이유로 공식적으로 연방정부가 이 땅을 몰수한 후에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북군 병사들을 여기 매장하기 시작해서, 지금의 알링턴 국립묘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후 1877년에 부부의 장남인 조지 리(George Washington Custis Lee)가 소송을 해서, 몰수가 부당했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내었지만 이미 농장은 묘지로 바뀌어 있었고, 어차피 현금 보상을 원했던 그는 결국 15만불에 다시 모든 건물과 땅을 연방정부에 매각을 했다. 지난 5월초에 직접 방문했던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에서 남군의 항복문서에 서명한 리(Lee)가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Grant)와 악수하는 모습의 "Let Us Have Peace" 그림이다. 부하 장군들 중의 일부가 후퇴가 불가하니 뿔뿔이 흩어져서 게릴라전을 계속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국가가 하나로 회복되는데 수 년이 더 걸리는 무의미한 짓이라며 거부하고 깨끗한 항복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남북의 평화와 재결합을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한 때 미국에 맞서 싸웠던 인물을 기리는 유일한 연방정부 지원의 국가기념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버지니아 렉싱턴(Lexington)의 워싱턴 대학교 총장이 되었고, 위 사진의 1869년에 대통령이 된 그랜트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하고 이듬해 사망해서, 그의 사후에 Wasington and Lee University로 이름이 변경된 대학의 예배당 옆 묘지에 묻혔다. 남부연맹 가담자들은 전후 미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사면선서(Amnesty Oath)를 제출해야만 복권이 되었는데, 리도 당연히 서명해서 우편으로 보냈지만 남부에 반감을 가진 어떤 이가 고의로 누락했단다. 그래서 이 집은 1925년부터 문화재로 관리는 되었지만 그냥 Custis-Lee Mansion으로 불리다가, 1972년에 문서보관소에서 리의 사면선서가 발견된 이후에야 공식적으로 시민권이 회복되고 현재와 같이 그의 이름이 들어간 메모리얼이 될 수 있었단다. 맨션의 남쪽에 있는 정원을 지나면 나오는 남북전쟁 무명용사묘를 잠깐 구경하고는 다시 언덕을 걸어 내려가 알링턴 국립묘지 구경을 마저 했었다. 옛날 한국에서는 청바지 브랜드로, 또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있는 나무 이름으로 '리(Lee)'가 원래 미국에도 있는 성씨라는 것을 알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 동안 남북전쟁 관련 포스팅에 수 없이 등장했던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의 국립 기념관을 마침내 둘러봤고, 이로써 집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 NPS Official Unit들은 빠짐없이 모두 방문한 것이 되었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미국이 다시 하나된 곳"인 버지니아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 국립역사공원
윌머 맥클린(Wilmer McLean)은 지금 센터빌 남쪽에 큰 농장을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이었다.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후인 1861년 7월에 남부군이 그의 농장에 주둔했고, 버지니아 민병대 출신이었던 그는 기꺼이 자신의 집을 지휘 본부로 제공했다. 21일 새벽에 북군이 개울 건너에서 선제공격을 했는데, 포탄 한 발이 그 집의 부엌으로 날아들기도 했단다. 그렇게 남북전쟁 최초의 교전인 제1차 불런전투(First Battle of Bull Run)가 그의 농장에서 시작되었고, 이듬해 인근 매너서스에서 또 전투가 벌어지자 그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150마일이나 떨어진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된다. 새벽에 출발해 3시간반 동안 쉬지않고 운전을 해와서 만난 국립 공원의 간판이 너무 반가워, 앞뒤로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운전석에서 사진을 찍었다.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국립역사공원(Appomattox Court House National Historical Park)은 여기부터 제법 넓은 면적을 아우르지만, 비지터센터와 중요한 볼거리는 모두 마을 안에 있다. 참고로 옛날에는 그 카운티(County)의 법원이 소재한 마을의 이름을 '○○ Court House'로 불렀다고 한다. 공원 브로셔에 인쇄된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마을의 조감도로 한가운데 옛날 법원(courthouse) 자리에 지은 비지터센터가 있고, 그 아래쪽에 '맥클린 하우스(McLean House)'라는 굵은 글씨가 보인다. 그렇다! 바로 처음 소개한 윌머 맥클린이 전쟁을 피해서 이사를 온 남부 버지니아의 깡촌이 바로 여기 Appomattox Court House였던 것이다. 남부 버지니아의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 당일여행의 첫번째 목적지로 찾아왔지만, 여기를 그렇게 부르기에는 좀 미안한게... 