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말하는게 맞는데, 그가 전쟁에서 항복을 한 적이 있었다고? 도대체 워싱턴이 언제 어디서, 또 누구에게 항복을 했었는지 아래에서 알려드리고, 또 1800년대 초에 미국의 첫번째 전국적인 국책사업으로 건설되었던 횡단도로인 내셔널로드(National Road)에 대해서도 소개해드린다. 물론 아스팔트 포장의 자동차 도로가 아니라 자갈을 깐 마찻길이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웃 펜실베니아 주의 별볼일 없는 국립공원들 돌아보기의 두번째 목적지도, 역시 이름만 봐서는 어떤 전쟁의 누구와 관련된 곳인지 짐작이 어려운 포트너세서티 국립전쟁터(Fort Necessity National Battlefield)인데, 간판 아래쪽에 목책을 세워놓은 것이 특이해서 눈에 띈다.
이번에는 다른 차들도 4~5대 정도 있던 주차장 바로 옆에 비지터센터를 아주 크게 잘 만들어 놓았는데, 국립공원청 로고 옆으로 공원 이름말고도 뭔가를 길게 적어 놓았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이 곳은 전편에 잠깐 언급했던 '내셔널로드'에 관해 알려주는 National Road Heritage Corridor 교육센터도 겸한다는 문구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실내에서 처음 마주치는 얼굴은 바로...
환영사 옆에 커다랗게 그려진 조지워싱턴으로, 그는 21세에 버지니아 민병대 소령이 되어 3년이나 연달아서, 자신이 살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여기까지 원정을 왔기 때문이다. (중앙의 코걸이를 한 인형은 워싱턴이 아니고 이 지역의 원주민) 당시는 미국이 독립 전인 1750년대로 프랑스와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서로 영토확장을 하던 시기이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기간의 지도를 위키에서 가져와 보여드리는데, 제일 왼쪽 아래에 Ft. Necessity와 워싱턴의 이름이 보인다. 북쪽에서 남하하는 프랑스와 서쪽으로 확장하는 영국의 분쟁이 시작된 곳이 오하이오 강(Ohio River) 유역으로, 1753년 겨울에 버지니아 총독이 워싱턴을 처음 메신저로 여기 보내서 프랑스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는 거절하고 지금의 피츠버그에 포트듀케인(Fort Duquesne)을 건설하자, 이듬해 1754년 봄에 다시 워싱턴에게 이번에는 군대를 끌고가서 프랑스를 쫓아낼 것을 명령하게 된다.
5월 28일에 워싱턴의 민병대가 약 30명의 프랑스 정찰부대와 마주쳐, 지휘관을 포함해 10여명을 죽이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곧 듀케인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대규모 프랑스 병력이 보복공격을 해올 것을 예상해서, 초원에 목책을 세워 방어를 위한 요새를 만들고 이름을 Fort Necessity라 지었단다. 워싱턴이 서있는 옆문으로 나가서 비지터센터 뒤쪽의 초원으로 조금 걸어가면 복원해놓은 그 '필수 요새'를 직접 볼 수 있다.
둥근 요새 주변으로 흙을 쌓아서 참호도 만들고, 작은 대포도 설치를 했다는 기록대로 잘 복원을 해놓았다.
