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역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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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모리스타운(Morristown) 국립역사공원과 필라델피아 교외의 페들러스빌리지(Peddler's Village)

뉴저지 모리스타운(Morristown) 국립역사공원과 필라델피아 교외의 페들러스빌리지(Peddler's Village)

미국의 첫번째 국립공원(National Park)은 1872년의 옐로우스톤, 준국립공원(National Monument)은 1906년의 데블스타워인 것은 많이 알고들 계시고, 이제 소개하는 장소는 1933년에 미국 최초의 국립역사공원(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지정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역사적인 제임스타운 정착지와 요크타운 전쟁터가 대통령 직권으로 내셔널모뉴먼트로 보호가 되었지만, 하원을 통과한 법률에 의거해서 내셔널파크와 동등한 권위를 가지는 국립역사공원은 모리스타운이 첫번째이다. 1박2일 뉴욕여행의 둘쨋날 오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침 아내가 가보고 싶다는 예쁜 마을이 내륙에 있길래 조금 더 우회해서 뉴저지(New Jersey) 주의 모리스타운 국립역사공원(Morristown National Historical Park)을 찾았다. 공원은 시내의 워싱턴 지휘본부 박물관(Washington's Headquarters Museum)과 외곽의 병력 주둔지인 자키할로우(Jockey Hollow) 지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비지터센터를 겸하는 여기 박물관만 잠깐 둘러보기로 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Washington-Rochambeau Revolutionary Route National Historic Trail 배너로 알 수 있듯이, 모리스타운은 미국의 독립전쟁과 관련된 장소이다. 특히 1937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이 직접 만든 최초의 박물관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는데, 그에 걸맞게 식민지 혁명 당시의 많은 역사적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단다. 거기에는 아내가 관심있게 구경했던 소위 '아메리칸 스타일(American Style)'의 상류층 의복과 장신구 등도 많이 있었고, 별도의 전시실에는 미국독립혁명과 관련된 서신과 책, 팜플렛(pamphlets) 등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전시규모가 아주 방대했다. 지도 가운데 까만 점이 모리스타운(Morristown)이고 제일 오른쪽에 뉴욕 맨하탄이 보인다. 독립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군이 뉴욕을 점령하자. 후퇴한 워싱턴의 대륙군 약 1만명이 1779-80년의 겨울을 보낸 장소라고 한다. 독립선언 이듬해인 1777년초에도 약 3천명 정도를 데리고 여기 잠깐 주둔했으며, 1777-78년 겨울은 2년전에 방문했던 펜실베니아 밸리포지(Valley Forge)에서 보냈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아니라서 전황도같은 것은 없는 대신에 다른 전시물들이 많았다. 조지 워싱턴의 1772년 최초 초상화는 모사품이지만, 유리상자 안에 전시된 칼은 1789년 첫번째 대통령 취임식 때 찼던 진품이란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다른 '조지'의 초상화가 걸려있는데... 바로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은 영국왕으로 기억되는 조지3세(George III)로 그의 실제 얼굴은 처음 보는 듯 했는데, 위기주부에게는 '조지3세'하면 아래와 같이 왕관을 쓰고 "다다다닷 다닷다다 다다야다, 다다닷 에브리바디!"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바로 떠오른다~ 7년전에 LA에서 관람했던 뮤지컬 의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팅에서 조지3세 역을 맡았던 배우의 모습으로 살짝 닮은 것 같기도 하고...ㅎㅎ 극중에서 뉴욕을 빼앗긴 직후에 알렉산더 해밀턴이 워싱턴의 '오른팔(Right Hand Man)'이 되는 장면이 있는데, 그래서 해밀턴도 여기서 워싱턴과 함께 겨울을 보냈다. 그외 많은 전시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에 사용된 소총인 머스킷(Musket)을 한 번 발사하기 위해서 13번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1779-80년 겨울은 가장 혹독한 추위로 유명해서 워싱턴의 대륙군은 무려 27번이나 눈폭풍을 견뎌야 했단다. 그래서 공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나오는 첫문장과 안내영화의 제목이 모두 "Where America Survived"이다. 