비지터센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위기주부 외에도 이렇게 제법 있었고, 미국 역사책에도 아주 중요한 장소로 항상 등장하는 곳이며, 여기서 벌어졌던 일을 다룬 라는 제목의 현대 오페라까지 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아침부터 근무하는 파크레인저도 4명이나 되어서, 한 명은 벌써 맥클린 하우스에 가있었고, 다른 한 명이 2층의 극장에서 틀어준 이 날 첫번째로 상영하는 안내영화를 봤다. 부제는 1865년 3월초 링컨의 두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 중의 유명한 문구인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에서 따온 것이다. 극장을 감싼 정사각형의 복도를 따라 전시가 만들어져 있는데, 먼저 미국 남북전쟁의 중요한 사건들이 시간순으로 적혀 있다. 비록 교전은 없었지만 공식적인 시작으로 보는 19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포트섬터(Fort Sumter)부터, 이미 블로그에 모두 소개한 First Manassas, Antietam, Gettysburg 등등의 전투를 차례로 거쳐서... 사실상의 마지막 전역인 애퍼매톡스 캠페인(Appomattox Campaign)이 1865년 4월 2~8일 동안에, 남부연맹의 수도였던 버지니아 리치먼드(Richmond)에서부터 서쪽으로 여기 애퍼매톡스까지 전개되었던 것이다. 시리즈 전전편에 소개했던 9달반의 피터스버그 포위전(Siege of Petersburg) 끝에 서쪽으로 후퇴를 하는 빨간색의 남군과,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노스캐롤라이나의 다른 남군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계속 남쪽에서 따라붙었던 파란색 북군의 이동경로와 그 과정의 주요 전투를 보여준다. 4월 6일에 Sailor's Creek에서 돌파시도가 실패한 다음에는 후미도 추격을 당해서 앞뒤로 포위되고, 마지막으로 8일에 Appomattox Station에서 기차를 이용해 린치버그(Lynchburg)로 후퇴하려던 계획도 좌절되자 남군 지휘부는 마침내 항복을 결정한다. (데이비스 대통령을 포함한 남부 지도자들은 일찌감치 2일밤에 바로 특별열차를 이용해 Danville로 탈출) 전시물 중에 눈길을 끌었던 발굴된 옛날 총탄들이라고 하는데, 손가락 굵기 정도로 예상보다 아주 큰게 신기했고, 또 대부분이 흰색에 가깝게 보이는 이유가 궁금하다... 여하튼, 8일의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몇 번의 의견교환 후에, 바로 다음날 양측의 총사령관이 만나기로 한 장소가 바로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마을에서 가장 상태가 좋았던 윌머 맥클린 집의 거실(parlor)이었다. 1865년 4월 9일에 오른쪽 책상에 앉은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가 직접 그 자리에서 쓴 간단한 항복조건 문서에 왼쪽의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가 서명을 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 후에도 몇 달간 다른 지역에서 남북간에 약간의 교전이 있기는 했지만, 차례로 다른 남부 지휘관들도 소식을 듣고 항복을 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 날을 남북전쟁이 끝난 날로 역사책에 기록한다. 여기서 항복했던 남군 부대의 군기를 북군 지휘관 한 명이 기념으로 고향에 가져갔다가, 사후 그의 아내가 국립 공원에 기증한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문제는 여기같은 박물관이 아니라, 자기 집이나 차에 저 깃발을 지금도 걸어놓은 사람들이 남부 버지니아에서는 가끔 보인다는 것... 그리고 왼편 그림은 다음날 그랜트가 먼저 떠나기 전에 리를 다시 만나서 말 위에서 30분간 이야기를 나눴다는 모습인데, 그 장소가 공원 조감도에도 제일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Lee와 Grant에 대해서는 그들을 기념하는 각각의 국립 공원 방문기에서 별도로 소개 예정) 전시의 마지막은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남군 장교 한 명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 애퍼매톡스에서 총성이 멎고 불과 5일이 지난 14일 저녁에, 링컨 대통령이 워싱턴DC의 포드 극장((Ford's Theatre)에서 남부 지지자에게 암살을 당하게 된다! 비지터센터를 나와 한적한 시골길을 조금 걸어서, 실제 두 장군의 만남이 있었던 맥클린 하우스(McLean House)로 왔다. 이 곳은 복원된 후에 남북전쟁 역사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실제 촬영장소로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12년 영화 에서도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돌아가는 리(Lee)에게 그랜트(Grant)가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는 위의 장면에 짧게 등장을 했단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 정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왼편에 역사적인 장소가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다. 항복 직후에 다른 북군 장교들이 두 책상을 포함해 기념품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집주인에게 적당한 돈을 주거나 또는 그냥 가져갔기 때문에, 거실이 바로 텅텅 비었단다. 