요새를 먼저 둘러본 후에 안내영화를 보기 위해서 비지터센터로 돌아갔는데, 이런 역사 공원에서는 영화를 꼭 보는 것이 좋다. 여기 영화는 최근에 새로 제작을 했는지 화질도 좋아서 아주 볼만했다. 첫번째 전투가 있고 한 달여가 지난 7월 3일에 이 요새를 지키던 워싱턴의 부대 약 400명이 프랑스군 600명과 인디언 100명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극장 앞에 만들어 놓은 디오라마인데, 정말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그 날 저녁 8시까지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워싱턴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프랑스 지휘관에게 항복을 하고, 다음 날 남은 병력이 부상자들을 데리고 버지니아로 철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대로 오하이오 강 유역을 프랑스에 내줄 수 없던 영국은, 이듬해 1755년 6월에 본토에서 파병된 에드워드 브래독(Edward Braddock) 장군이 이끄는 정규군 2,000명으로 다시 듀케인 요새를 공격하러 오는데, 이 때도 워싱턴이 참모로 원정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국립공원 브로셔에도 인쇄된 이 그림처럼 프랑스와 인디언의 매복 공격으로 브래독 장군까지 치명상을 입으며 엄청난 피해를 보고, 결국 몇일 후 사망한 장군을 땅에 묻고 500명 정도만 남은 패잔병을 이끌고 후퇴하는 것은 또 워싱턴의 몫이었다나... 이렇게 처음에는 프랑스가 이기는 듯 했지만, 유럽의 '7년 전쟁'과 맞물려서 결국은 영국이 프렌치 인디언 전쟁을 승리해서 오하이오 강 유역은 영국의 식민지로 굳어진다.
그리고 약 20년 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서 영국과 싸운 독립전쟁의 승리로 탄생한 신생국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워싱턴이 이 곳을 다시 방문했다고 한다. 그 때 워싱턴을 만나서 제대로 된 동서를 연결하는 마찻길을 빨리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전편에서 소개한 앨버트 갤러틴(Albert Gallatin)으로 왼쪽에 그의 초상화가 보인다.
1806년 제퍼슨 대통령 시기에 건설법안이 통과되지만, 메릴랜드 컴벌랜드(Cumberland)부터 서쪽으로 폭 20미터로 산을 깍고 숲을 베고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놓는 도로공사는 1811년에야 시작된다. 산악지역을 통과해서 휠링(Wheeling)까지 가장 힘든 첫번째 구간이 7년만에 완공되어 부분개통을 하고, 아래 지도의 총 600마일 구간은 1837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포트네세서티가 있는 곳이 펜실베니아 유니언타운(Uniontown) 조금 아래쪽이고, 1850년대까지는 미국의 동서를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유지보수를 위해 각 지역이 구간별로 통행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내셔널파이크(National Pike)'로 불리기도 했다.
도로건설 과정은 물론 당시의 모습도 많이 전시를 해놓았는데, 마지막에 보여드릴 여행객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는 태번(tavern)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저 분들이 계속 뭐라고 떠느는 목소리가 나옴) 그러나 곧 철도가 화물과 사람을 모두 더 저렴하게 운송하는 수단이 되면서 내셔널로드는 통행량이 급감하며 잊혀져 가다가...
1900년대 자동차가 등장하며 내셔널 하이웨이(National Highway)로 부활해서 국도 40번(US Route 40)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고, 1950년대 고속도로망이 만들어지면서 펜실베니아 워싱턴(Washington)부터 서쪽으로는 인터스테이트 70번(Interstate 70)이 그 경로를 따라 건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원 입구쪽에 있는 빨간 벽돌집을 잠깐 구경했는데, 1828년경에 문을 열었던 마운트워싱턴 태번(Mount Washington Tavern)으로 내셔널로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던 건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바로 옆으로 조지 워싱턴이 3번이나 왔었던, 그 중에 2번은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갔던 길이 국도 40번으로 바뀌어 21세기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근처 도로변에 전사한 브래독 장군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기념비도 만들어져 있다고 해서 가볼까 했지만, 이 날 6곳을 둘러보는 스케쥴이 아주 빡빡했기 때문에 바로 다음 장소로 또 이동을 했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말하는게 맞는데, 그가 전쟁에서 항복을 한 적이 있었다고? 도대체 워싱턴이 언제 어디서, 또 누구에게 항복을 했었는지 아래에서 알려드리고, 또 1800년대 초에 미국의 첫번째 전국적인 국책사업으로 건설되었던 횡단도로인 내셔널로드(National Road)에 대해서도 소개해드린다. 물론 아스팔트 포장의 자동차 도로가 아니라 자갈을 깐 마찻길이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웃 펜실베니아 주의 별볼일 없는 국립공원들 돌아보기의 두번째 목적지도, 역시 이름만 봐서는 어떤 전쟁의 누구와 관련된 곳인지 짐작이 어려운 포트너세서티 국립전쟁터(Fort Necessity National Battlefield)인데, 간판 아래쪽에 목책을 세워놓은 것이 특이해서 눈에 띈다.