참고로 실제 워싱턴 부부가 지냈던 포드맨션(Ford Mansion)은 박물관 맞은편에 남아있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주변이 공사중이라서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사진을 가져와 보여드리고 다음 방문지로 넘어간다. (내부는 무료 가이드투어를 이용해서 구경할 수 있음) 202번 국도로 주경계인 델러웨어 강(Delaware River)을 건너 펜실베니아 주로 들어와서, 라하스카(Lahaska)라는 특이한 이름의 마을에 있는 페들러스빌리지(Peddler's Village)를 찾아왔는데,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필라델피아 광역도시권에서 세번째로 방문객이 많은 유명 관광지라 한다. 관광안내소 앞의 공터에는 일요일을 맞아서 거품으로 만든 가까 눈을 뿌려주고 있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도로를 건너자 처음 시선을 끈 것은 이 내륙의 산골마을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뜬금없어 보이는 모래조각이었다! ㅎㅎ 예쁜 가게와 식당들이 모여있는 이런 아기자기한 동네를 많이 다녀봤지만, 여기 페들러스빌리지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중앙 잔디밭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모여있고, 도로 건너편에 아주 넓은 무료주차장이 잘 만들어져 있는 점이었다. 즉, 직선의 도로를 따라 가게들이 있어서 왕복으로 발품을 팔아야 하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공원을 한바퀴 도는 기분으로 여러 가게들을 편리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다른 모래조각 작품으로 메이저리그 야구팀 필라델피아 필리스(Philadelphia Phillies)의 팬이 만든 모양이다. 아마도 이 조각은 땅콩회사 또는 가게가 제작을 협찬해서 미스터피넛(Mr. Peanut)이 등장을 한 모양이고, 필리스의 마스코트는 녹색 털복숭이인 패너틱(Phanatic)이다. 나름 오래되어 보이는 물레방앗간의 내부도 상점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꽃들을 아주 예쁘게 심어놓아서 통째로 뽑아가고 싶었다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만들어진 정자에서는 일요일을 맞아서 밴드와 가수가 생음악 공연도 하고 있었고, 여기 바로 뒤쪽에 있는 가게가 이 마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연중내내 크리스마스 장식과 소품들을 파는 로 페들러스빌리지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특히 더 예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버지니아에 사는 우리가 여기를 연말에 일부러 찾아올 일은 없겠지만, 혹시 겨울철에 필라델피아를 또 지나가게 된다면 잠깐 구경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1박2일 여행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의 연구소와 자택을 둘러볼 수 있는 뉴저지 토머스에디슨(Thomas Edison) 국립역사공원

발명왕 에디슨의 연구소와 자택을 둘러볼 수 있는 뉴저지 토머스에디슨(Thomas Edison) 국립역사공원

예전에 작성했던 미동부의 유료도로를 설명하는 포스팅에서 뉴저지(New Jersey) 주의 고속도로는 한국처럼 진출입 구간별로 이용요금을 징수해서 한국 스타일의 휴게소(service area)도 잘 만들어져 있지만, 차이점은 휴게소의 이름이 지역명이 아니라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알려드렸었다. 그 중에 맨하탄에서 남쪽으로 95번 고속도로를 한 시간 못미쳐 달리면 나오는 휴게소의 정문 유리에는, 작년 초에 위기주부가 직접 찍어 놓았던 아래의 사진처럼 유명한 글귀가 적혀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여기 토머스에디슨 휴게소 부근의 멘로파크(Menro Park) 지역에 있던 그의 첫번째 연구소에서, 수 많은 발명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전구와 축음기 등이 처음 만들어졌으며, 그 지역을 포함하는 인구 10만명 정도의 타운쉽(township)은 1954년에 도시명을 에디슨(Edison)으로 변경을 해서 그를 기리고 있다. 1887년에 40세의 에디슨은 뉴욕에 더 가까운 웨스트오렌지(West Orange) 마을로 자신의 발명품들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과 연구소를 새로 지어서 이전해 여생을 거기서 보내게 된다. 그 웨스트오렌지 연구소의 이 외관 모습은 작년 봄에 보스턴을 다녀왔던 여행기 마지막에 똑같은 구도로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월요일이라 문을 닫아서 내부를 구경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번 1박2일 뉴욕여행의 둘쨋날 일요일 오전에 꼭 여기를 다시 방문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여기 연구소와 인근의 그의 저택은 1950년대부터 국립공원청이 각각 관리하다가 1962년에 국립사적지로 통합 지정이 되었고, 2009년에 토머스에디슨 국립역사공원(Thomas Edison 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격상이 되었다. 