리가 사용했던 왼쪽 하얀색 대리석 상판의 책상은 시카고 역사박물관에, 그랜트가 사용했던 오른쪽 작은 나무 책상은 DC 미국사 박물관에 각각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1층 맞은편은 맥클린 부부의 침실로 모든 것이 당시의 모습대로 꾸며져 있고, 2층에 자녀들 방도 아주 잘 만들어 놓았었다. 사실은 가구와 장식만 새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이 집 전체가 1950년에 옛날 자재를 일부 사용해서 완전히 새로 지어진 것으로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거실 바로 아래 본채의 주방 사진과 함께 설명드리면... 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윌머 맥클린은 이 집을 팔고 북부 버지니아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 어떤 사업가가 다시 사서는 이 유명한 집을 통째로 워싱턴DC로 옮겨서 전시해 돈을 벌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1892년에 덩어리로 분해까지는 되었는데, 결국 운반되지는 못하고 그대로 거의 방치가 되어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는 1935년에 마을 전체가 국립 기념물로 지정이 되고나서, 목재는 대부분 썩어서 버려졌지만 남아있는 원래 벽돌 등으로 현재의 집을 새로 지었던 것이다. 건너편 잘 차려진 식당의 벽에 당시 집주인 부부의 초상화가 좌우로 걸려있는데, 모든 군인들이 떠나고 난 후에 윌머 맥클린이 "The war began in my front yard and ended in my front parlor."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로 MBC 방송의 에 나와도 될만한 기막힌 우연이 아닐까? ㅎㅎ 출구를 통해 뒷뜰로 나가면 부엌과 당시 이 집의 노예들이 살았던 숙소를 추가로 구경할 수 있다. 부엌의 모습도 당시와 비슷하게 재연을 해놓았고, 내부 다른 쪽에서는 당시 남부 노예들의 상황과 함께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해방 소식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었다. 하우스가 아니라 슬레이브쿼터스(Slave Quarters)로 불린 숙소의 내부 모습이, 좀 전의 본채 침실과 많이 비교가 되었다. 여기서 왕복 3시간이나 더 운전을 해야하기 때문에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시리즈 전편에 소개했던 노예 출신의 흑인 교육자를 기리는 준국립공원을 방문해보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서둘러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중심가 건너편에 1850년대 지어진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사진의 Meeks Store 및 오른편 나무 뒤로 살짝 보이는 남군 병사의 가석방(parole) 증서를 급히 인쇄했었다는 Clover Hill Tavern 등은 구경할 수 없었다. 본 여행기의 제목에 쓴 것처럼 애퍼매톡스 카운티의 환영간판에 "Where Our Nation Reunited"라 써진 것을 봤었는데, 이렇게 4년 동안 전쟁을 했던 남북도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고' 다시 하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미국은 서로 총질만 안한다 뿐이지 더 심하게 둘로 다시 갈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이렇게 남북전쟁이 끝난 곳은 다녀왔는데,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시작된 곳은 언제쯤 직접 가볼 수 있을까?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미국이 다시 하나된 곳"인 버지니아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 국립역사공원
윌머 맥클린(Wilmer McLean)은 지금 센터빌 남쪽에 큰 농장을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이었다.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후인 1861년 7월에 남부군이 그의 농장에 주둔했고, 버지니아 민병대 출신이었던 그는 기꺼이 자신의 집을 지휘 본부로 제공했다. 21일 새벽에 북군이 개울 건너에서 선제공격을 했는데, 포탄 한 발이 그 집의 부엌으로 날아들기도 했단다. 그렇게 남북전쟁 최초의 교전인 제1차 불런전투(First Battle of Bull Run)가 그의 농장에서 시작되었고, 이듬해 인근 매너서스에서 또 전투가 벌어지자 그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150마일이나 떨어진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된다. 새벽에 출발해 3시간반 동안 쉬지않고 운전을 해와서 만난 국립 공원의 간판이 너무 반가워, 앞뒤로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운전석에서 사진을 찍었다.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국립역사공원(Appomattox Court House National Historical Park)은 여기부터 제법 넓은 면적을 아우르지만, 비지터센터와 중요한 볼거리는 모두 마을 안에 있다. 참고로 옛날에는 그 카운티(County)의 법원이 소재한 마을의 이름을 '○○ Court House'로 불렀다고 한다. 