이번에는 다른 차들도 4~5대 정도 있던 주차장 바로 옆에 비지터센터를 아주 크게 잘 만들어 놓았는데, 국립공원청 로고 옆으로 공원 이름말고도 뭔가를 길게 적어 놓았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이 곳은 전편에 잠깐 언급했던 '내셔널로드'에 관해 알려주는 National Road Heritage Corridor 교육센터도 겸한다는 문구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실내에서 처음 마주치는 얼굴은 바로...
환영사 옆에 커다랗게 그려진 조지워싱턴으로, 그는 21세에 버지니아 민병대 소령이 되어 3년이나 연달아서, 자신이 살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여기까지 원정을 왔기 때문이다. (중앙의 코걸이를 한 인형은 워싱턴이 아니고 이 지역의 원주민) 당시는 미국이 독립 전인 1750년대로 프랑스와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서로 영토확장을 하던 시기이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기간의 지도를 위키에서 가져와 보여드리는데, 제일 왼쪽 아래에 Ft. Necessity와 워싱턴의 이름이 보인다. 북쪽에서 남하하는 프랑스와 서쪽으로 확장하는 영국의 분쟁이 시작된 곳이 오하이오 강(Ohio River) 유역으로, 1753년 겨울에 버지니아 총독이 워싱턴을 처음 메신저로 여기 보내서 프랑스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는 거절하고 지금의 피츠버그에 포트듀케인(Fort Duquesne)을 건설하자, 이듬해 1754년 봄에 다시 워싱턴에게 이번에는 군대를 끌고가서 프랑스를 쫓아낼 것을 명령하게 된다.
5월 28일에 워싱턴의 민병대가 약 30명의 프랑스 정찰부대와 마주쳐, 지휘관을 포함해 10여명을 죽이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곧 듀케인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대규모 프랑스 병력이 보복공격을 해올 것을 예상해서, 초원에 목책을 세워 방어를 위한 요새를 만들고 이름을 Fort Necessity라 지었단다. 워싱턴이 서있는 옆문으로 나가서 비지터센터 뒤쪽의 초원으로 조금 걸어가면 복원해놓은 그 '필수 요새'를 직접 볼 수 있다.
둥근 요새 주변으로 흙을 쌓아서 참호도 만들고, 작은 대포도 설치를 했다는 기록대로 잘 복원을 해놓았다.
요새를 먼저 둘러본 후에 안내영화를 보기 위해서 비지터센터로 돌아갔는데, 이런 역사 공원에서는 영화를 꼭 보는 것이 좋다. 여기 영화는 최근에 새로 제작을 했는지 화질도 좋아서 아주 볼만했다. 첫번째 전투가 있고 한 달여가 지난 7월 3일에 이 요새를 지키던 워싱턴의 부대 약 400명이 프랑스군 600명과 인디언 100명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극장 앞에 만들어 놓은 디오라마인데, 정말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그 날 저녁 8시까지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워싱턴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프랑스 지휘관에게 항복을 하고, 다음 날 남은 병력이 부상자들을 데리고 버지니아로 철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대로 오하이오 강 유역을 프랑스에 내줄 수 없던 영국은, 이듬해 1755년 6월에 본토에서 파병된 에드워드 브래독(Edward Braddock) 장군이 이끄는 정규군 2,000명으로 다시 듀케인 요새를 공격하러 오는데, 이 때도 워싱턴이 참모로 원정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국립공원 브로셔에도 인쇄된 이 그림처럼 프랑스와 인디언의 매복 공격으로 브래독 장군까지 치명상을 입으며 엄청난 피해를 보고, 결국 몇일 후 사망한 장군을 땅에 묻고 500명 정도만 남은 패잔병을 이끌고 후퇴하는 것은 또 워싱턴의 몫이었다나... 이렇게 처음에는 프랑스가 이기는 듯 했지만, 유럽의 '7년 전쟁'과 맞물려서 결국은 영국이 프렌치 인디언 전쟁을 승리해서 오하이오 강 유역은 영국의 식민지로 굳어진다.