입구를 지나서 첫번째 나오는 옛날 실험실 건물 하나를 개조한 비지터센터로 들어가는 아내의 모습으로, 높은 급수탑이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도로변에 있던 안내판의 사진을 먼저 보여드리며 설명하면, 1928년에 찍은 항공사진의 가운데 위쪽에 그 급수탑이 작게 보이는데, 그 왼편으로 모여있는 까만 지붕의 나지막한 벽돌 건물들이 지금 남아있는 연구소이다. 나머지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얀색 6층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모두 축음기와 영사기 및 다른 제품들을 만들었던 공장이지만, 작은 한 동을 제외하고는 1970년대까지 모두 철거되었단다. 이 거대한 산업단지 전체가 에디슨의 회사였으며 일하는 직원의 수가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미동부에서는 드물게 이 국립역사공원은 입장료가 있어서, 그 동안 계속 미뤄왔던 위기주부의 13번째 연간회원권(Interagency Annual Pass)을 여기서 구입을 했는데, 처음으로 자연의 '내셔널파크(National Park)'가 아닌 인공의 역사공원에서 패스를 산 것이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에디슨 저택의 내부투어에 혹시 오늘 빈자리가 있는지 레인저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두 꽉 찼다고... "처음부터 여기 꼭 방문할 계획이었다면서, 왜 투어 예약은 까먹은 걸까?" 안쪽에서 안내영화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사모님께서 이 때까지는 별로 흥미가 없는 듯 해서 조금 보다가 그냥 일어섰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서 도로변에서 보이던 3층 주연구소(Main Laboratory) 건물의 허름한 입구로 특별한 기대없이 들어섰는데... 꼭대기까지 탁 트인 공간 전체를 에디슨의 많은 사진과 발명품들로 가득 채워놓은 이 홀에 들어서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특히 고풍스런 실내와 잘 어울리던 많은 조명에 눈길이 갔는데, 에디슨하면 전구가 제일 먼저 떠오르기에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저 조명들이 그의 탄소 필라멘트 전구가 아니라 최신 LED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벽난로 위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축음기의 소리를 듣고 있는 에디슨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그 앞 책상에는 골동품 전구도 하나 놓여있었다. 홀을 둘러싼 2층에는 설계실 등의 작은 방들이 많이 있고, 각각마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잘 설명이 되어 있었다. '입장불가(No Admittance)'라 씌여진 것은 옛날 표지판이니, 이 쪽으로 셀프투어를 계속하라는 안내에 따라 넓은 작업공간으로 나가니까... 전구를 들고 서있는 에디슨을 만나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도 우리와 떨어져서 뻘쭘하게 계속 서있는 사람은 바로 에디슨의 경쟁자였던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이다. 그런데 그가 양손에 들고 쳐다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혹시 아시는 분...? 아래 1층에는 대형 가공선반 등의 중장비들이 가득했는데, 19세기말부터 이러한 정밀 기계들로 산업 제품들을 개발하고 양산했다는 사실이 정말 대단하다. 마지막에 소개할 링크에도 에디슨의 최대 업적은 몇몇 발명품이 아니라, 세계 최초의 민간연구소를 설립하고 잘 운영해서 현대 기업의 연구개발 과정의 기틀을 닦은 것이라고 한다. 다시 3층으로 올라오면 중앙 통로를 따라서 유리벽 안에 '발명왕'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에디슨은 평생에 적게는 1천개에서 많게는 2천개 이상의 발명품을 만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단다. 2년전에 DC의 스미소니언 국립 미국사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도 에디슨의 전구들이 별도의 전시실에 굉장히 많이 전시되어 있어서 놀랬던 기억이 있는데, 단순히 상용가능한 전구를 발명한 것에 그치지 않고, 전기 사용을 위한 발전기와 송전선 등의 전체 시스템을 개발해서 전기의 시대를 연 사람이다. 에디슨 회사의 로고가 박힌 초기 원통형 축음기들도 종류별로 많이 전시되어 있고, 작은 축음기가 내장된 '말하는 인형(talking doll)'의 실물도 있었다. 