공원 브로셔에 인쇄된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마을의 조감도로 한가운데 옛날 법원(courthouse) 자리에 지은 비지터센터가 있고, 그 아래쪽에 '맥클린 하우스(McLean House)'라는 굵은 글씨가 보인다. 그렇다! 바로 처음 소개한 윌머 맥클린이 전쟁을 피해서 이사를 온 남부 버지니아의 깡촌이 바로 여기 Appomattox Court House였던 것이다. 남부 버지니아의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 당일여행의 첫번째 목적지로 찾아왔지만, 여기를 그렇게 부르기에는 좀 미안한게... 비지터센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위기주부 외에도 이렇게 제법 있었고, 미국 역사책에도 아주 중요한 장소로 항상 등장하는 곳이며, 여기서 벌어졌던 일을 다룬 라는 제목의 현대 오페라까지 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아침부터 근무하는 파크레인저도 4명이나 되어서, 한 명은 벌써 맥클린 하우스에 가있었고, 다른 한 명이 2층의 극장에서 틀어준 이 날 첫번째로 상영하는 안내영화를 봤다. 부제는 1865년 3월초 링컨의 두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 중의 유명한 문구인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에서 따온 것이다. 극장을 감싼 정사각형의 복도를 따라 전시가 만들어져 있는데, 먼저 미국 남북전쟁의 중요한 사건들이 시간순으로 적혀 있다. 비록 교전은 없었지만 공식적인 시작으로 보는 19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포트섬터(Fort Sumter)부터, 이미 블로그에 모두 소개한 First Manassas, Antietam, Gettysburg 등등의 전투를 차례로 거쳐서... 사실상의 마지막 전역인 애퍼매톡스 캠페인(Appomattox Campaign)이 1865년 4월 2~8일 동안에, 남부연맹의 수도였던 버지니아 리치먼드(Richmond)에서부터 서쪽으로 여기 애퍼매톡스까지 전개되었던 것이다. 시리즈 전전편에 소개했던 9달반의 피터스버그 포위전(Siege of Petersburg) 끝에 서쪽으로 후퇴를 하는 빨간색의 남군과,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노스캐롤라이나의 다른 남군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계속 남쪽에서 따라붙었던 파란색 북군의 이동경로와 그 과정의 주요 전투를 보여준다. 4월 6일에 Sailor's Creek에서 돌파시도가 실패한 다음에는 후미도 추격을 당해서 앞뒤로 포위되고, 마지막으로 8일에 Appomattox Station에서 기차를 이용해 린치버그(Lynchburg)로 후퇴하려던 계획도 좌절되자 남군 지휘부는 마침내 항복을 결정한다. (데이비스 대통령을 포함한 남부 지도자들은 일찌감치 2일밤에 바로 특별열차를 이용해 Danville로 탈출) 전시물 중에 눈길을 끌었던 발굴된 옛날 총탄들이라고 하는데, 손가락 굵기 정도로 예상보다 아주 큰게 신기했고, 또 대부분이 흰색에 가깝게 보이는 이유가 궁금하다... 여하튼, 8일의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몇 번의 의견교환 후에, 바로 다음날 양측의 총사령관이 만나기로 한 장소가 바로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마을에서 가장 상태가 좋았던 윌머 맥클린 집의 거실(parlor)이었다. 1865년 4월 9일에 오른쪽 책상에 앉은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가 직접 그 자리에서 쓴 간단한 항복조건 문서에 왼쪽의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가 서명을 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 후에도 몇 달간 다른 지역에서 남북간에 약간의 교전이 있기는 했지만, 차례로 다른 남부 지휘관들도 소식을 듣고 항복을 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 날을 남북전쟁이 끝난 날로 역사책에 기록한다. 여기서 항복했던 남군 부대의 군기를 북군 지휘관 한 명이 기념으로 고향에 가져갔다가, 사후 그의 아내가 국립 공원에 기증한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문제는 여기같은 박물관이 아니라, 자기 집이나 차에 저 깃발을 지금도 걸어놓은 사람들이 남부 버지니아에서는 가끔 보인다는 것... 그리고 왼편 그림은 다음날 그랜트가 먼저 떠나기 전에 리를 다시 만나서 말 위에서 30분간 이야기를 나눴다는 모습인데, 그 장소가 공원 조감도에도 제일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Lee와 Grant에 대해서는 그들을 기념하는 각각의 국립 공원 방문기에서 별도로 소개 예정) 전시의 마지막은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남군 장교 한 명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 애퍼매톡스에서 총성이 멎고 불과 5일이 지난 14일 저녁에, 링컨 대통령이 워싱턴DC의 포드 극장((Ford's Theatre)에서 남부 지지자에게 암살을 당하게 된다! 비지터센터를 나와 한적한 시골길을 조금 걸어서, 실제 두 장군의 만남이 있었던 맥클린 하우스(McLean House)로 왔다. 이 곳은 복원된 후에 남북전쟁 역사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실제 촬영장소로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12년 영화 에서도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돌아가는 리(Lee)에게 그랜트(Grant)가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는 위의 장면에 짧게 등장을 했단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 정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왼편에 역사적인 장소가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다. 