그리고 약 20년 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서 영국과 싸운 독립전쟁의 승리로 탄생한 신생국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워싱턴이 이 곳을 다시 방문했다고 한다. 그 때 워싱턴을 만나서 제대로 된 동서를 연결하는 마찻길을 빨리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전편에서 소개한 앨버트 갤러틴(Albert Gallatin)으로 왼쪽에 그의 초상화가 보인다.
1806년 제퍼슨 대통령 시기에 건설법안이 통과되지만, 메릴랜드 컴벌랜드(Cumberland)부터 서쪽으로 폭 20미터로 산을 깍고 숲을 베고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놓는 도로공사는 1811년에야 시작된다. 산악지역을 통과해서 휠링(Wheeling)까지 가장 힘든 첫번째 구간이 7년만에 완공되어 부분개통을 하고, 아래 지도의 총 600마일 구간은 1837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포트네세서티가 있는 곳이 펜실베니아 유니언타운(Uniontown) 조금 아래쪽이고, 1850년대까지는 미국의 동서를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유지보수를 위해 각 지역이 구간별로 통행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내셔널파이크(National Pike)'로 불리기도 했다.
도로건설 과정은 물론 당시의 모습도 많이 전시를 해놓았는데, 마지막에 보여드릴 여행객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는 태번(tavern)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저 분들이 계속 뭐라고 떠느는 목소리가 나옴) 그러나 곧 철도가 화물과 사람을 모두 더 저렴하게 운송하는 수단이 되면서 내셔널로드는 통행량이 급감하며 잊혀져 가다가...
1900년대 자동차가 등장하며 내셔널 하이웨이(National Highway)로 부활해서 국도 40번(US Route 40)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고, 1950년대 고속도로망이 만들어지면서 펜실베니아 워싱턴(Washington)부터 서쪽으로는 인터스테이트 70번(Interstate 70)이 그 경로를 따라 건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원 입구쪽에 있는 빨간 벽돌집을 잠깐 구경했는데, 1828년경에 문을 열었던 마운트워싱턴 태번(Mount Washington Tavern)으로 내셔널로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던 건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바로 옆으로 조지 워싱턴이 3번이나 왔었던, 그 중에 2번은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갔던 길이 국도 40번으로 바뀌어 21세기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근처 도로변에 전사한 브래독 장군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기념비도 만들어져 있다고 해서 가볼까 했지만, 이 날 6곳을 둘러보는 스케쥴이 아주 빡빡했기 때문에 바로 다음 장소로 또 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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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7마일(11 km) 떨어진, 버지니아 주에 속하는 포토맥 강의 서안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미국 독립전인 1749년에 생긴 유서깊은 마을이다. 현재는 약 16만명이 거주하는 행정구역 상 독립된 시(independent city)인데, 버지니아 주에서 가구당 평균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이며, 바로 북쪽에 펜타곤이 있어서 국방부와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단다. 그리고 도시의 이름은 이집트의 고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따온 것은 아니고, 마을이 만들어질 당시에 그 땅의 소유주였던 John Alexander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우뚝 서있는 이 타워는, 동명의 그 이집트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파로스 등대(Pharos Lighthouse)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전체 높이도 333피트(101 m)로 역사학자들이 추정하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높이와 비슷하게 만든 이 건물은, 미국의 프리메이슨(Freemason) 조직이 1932년에 완공한 조지워싱턴 매소닉 내셔널메모리얼(George Washington Masonic National Memorial)이다.