처음 알게된 사실로 에디슨이 탄광업과 시멘트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하이오 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그는 정규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엄청난 노력과 열정으로 자수성가한 기업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설립했던 전기 회사가 지금의 세계적인 대기업인 GE,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의 전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3층 끝에는 뮤직룸이 있어서 에디슨이 자신의 축음기로 녹음을 했던 피아노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 영사기 등도 발명을 해서 전세계 최초의 영화 스튜디로로 사용된 암실인 '블랙마리아(Black Maria)'가 비지터센터 뒤쪽에 남아 있으며, 결과적으로 음반과 영상의 대중예술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동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구를 들고 서있는 에디슨의 동상으로 왼편에 검게 보이는 것이 영사기를 개발하고 테스트한 블랙마리아 건물이다. 이 외에도 별도로 지어진 단층 건물인 화학 실험실과 금속 실험실 등을 잠깐씩 둘러보고는, 가까이에 있는 그가 살던 집을 구경하러 자동차로 이동했다. 방이 29개나 되는 대저택인 에디슨의 집은 '글레몬트(Glenmont)'라는 이름으로 불렸단다. 에디슨은 첫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2년 후에 18살 연하의 여성과 재혼하면서 이리로 이사와서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함께 살았다. 정문 옆으로는 국립사적지로 지정 당시에 붙혔던 현판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내부투어에서 사진촬영은 금지인 모양이다. 집을 한바퀴 돌아서 뒷마당에서 다시 바라본 모습이다. 내부를 구경할 수도 없지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 온 이유는... 뒷뜰에 만들어진 그의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서이다. 토머스 에디슨은 1931년에 84세로 사망했는데, 그의 장례식이 있던 날 저녁에는 미국의 모든 집이 1분 동안 전깃불을 끄는 것으로 그를 추모했다고 하며, 그의 사후에 계속 이 집에 살았던 아내도 1947년에 옆에 함께 묻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발명왕 에디슨'의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본 포스팅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위기주부가 참고한 나무위키의 내용을 클릭해서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 글의 기타 항목을 보면 '세계 최대의 에디슨 박물관'이 한국 강릉에 있다고 하지만 이 곳과 비교해서 소장품의 수는 적은 듯 하고, "필라델피아의 한 휴게소 이름이 토머스 에디슨이다."라 씌인 것은 명백한 오류이므로 혹시 나무위키 수정권한이 있으신 분이 고쳐주시면 좋겠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의 연구소와 자택을 둘러볼 수 있는 뉴저지 토머스에디슨(Thomas Edison) 국립역사공원

발명왕 에디슨의 연구소와 자택을 둘러볼 수 있는 뉴저지 토머스에디슨(Thomas Edison) 국립역사공원

예전에 작성했던 미동부의 유료도로를 설명하는 포스팅에서 뉴저지(New Jersey) 주의 고속도로는 한국처럼 진출입 구간별로 이용요금을 징수해서 한국 스타일의 휴게소(service area)도 잘 만들어져 있지만, 차이점은 휴게소의 이름이 지역명이 아니라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알려드렸었다. 그 중에 맨하탄에서 남쪽으로 95번 고속도로를 한 시간 못미쳐 달리면 나오는 휴게소의 정문 유리에는, 작년 초에 위기주부가 직접 찍어 놓았던 아래의 사진처럼 유명한 글귀가 적혀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여기 토머스에디슨 휴게소 부근의 멘로파크(Menro Park) 지역에 있던 그의 첫번째 연구소에서, 수 많은 발명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전구와 축음기 등이 처음 만들어졌으며, 그 지역을 포함하는 인구 10만명 정도의 타운쉽(township)은 1954년에 도시명을 에디슨(Edison)으로 변경을 해서 그를 기리고 있다. 1887년에 40세의 에디슨은 뉴욕에 더 가까운 웨스트오렌지(West Orange) 마을로 자신의 발명품들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과 연구소를 새로 지어서 이전해 여생을 거기서 보내게 된다. 