항복 직후에 다른 북군 장교들이 두 책상을 포함해 기념품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집주인에게 적당한 돈을 주거나 또는 그냥 가져갔기 때문에, 거실이 바로 텅텅 비었단다. 리가 사용했던 왼쪽 하얀색 대리석 상판의 책상은 시카고 역사박물관에, 그랜트가 사용했던 오른쪽 작은 나무 책상은 DC 미국사 박물관에 각각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1층 맞은편은 맥클린 부부의 침실로 모든 것이 당시의 모습대로 꾸며져 있고, 2층에 자녀들 방도 아주 잘 만들어 놓았었다. 사실은 가구와 장식만 새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이 집 전체가 1950년에 옛날 자재를 일부 사용해서 완전히 새로 지어진 것으로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거실 바로 아래 본채의 주방 사진과 함께 설명드리면... 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윌머 맥클린은 이 집을 팔고 북부 버지니아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 어떤 사업가가 다시 사서는 이 유명한 집을 통째로 워싱턴DC로 옮겨서 전시해 돈을 벌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1892년에 덩어리로 분해까지는 되었는데, 결국 운반되지는 못하고 그대로 거의 방치가 되어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는 1935년에 마을 전체가 국립 기념물로 지정이 되고나서, 목재는 대부분 썩어서 버려졌지만 남아있는 원래 벽돌 등으로 현재의 집을 새로 지었던 것이다. 건너편 잘 차려진 식당의 벽에 당시 집주인 부부의 초상화가 좌우로 걸려있는데, 모든 군인들이 떠나고 난 후에 윌머 맥클린이 "The war began in my front yard and ended in my front parlor."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로 MBC 방송의 에 나와도 될만한 기막힌 우연이 아닐까? ㅎㅎ 출구를 통해 뒷뜰로 나가면 부엌과 당시 이 집의 노예들이 살았던 숙소를 추가로 구경할 수 있다. 부엌의 모습도 당시와 비슷하게 재연을 해놓았고, 내부 다른 쪽에서는 당시 남부 노예들의 상황과 함께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해방 소식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었다. 하우스가 아니라 슬레이브쿼터스(Slave Quarters)로 불린 숙소의 내부 모습이, 좀 전의 본채 침실과 많이 비교가 되었다. 여기서 왕복 3시간이나 더 운전을 해야하기 때문에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시리즈 전편에 소개했던 노예 출신의 흑인 교육자를 기리는 준국립공원을 방문해보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서둘러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중심가 건너편에 1850년대 지어진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사진의 Meeks Store 및 오른편 나무 뒤로 살짝 보이는 남군 병사의 가석방(parole) 증서를 급히 인쇄했었다는 Clover Hill Tavern 등은 구경할 수 없었다. 본 여행기의 제목에 쓴 것처럼 애퍼매톡스 카운티의 환영간판에 "Where Our Nation Reunited"라 써진 것을 봤었는데, 이렇게 4년 동안 전쟁을 했던 남북도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고' 다시 하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미국은 서로 총질만 안한다 뿐이지 더 심하게 둘로 다시 갈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이렇게 남북전쟁이 끝난 곳은 다녀왔는데,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시작된 곳은 언제쯤 직접 가볼 수 있을까?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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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TaeGukGi: Brotherhood Of War, 2004) 감독-강제규(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장수상회, 1947 보스톤) 출연진-장동건, 원빈, 이은주, 공형진, 장민호, 이영란, 최민식, 김수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개봉일-6월 6일 현충일 4K 리마스터링 롯데 시네마 단독 재개봉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관람 나이 등급-15세 관람가 한국 전쟁 장르 천만 관객수 영화 걸작 4K 리마스터링 재개봉 정보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영화 로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 신기록을 달성하며, 한국 영화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