북쪽 주차장과 연결된 이 육중한 옆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남성이 중앙홀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내부는 유료투어로만 관람이 가능한데, 우리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그냥 기념품 가게만 잠깐 둘러보기로 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가게의 벽에 그려진 저 그림이 당시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프리메이슨은 옛날 솔로몬의 신전을 건설하는 석공(mason)들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고 있단다. 일루미나티와 함께 각종 음모론에 자주 등장하는 조직인 프리메이슨의 로고가 새겨진 옷과 각종 소품들을 일반인들도 여기서 살 수가 있고,
프리메이슨의 리더를 상징하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그림과 관련 서적 등도 판매를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제1대 워싱턴을 시작으로 제38대 제럴드 포드(Gerald Ford)까지 14명의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프리메이슨 조직원(?)이었다고 하니 막강한 비밀결사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페이스북으로 신규 회원모집을 광고해야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단다.
유명한 프리메이슨의 엠블럼(Emblem of Freemasonry)에 관한 그들의 설명이 왼편에 씌여있는데, 나름대로 간단히 요약하자면... 직각자(The square)처럼 똑바르게, 원을 그리는 컴파스(The compass)처럼 둥글게, 그리고 이러한 기하학(Geometry)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신(God)을 중심에 두고 살자는 뜻이란다.
안내판 아래쪽으로 그 상징을 콘크리트로 커다랗게 만들어 놓았는데, 여기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까 잔디밭 사이로 만들어 놓은 산책로를 따라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니까 정문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벽에 워싱턴의 얼굴 부조와 기념관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청소를 한 지가 제법 오래되어 보였다. 특히 부조 아래의 워싱턴의 어록과 서명이 붙어있는데, 쇠로 만든 서명은 부러져서 아래 화단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 장소는 이름에 '내셔널(National)'이라는 말이 들어가지만 정부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유지에 만들어진 기념관으로, 그 규모가 미국에서 가장 큰 곳들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인 2015년에 미국의 국가유적지(National Historic Landmark)로도 지정이 되었다.
기념관의 내부는 9층으로 되어있고 단순히 조지 워싱턴에 관한 전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도 프리메이슨 조직이 회합을 가지는 롯지(Lodge)와 특이한 벽화 및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을 기리는 예배당 등을 볼 수 있다고 하므로, 이런 류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투어를 해보시면 흥미가 있으실거다. 관심은 있지만 시간이 없는 위기주부는 주차장으로 돌아가서 이제 언덕 아래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 시내로 향했다.
알렉산드리아 시청 앞 광장에서 올해 처음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났는데, 장식이 아직 다 안 끝난건지? 아니면 노란 전구로만 장식을 끝낸 미니멀리즘인지? 트리 장식이 아주 단순했다~^^
시청에서 강가로 뻗어있는 킹스트리트(King Street)는 식당과 가게들이 좌우로 늘어선 보행자 도로로 꾸며져 있는데, 여기 올드타운 알렉산드리아(Old Town Alexandria)에는 1700년대에 지어진 벽돌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워싱턴을 지나서 흘러 온 포토맥 강(Potomac River)과 만나는 곳에 워터프론트 공원(Waterfront Park)이 나온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작은 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강물 위로 늦가을 맑은 날씨의 붉은 노을이 참 멋있었다~
사모님이 너무 웃기게 나왔다고 공개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우리 부부가 이러면서 노는 것은 이미 다들 아시는 사실이고, 영하의 기온이 추워서 모자를 뒤집어 쓴 것 뿐이니까, 그냥 결혼 23주년 기념 나들이의 추억으로 올려놓는다.
남쪽으로는 강을 건너는 우드로윌슨 기념다리(Woodrow Wilson Memorial Bridge)가 보이고 그 뒤로 작게 회전관람차와 컨벤션센터 건물이 보이는 곳이, 작년 크리스마스 당일에 방문했었던 메릴랜드 주의 내셔널하버(National Harbor)이다. (여행기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그 때 사진 왼쪽의 고층빌딩인 MGM 카지노호텔도 한 번 가보겠다고 해놓고, 벌써 1년이 다되어 가는데 아직 못 가봤으니까...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저기를 가볼까?