그 웨스트오렌지 연구소의 이 외관 모습은 작년 봄에 보스턴을 다녀왔던 여행기 마지막에 똑같은 구도로 보여드린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월요일이라 문을 닫아서 내부를 구경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이번 1박2일 뉴욕여행의 둘쨋날 일요일 오전에 꼭 여기를 다시 방문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여기 연구소와 인근의 그의 저택은 1950년대부터 국립공원청이 각각 관리하다가 1962년에 국립사적지로 통합 지정이 되었고, 2009년에 토머스에디슨 국립역사공원(Thomas Edison 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격상이 되었다. 입구를 지나서 첫번째 나오는 옛날 실험실 건물 하나를 개조한 비지터센터로 들어가는 아내의 모습으로, 높은 급수탑이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도로변에 있던 안내판의 사진을 먼저 보여드리며 설명하면, 1928년에 찍은 항공사진의 가운데 위쪽에 그 급수탑이 작게 보이는데, 그 왼편으로 모여있는 까만 지붕의 나지막한 벽돌 건물들이 지금 남아있는 연구소이다. 나머지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얀색 6층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모두 축음기와 영사기 및 다른 제품들을 만들었던 공장이지만, 작은 한 동을 제외하고는 1970년대까지 모두 철거되었단다. 이 거대한 산업단지 전체가 에디슨의 회사였으며 일하는 직원의 수가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미동부에서는 드물게 이 국립역사공원은 입장료가 있어서, 그 동안 계속 미뤄왔던 위기주부의 13번째 연간회원권(Interagency Annual Pass)을 여기서 구입을 했는데, 처음으로 자연의 '내셔널파크(National Park)'가 아닌 인공의 역사공원에서 패스를 산 것이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에디슨 저택의 내부투어에 혹시 오늘 빈자리가 있는지 레인저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두 꽉 찼다고... "처음부터 여기 꼭 방문할 계획이었다면서, 왜 투어 예약은 까먹은 걸까?" 안쪽에서 안내영화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사모님께서 이 때까지는 별로 흥미가 없는 듯 해서 조금 보다가 그냥 일어섰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서 도로변에서 보이던 3층 주연구소(Main Laboratory) 건물의 허름한 입구로 특별한 기대없이 들어섰는데... 꼭대기까지 탁 트인 공간 전체를 에디슨의 많은 사진과 발명품들로 가득 채워놓은 이 홀에 들어서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특히 고풍스런 실내와 잘 어울리던 많은 조명에 눈길이 갔는데, 에디슨하면 전구가 제일 먼저 떠오르기에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저 조명들이 그의 탄소 필라멘트 전구가 아니라 최신 LED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말이다.^^ 벽난로 위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축음기의 소리를 듣고 있는 에디슨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그 앞 책상에는 골동품 전구도 하나 놓여있었다. 홀을 둘러싼 2층에는 설계실 등의 작은 방들이 많이 있고, 각각마다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잘 설명이 되어 있었다. '입장불가(No Admittance)'라 씌여진 것은 옛날 표지판이니, 이 쪽으로 셀프투어를 계속하라는 안내에 따라 넓은 작업공간으로 나가니까... 전구를 들고 서있는 에디슨을 만나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해도 우리와 떨어져서 뻘쭘하게 계속 서있는 사람은 바로 에디슨의 경쟁자였던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이다. 그런데 그가 양손에 들고 쳐다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혹시 아시는 분...? 아래 1층에는 대형 가공선반 등의 중장비들이 가득했는데, 19세기말부터 이러한 정밀 기계들로 산업 제품들을 개발하고 양산했다는 사실이 정말 대단하다. 마지막에 소개할 링크에도 에디슨의 최대 업적은 몇몇 발명품이 아니라, 세계 최초의 민간연구소를 설립하고 잘 운영해서 현대 기업의 연구개발 과정의 기틀을 닦은 것이라고 한다. 다시 3층으로 올라오면 중앙 통로를 따라서 유리벽 안에 '발명왕'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에디슨은 평생에 적게는 1천개에서 많게는 2천개 이상의 발명품을 만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단다. 2년전에 DC의 스미소니언 국립 미국사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도 에디슨의 전구들이 별도의 전시실에 굉장히 많이 전시되어 있어서 놀랬던 기억이 있는데, 단순히 상용가능한 전구를 발명한 것에 그치지 않고, 전기 사용을 위한 발전기와 송전선 등의 전체 시스템을 개발해서 전기의 시대를 연 사람이다. 에디슨 회사의 로고가 박힌 초기 원통형 축음기들도 종류별로 많이 전시되어 있고, 작은 축음기가 내장된 '말하는 인형(talking doll)'의 실물도 있었다. 