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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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12

파리에서 12

한량|2015년 3월 23일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자 나름대로 불행하다. 의 첫머리를 읽고 아, 하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에 대해 진지하게 곱씹기엔 아직 어렸던 모양이다. 행복한 가정은 각자 나름대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나는 종종 거꾸로 문장을 되새겼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이것도 맞는 말 같았다. 행복에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한 걸까. 돈, 젊음, 건강, 미모..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명제들이 지나갔다. 여행자의 행복은 일상을 비껴나는 자유에서 왔다. 매일 맞추던 알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잠자리에 드는 밤. 빨리 잠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늦지 않게 일어나지. 그러니 빨리 잠이 들어야, 들어야, 들어야. 로 메아리

파리에서 11

파리에서 11

한량|2015년 2월 26일

나에겐 쇠털만큼 많은 시간이 있어서, 숙소를 옮기기 전날 오후 새로 옮길 숙소까지 살금살금 걸어가 보았다. 퐁피두까지 걸어간 다음, 구글맵이 인도하시는 대로 골목을 꺾어 들어섰다. 벽에 붙은 파란 번지를 이리저리 살피며 계속 걸었다. 이윽고 확 트인 광장이 나왔다. 몇 번 주위를 가늠하고서 발길을 옮긴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 품 속의 번지를 제대로 찾았다. 나는 아래서 창을 한 번 올려다 보고, 건너편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벤치에 앉아 있고, 몇 몇의 아이들이 뛰어논다. 아저씨 둘이 공원에 놓인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고 있다. 흠, 좋았어.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기에, 나는 다시금 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여전히 고요하고, 가끔 맞은편 창문에서 달그락하고 요리하는 소리가 난다. 흐리다

파리에서 10

파리에서 10

한량|2015년 2월 25일

다리를 총총 건너 유람선 선착장에 이른다. 표를 한 장 끊고, 승선을 기다리며 풍경을 바라본다. 강을 따라 늘어선 철책마다 겹겹이 걸린 자물쇠들. 사방에 사랑의 맹세가 빼곡하다. 이윽고 오른 유람선. 한 여름 오후의 햇살은 쨍쨍하다. 다들 그 햇살을 담뿍 받으며 이층에 모여 앉았다. 시동을 건 배가 강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기름 냄새가 난다. 커다란 엔진 소리는 이내 익숙해진다. 강물이 뱃전에 부딪치고, 그 속도를 따라 바람이 밀려온다. 보잉 썬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아가씨가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한다. 이어 오늘의 코스에 대해 설명해 준다. 불어로 한 번, 영어로 한 번.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경쾌한 웃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 몸에 꼭 맞는 흰 셔츠와 검은색 스커트. 플랫 슈즈. 손목에는 검은 고무줄

파리에서 8

파리에서 8

한량|2015년 2월 10일

여름 여행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지천이 푸르다. 청명한 하늘, 무성한 나무 그늘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나는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하루 하루는 어떨까. 가게 유리창에 걸린 바캉스 안내문을 마주치면, 그들은 어디로 여행을 떠났을까 상상했다. 지도를 검색하고, 교통 편을 예약하고, 짐을 꾸려 떠나는 여정. 상상은 지구를 돌고 돌아 서울에 가닿았다. 런던 사람들에게 빨간 이층 버스는 교통 수단이고, 파리 사람들에게 에펠탑은 늘 익숙한 배경이듯 생활인이 보는 도시는 그저 밋밋하기만 하다. 익숙한 도시에서 우리는 무감각하게 걷는다. 표지판 하나 보지 않고, 가장 빠른 환승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가방을 여미며 행인들을 관찰할 새도 없다. 서투르고 어색한 인삿말로 인포메이션을 두드릴 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