강가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걸으니까 노란 수상택시(water taxi)와 선상 카지노처럼 보이는 배가 정박되어 있었다. 부두에 고급 식당들이 많이 있었지만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이른 것 같아서, 따뜻한 음료수 한 잔만 마시고 강가를 따라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킹스트리트를 따라 주차한 곳으로 돌아가다가 들어간 '별다방'도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핫초콜렛을 하나 사고 운 좋게 자리가 난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나누어 마셨는데, 아래에 인터넷에서 가져온 이 가게의 다른 내부 사진을 한 장 보여드린다.
벽난로 위에 Seaport Inn & Restaurant 간판과 함께 엄청 낡아보이는 벽과 천장이 보인다. 즉, 이 건물은 1760년대에 지어진 여관과 식당이 영업을 하던 곳으로, 아마도 미국의 스타벅스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에 입점한 가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까 가로등과 나무에 장식한 조명이 들어와서 때 이른 연말 분위기가 팍팍 느껴졌다. 다음 날 사모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 동네에서 1등으로 집밖에 크리스마스 전구를 설치해서 불을 밝혔고, 화요일 저녁에는 딸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왔다. 미국에 계신 이웃분들은 모두 추수감사절 연휴 잘 보내시기 바라며, 지금 진행되고 있는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도 잘 싸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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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에 미동부 아이비리그 대학투어 여행을 하면서 펜실베니아 주는 필라델피아만 구경을 했었는데, 동부로 이사온 후로 봄방학 여행 때 처음 다른 몇 곳을 둘러봤다. 펜실베니아는 영국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William Penn)의 '신성한 실험'으로 1681년에 건설된 식민지로, 당시 유럽에서 박해받던 모든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지상낙원을 만들고자 했단다. 그래서 특히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독일로부터의 이민이 많았는데, 봄방학 여행에서 둘쨋날 숙박을 한 도시가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뜻인 킹오브프러시아(King of Prussia)라는 독특한 이름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이 곳에 있는 밸리포지 국립역사공원(Valley Forge National Historical Park)의 비지터센터를 아침 일찍 찾았는데, 3월 중순에 밤사이 내린 눈으로 하얀 설경을 보여주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참고로 필라델피아의 위성도시인 킹오브프러시아에는 매장면적 기준으로 미국에서 3번째로 큰 쇼핑몰이라는 King of Prussia Mall이 있는데, 사모님께서 나중에 알고는 안 데리고 갔다고 가이드를 나무라셨다~ (4위는 LA지역에 있는 South Coast Plaza로 옛날에 가봤고, 1위는 미네소타 주라서 가망이 없지만, 2위는 뉴저지 주라서 앞으로 모시고 갈 수 있음^^)
거의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들어가서 다른 손님도 없고 모든 것이 반짝반짝했는데, 이 비지터센터와 박물관은 우리가 방문하기 바로 전달에 워싱턴의 생일이었던 2월 21일에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새로 문을 열어서 그렇다.
그 생일의 주인공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이렇게 '백마를 탄 왕자님'처럼 위풍당당하게 전시장 입구에 서있지만... 실상은 미국이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선언을 한 다음해인 1777년 12월 19일에 영국군에게 그 필라델피아를 내어주고 자신이 이끄는 패퇴한 대륙군(Continental Army) 약 12,000명을 이끌고 쫒겨온 곳이 여기 밸리포지(Valley Forge)이다.