처음 알게된 사실로 에디슨이 탄광업과 시멘트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하이오 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그는 정규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엄청난 노력과 열정으로 자수성가한 기업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설립했던 전기 회사가 지금의 세계적인 대기업인 GE,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의 전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3층 끝에는 뮤직룸이 있어서 에디슨이 자신의 축음기로 녹음을 했던 피아노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 영사기 등도 발명을 해서 전세계 최초의 영화 스튜디로로 사용된 암실인 '블랙마리아(Black Maria)'가 비지터센터 뒤쪽에 남아 있으며, 결과적으로 음반과 영상의 대중예술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동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구를 들고 서있는 에디슨의 동상으로 왼편에 검게 보이는 것이 영사기를 개발하고 테스트한 블랙마리아 건물이다. 이 외에도 별도로 지어진 단층 건물인 화학 실험실과 금속 실험실 등을 잠깐씩 둘러보고는, 가까이에 있는 그가 살던 집을 구경하러 자동차로 이동했다. 방이 29개나 되는 대저택인 에디슨의 집은 '글레몬트(Glenmont)'라는 이름으로 불렸단다. 에디슨은 첫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2년 후에 18살 연하의 여성과 재혼하면서 이리로 이사와서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함께 살았다. 정문 옆으로는 국립사적지로 지정 당시에 붙혔던 현판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내부투어에서 사진촬영은 금지인 모양이다. 집을 한바퀴 돌아서 뒷마당에서 다시 바라본 모습이다. 내부를 구경할 수도 없지만,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 온 이유는... 뒷뜰에 만들어진 그의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서이다. 토머스 에디슨은 1931년에 84세로 사망했는데, 그의 장례식이 있던 날 저녁에는 미국의 모든 집이 1분 동안 전깃불을 끄는 것으로 그를 추모했다고 하며, 그의 사후에 계속 이 집에 살았던 아내도 1947년에 옆에 함께 묻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발명왕 에디슨'의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본 포스팅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위기주부가 참고한 나무위키의 내용을 클릭해서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 글의 기타 항목을 보면 '세계 최대의 에디슨 박물관'이 한국 강릉에 있다고 하지만 이 곳과 비교해서 소장품의 수는 적은 듯 하고, "필라델피아의 한 휴게소 이름이 토머스 에디슨이다."라 씌인 것은 명백한 오류이므로 혹시 나무위키 수정권한이 있으신 분이 고쳐주시면 좋겠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미국이 다시 하나된 곳"인 버지니아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 국립역사공원

"미국이 다시 하나된 곳"인 버지니아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 국립역사공원

윌머 맥클린(Wilmer McLean)은 지금 센터빌 남쪽에 큰 농장을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이었다.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후인 1861년 7월에 남부군이 그의 농장에 주둔했고, 버지니아 민병대 출신이었던 그는 기꺼이 자신의 집을 지휘 본부로 제공했다. 21일 새벽에 북군이 개울 건너에서 선제공격을 했는데, 포탄 한 발이 그 집의 부엌으로 날아들기도 했단다. 그렇게 남북전쟁 최초의 교전인 제1차 불런전투(First Battle of Bull Run)가 그의 농장에서 시작되었고, 이듬해 인근 매너서스에서 또 전투가 벌어지자 그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150마일이나 떨어진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된다. 새벽에 출발해 3시간반 동안 쉬지않고 운전을 해와서 만난 국립 공원의 간판이 너무 반가워, 앞뒤로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운전석에서 사진을 찍었다.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국립역사공원(Appomattox Court House National Historical Park)은 여기부터 제법 넓은 면적을 아우르지만, 비지터센터와 중요한 볼거리는 모두 마을 안에 있다. 