패잔병과 함께 불을 쬐면서 돌을 데워서 굽는 빵이 익기를 기다리는 모녀인데, 벽화와 같이 실제로도 밖에 얇게 눈이 덮힌 상태라서 현실감 백배였다~ 당시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영국군이 워싱턴을 여기까지 추격하지 않은 이유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는데, 만약에 그 때 영국군이 계속 여기까지 진격해서 대륙군을 완전히 섬멸하거나 워싱턴을 죽이기라도 했다면 전세계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추운 겨울 동안에 군대를 주둔(encampment)하기 위해서 나무들을 잘라서 임시 통나무집을 만드는 것을 우리가 도와주고 있다. "이런 조립해서 만드는 일은 내가 잘하지~"
왼쪽 투명상자에 들어있는 샘플과 똑같이 위기주부가 순식간에 한 채 만든 것이 앞쪽에 보이고, 지혜가 만들다가 포기한 통나무집은 아내가 이어받아서 계속 만들고 있다. 약 1,500채의 통나무집을 만들어서 그나마 추위는 피했지만, 식량부족에 전염병까지 돌아서 1778년 봄까지 약 2,000명이 캠프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가운데 벽에 독립전쟁 당시에 사용되었던 무기들을 전시해놓은 것을 지혜가 보고 있는데, 총기류 보다도 칼들이 더 많았고 제일 아래에는 아주 기다란 창도 보인다. 총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 때는 서로 코 앞에서 한 발씩 쏘고는 그냥 달려가서 베고 찌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 큰 전투도 벌어지지 않았고, 단순히 워싱턴이 총사령관이었던 퇴각한 대륙군이 통나무집만 많이 지어서 겨울 동안 피신했던 장소라면 왜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되었을까? 이 뒤쪽으로 그에 대한 전시가 있었지만, 소개영화를 볼 시간이 다 되어서 기념품 가게를 지나서 비지터센터 위쪽으로 나갔다.
비지터센터와 붙어있는 극장은 아직 재단장이 끝나지 않아서, 여기 별도의 건물에서 대형 TV로 봤는데, 이전 여행기에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역사공원에서는 소개영화를 꼭 봐야된다. 얼떨결에 독립을 한 미국은 대륙군을 소집해서 워싱턴을 총사령관에 앉혔지만, 대부분이 전투경험이 없는 의용군이라서 당시 세계최강 영국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여기 밸리포지에 주둔하는 동안에 군사고문으로 와있던 프러시아의 전직장교 Von Steuben이 체계적으로 전투하는 방법과 규율을 가르쳤는데, 이 기간의 훈련으로 오합지졸이던 대륙군이 진정한 군대로 거듭났기 때문에 이 곳을 '미군의 탄생지(Birthplace of the American Army)'라 부르며 기념하는 것이다.
진짜 잘 만들었던 소개영화를 보고나서는 차를 몰고 이 곳의 여러 유적지들을 한바퀴 둘러보면 된다. 첫번째로 조금 전에 우리가 만들었던 것과 같은 통나무집들을 재현해놓은 곳을 차로 지나쳤는데, 저기 걸어서 구경하시는 분들은 타주에서 단체로 관광버스를 타고 온 미국인들이었다.
첫번째로 차를 세우고 이 역사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인 내셔널메모리얼아치(National Memorial Arch)를 보러 눈 내린 잔디밭을 걸어가는 중이다. "야~ 파리 개선문이다!"
여기서 겨울을 보내며 단련된 미군이 다음 해 이 밸리를 떠나서 영국군을 추격하기 시작한 6월 19일에 맞춰서, 연방정부의 예산으로 1917년에 워싱턴과 병사들을 위해서 헌정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정면 모양은 비슷하지만 높이는 약 18미터로 파리 개선문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조지 워싱턴이 프리메이슨(Freemason)의 회원이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래서 이 아치가 1990년대에 전면적인 보수를 할 때 그 자금을 지원한 곳이 펜실베니아 주의 프리메이슨 조직이었다고 한다.
눈 내린 들판 위의 앙상한 나뭇가지... 불과 한 달 전에 펜실베니아는 이런 모습이었는데, 4월 중순인 지금은 들판의 잔디와 나무의 나뭇잎들이 여기 버지니아처럼 모두 무서운 속도로 파래지고 있겠지?