참고로 옛날에는 그 카운티(County)의 법원이 소재한 마을의 이름을 '○○ Court House'로 불렀다고 한다. 공원 브로셔에 인쇄된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마을의 조감도로 한가운데 옛날 법원(courthouse) 자리에 지은 비지터센터가 있고, 그 아래쪽에 '맥클린 하우스(McLean House)'라는 굵은 글씨가 보인다. 그렇다! 바로 처음 소개한 윌머 맥클린이 전쟁을 피해서 이사를 온 남부 버지니아의 깡촌이 바로 여기 Appomattox Court House였던 것이다. 남부 버지니아의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 당일여행의 첫번째 목적지로 찾아왔지만, 여기를 그렇게 부르기에는 좀 미안한게... 비지터센터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위기주부 외에도 이렇게 제법 있었고, 미국 역사책에도 아주 중요한 장소로 항상 등장하는 곳이며, 여기서 벌어졌던 일을 다룬 라는 제목의 현대 오페라까지 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아침부터 근무하는 파크레인저도 4명이나 되어서, 한 명은 벌써 맥클린 하우스에 가있었고, 다른 한 명이 2층의 극장에서 틀어준 이 날 첫번째로 상영하는 안내영화를 봤다. 부제는 1865년 3월초 링컨의 두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 중의 유명한 문구인 "With malice toward none, with charity for all"에서 따온 것이다. 극장을 감싼 정사각형의 복도를 따라 전시가 만들어져 있는데, 먼저 미국 남북전쟁의 중요한 사건들이 시간순으로 적혀 있다. 비록 교전은 없었지만 공식적인 시작으로 보는 19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포트섬터(Fort Sumter)부터, 이미 블로그에 모두 소개한 First Manassas, Antietam, Gettysburg 등등의 전투를 차례로 거쳐서... 사실상의 마지막 전역인 애퍼매톡스 캠페인(Appomattox Campaign)이 1865년 4월 2~8일 동안에, 남부연맹의 수도였던 버지니아 리치먼드(Richmond)에서부터 서쪽으로 여기 애퍼매톡스까지 전개되었던 것이다. 시리즈 전전편에 소개했던 9달반의 피터스버그 포위전(Siege of Petersburg) 끝에 서쪽으로 후퇴를 하는 빨간색의 남군과,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노스캐롤라이나의 다른 남군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계속 남쪽에서 따라붙었던 파란색 북군의 이동경로와 그 과정의 주요 전투를 보여준다. 4월 6일에 Sailor's Creek에서 돌파시도가 실패한 다음에는 후미도 추격을 당해서 앞뒤로 포위되고, 마지막으로 8일에 Appomattox Station에서 기차를 이용해 린치버그(Lynchburg)로 후퇴하려던 계획도 좌절되자 남군 지휘부는 마침내 항복을 결정한다. (데이비스 대통령을 포함한 남부 지도자들은 일찌감치 2일밤에 바로 특별열차를 이용해 Danville로 탈출) 전시물 중에 눈길을 끌었던 발굴된 옛날 총탄들이라고 하는데, 손가락 굵기 정도로 예상보다 아주 큰게 신기했고, 또 대부분이 흰색에 가깝게 보이는 이유가 궁금하다... 여하튼, 8일의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몇 번의 의견교환 후에, 바로 다음날 양측의 총사령관이 만나기로 한 장소가 바로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 마을에서 가장 상태가 좋았던 윌머 맥클린 집의 거실(parlor)이었다. 1865년 4월 9일에 오른쪽 책상에 앉은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가 직접 그 자리에서 쓴 간단한 항복조건 문서에 왼쪽의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가 서명을 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 후에도 몇 달간 다른 지역에서 남북간에 약간의 교전이 있기는 했지만, 차례로 다른 남부 지휘관들도 소식을 듣고 항복을 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 날을 남북전쟁이 끝난 날로 역사책에 기록한다. 여기서 항복했던 남군 부대의 군기를 북군 지휘관 한 명이 기념으로 고향에 가져갔다가, 사후 그의 아내가 국립 공원에 기증한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문제는 여기같은 박물관이 아니라, 자기 집이나 차에 저 깃발을 지금도 걸어놓은 사람들이 남부 버지니아에서는 가끔 보인다는 것... 그리고 왼편 그림은 다음날 그랜트가 먼저 떠나기 전에 리를 다시 만나서 말 위에서 30분간 이야기를 나눴다는 모습인데, 그 장소가 공원 조감도에도 제일 위쪽에 표시되어 있다. (Lee와 Grant에 대해서는 그들을 기념하는 각각의 국립 공원 방문기에서 별도로 소개 예정) 전시의 마지막은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남군 장교 한 명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 애퍼매톡스에서 총성이 멎고 불과 5일이 지난 14일 저녁에, 링컨 대통령이 워싱턴DC의 포드 극장((Ford's Theatre)에서 남부 지지자에게 암살을 당하게 된다! 비지터센터를 나와 한적한 시골길을 조금 걸어서, 실제 두 장군의 만남이 있었던 맥클린 하우스(McLean House)로 왔다. 이 곳은 복원된 후에 남북전쟁 역사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실제 촬영장소로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12년 영화 에서도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돌아가는 리(Lee)에게 그랜트(Grant)가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는 위의 장면에 짧게 등장을 했단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서 정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왼편에 역사적인 장소가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다. 항복 직후에 다른 북군 장교들이 두 책상을 포함해 기념품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집주인에게 적당한 돈을 주거나 또는 그냥 가져갔기 때문에, 거실이 바로 텅텅 비었단다. 리가 사용했던 왼쪽 하얀색 대리석 상판의 책상은 시카고 역사박물관에, 그랜트가 사용했던 오른쪽 작은 나무 책상은 DC 미국사 박물관에 각각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1층 맞은편은 맥클린 부부의 침실로 모든 것이 당시의 모습대로 꾸며져 있고, 2층에 자녀들 방도 아주 잘 만들어 놓았었다. 사실은 가구와 장식만 새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이 집 전체가 1950년에 옛날 자재를 일부 사용해서 완전히 새로 지어진 것으로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거실 바로 아래 본채의 주방 사진과 함께 설명드리면... 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윌머 맥클린은 이 집을 팔고 북부 버지니아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 어떤 사업가가 다시 사서는 이 유명한 집을 통째로 워싱턴DC로 옮겨서 전시해 돈을 벌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1892년에 덩어리로 분해까지는 되었는데, 결국 운반되지는 못하고 그대로 거의 방치가 되어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는 1935년에 마을 전체가 국립 기념물로 지정이 되고나서, 목재는 대부분 썩어서 버려졌지만 남아있는 원래 벽돌 등으로 현재의 집을 새로 지었던 것이다. 건너편 잘 차려진 식당의 벽에 당시 집주인 부부의 초상화가 좌우로 걸려있는데, 모든 군인들이 떠나고 난 후에 윌머 맥클린이 "The war began in my front yard and ended in my front parlor."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로 MBC 방송의 에 나와도 될만한 기막힌 우연이 아닐까? ㅎㅎ 출구를 통해 뒷뜰로 나가면 부엌과 당시 이 집의 노예들이 살았던 숙소를 추가로 구경할 수 있다. 부엌의 모습도 당시와 비슷하게 재연을 해놓았고, 내부 다른 쪽에서는 당시 남부 노예들의 상황과 함께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해방 소식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었다. 하우스가 아니라 슬레이브쿼터스(Slave Quarters)로 불린 숙소의 내부 모습이, 좀 전의 본채 침실과 많이 비교가 되었다. 여기서 왕복 3시간이나 더 운전을 해야하기 때문에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시리즈 전편에 소개했던 노예 출신의 흑인 교육자를 기리는 준국립공원을 방문해보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서둘러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중심가 건너편에 1850년대 지어진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사진의 Meeks Store 및 오른편 나무 뒤로 살짝 보이는 남군 병사의 가석방(parole) 증서를 급히 인쇄했었다는 Clover Hill Tavern 등은 구경할 수 없었다. 본 여행기의 제목에 쓴 것처럼 애퍼매톡스 카운티의 환영간판에 "Where Our Nation Reunited"라 써진 것을 봤었는데, 이렇게 4년 동안 전쟁을 했던 남북도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고' 다시 하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미국은 서로 총질만 안한다 뿐이지 더 심하게 둘로 다시 갈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이렇게 남북전쟁이 끝난 곳은 다녀왔는데,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시작된 곳은 언제쯤 직접 가볼 수 있을까?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