도로 옆으로 멋진 청동 기마상이 나와서 또 워싱턴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차를 세우고 자세히 보니 General Wayne Statue라 되어있다. 동상의 주인은 펜실베니아 출신의 Anthony Wayne으로 당시 워싱턴의 부관들 중의 한 명으로 지역연고를 이용해서 신병모집과 보급을 담당했단다.
조금 더 운전하니까 왼편으로 지붕이 있는 다리가 보이길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떠올랐다~ 동부의 옛날 나무다리는 사계절의 변화무쌍한 날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지붕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으로, 아이오와(Iowa) 주의 매디슨 카운티에 있는 그 다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다리를 지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공원 순환도로를 조금 더 달려서,
강가를 따라 기찻길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웠다. 미군이 이 곳에 주둔하는 동안 워싱턴이 숙박했던 집인 Washington's Headquarters를 찾아왔는데, 가운데 보이는 것은 기차역이고 그 왼편으로 나무에 가려진 본부가 살짝 보인다.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봐야 어차피 건물내부는 못 들어간다고 해서, 그냥 여기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출발~
마지막으로 차를 세운 곳은 Washington Memorial Chapel로 1921년에 만들어진 기념예배당이다. 가운데 본관은 문을 닫아서 들어가 볼 수 없었고, 오른쪽에 높이 서있는 종탑의 내부만 잠깐 둘러보았다.
1953년에 추가로 건설된 이 종탑의 이름은 National Patriots Bell Tower로 성조기를 이용한 천정의 장식 등 내부 전체가 애국적인 분위기가 팍팍 풍기는데, 특히 예배당과 함께 스테인드글래스 장식이 유명하다는데,
스테인드글래스 그림이 이렇게 워싱턴의 일생이나 독립전쟁 등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국 독립군이 패퇴해서 주둔했던 장소를 미군의 탄생지로 기념하는 밸리포지 국립역사공원 구경은 마치고, 서쪽으로 1시간 정도 운전을 해서 인터코스(Intercourse)라는 좀 거시기한 이름의 마을을 찾아갔는데, 그 곳은 아래의 옛날 명작 영화가 촬영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위기주부에게는 영원한 인디애나존스이자 한솔로인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1985년 영화 <위트니스>는 이제 간단히 소개할 아미시(Amish) 사람들의 존재를 전세계에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이다. 그 해 아카데미에서 주요 8개 부문 후보에 올라서 각본상과 편집상 2개를 수상해 작품성도 인정받아 옛날 KBS '주말의 명화'의 단골 방영작이었다.
제일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초기 펜실베니아 주로 독일계 이민자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성서적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메노나이트(Mennonite) 교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으로 새로운 문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미쉬 공동체로 아직도 전기와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는다. 인터코스 마을에서부터 '마차주의' 표지판이 도로에 등장해서 설마했더니, 이렇게 차도 옆으로 까만 마차(buggy)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 지역에서 주로 농업을 생계로 조용히 살아가기 때문에, 관광지라 부르기는 좀 그렇고 투어를 통해서만 그들의 생활상을 볼 수가 있단다.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가장 널리 알려진 투어가 진행되는 곳인 아미시빌리지(Amish Village)라고 씌여진 곳에 잠깐 들러보기로 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옛날 모뉴먼트밸리 여행을 갔을 때도 나바호 부족의 생활상을 보는 투어를 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있는 모습을 유료투어로 구경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그냥 투어는 생략하고 아미시 사람들이 전통방법으로 만들었다는 살구잼만 기념으로 하나 사서 아미시빌리지를 나왔다. 그리고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랭카스터(Lancaster)로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 곳의 코스트코에는 이렇게 아미시 마차를 세워둘 수 있는 별도의 주차공간(?)까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다시 30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1시간여를 더 달려서, 2박3일 봄방학 자동차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이자 가장 중요한 목적지를 이제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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