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모뉴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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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가(國歌)의 가사가 만들어진 장소인 볼티모어 포트맥헨리(Fort McHenry) 준국립공원 및 역사성지

미국 국가(國歌)의 가사가 만들어진 장소인 볼티모어 포트맥헨리(Fort McHenry) 준국립공원 및 역사성지

메릴랜드 주의 최대 도시인 볼티모어(Baltimore)는 워싱턴DC를 중심으로 한 미국 광역수도권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로, 쉽게 말해서 한국의 인천에 해당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자매도시는 의외로 경상남도 창원) 그렇게 지금 사는 곳에서 1시간 거리의 가까운 곳이지만, 뉴욕까지 운전할 때마다 뮤지컬 의 '굿모닝 볼티모어' 노래를 들으며 지나가기만 할 뿐, 지난 3년동안 전혀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인데, 이번에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여행하며 도심의 두세곳을 둘러보았다. 볼티모어 항구의 가운데로 튀어나온 반도의 끝에는 1798년부터 건설이 시작돼 1805년에 완공된 별모양(star-shaped)의 요새가 있는데, 메릴랜드 대표로 미국 헌법에 서명했던 당시 전쟁장관 James McHenry를 기려 포트 맥헨리(Fort McHenry)로 명명되었다. 이 곳은 인공적인 구조물로는 최초로 1925년에 미국의 내셔널파크(National Park)로 일찌감치 지정이 되었다가, 은색 비지터센터의 외벽에 길게 씌여진 것처럼 1939년에 포트맥헨리 국가기념지 및 역사성지(Fort McHenry National Monument and Historic Shrine)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재지정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비지터센터를 통과해서 바로 역사적인 요새로 향했는데, 매일 오전 10시에 진행되는 국기교체식(Flag Change)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풀밭 너머 붉은 벽돌로 만든 요새 위로 높이 휘날리는 성조기가 보이고, 안내판에는 여기 게양되는 네가지 크기의 깃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날씨가 흐려서 우리도 아침에 올까말까 망설이다 늦었는데, 그래서 요새 안에 만들어진 게양대 주위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대여섯명에 불과했다. 바닷바람이 굉장히 차가웠기 때문에, 오각형의 요새 안쪽을 빙 돌아서 만들어진 막사 건물들 내부의 전시를 기다리는 동안 잠깐 구경을 하기로 했다. 요새가 완공되었을 때 처음 걸린 성조기는 버몬트와 켄터키가 추가된 15개 주(state)를 상징하는 15개의 별이 그려진 것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자세히 세어보면 흰색과 빨간색의 줄도 15개로 같이 늘렸다! 하지만, 이 다음에 한꺼번에 5개의 주가 더 추가되어 20개가 되니까 줄을 가늘고 촘촘하게 같은 수로 늘리는 것은 모양상 별로라고 판단이 되어서, 줄은 최초의 13개주 상징으로 원복하고 향후 별의 갯수만 맞춰서 늘리기로 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10시가 되어 연세 지긋하신 파크레인저가 나와서 국기교체식을 진행하기 시작하셨다. 이 다음날 월요일이 11월 11일로 한국에서는 빼빼로데이지만 미국에서는 '참전용사의 날' 베테랑스데이(Veterance Day)였는데, 그 유래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념한 것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날씨만 좋았으면 직전 주말에는 보통 수십명이 참석을 하는데, 오늘은 궂은 날씨 때문에 인원이 적어서 아쉽다고 하시며, 뒤에 접어서 놓아둔 성조기를 함께 펼치자고 했다. 이 주간은 특별히 베테랑스 데이를 기념해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디자인으로 48개의 별이 그려진 성조기를 게양했는데, 제일 아래쪽에 손이 보이는 우리 부부도 함께 깃발을 들었다.^^ 우리들 손에서 놓여진 성조기가 밧줄에 매달려 올라가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밤새 걸려있던 작은 깃발이 내려오는 동시에 새 깃발이 올라갈 수 있도록 게양대를 특수하게 이중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따라 맥헨리 요새는 바람이 극심한 경우를 빼고 24시간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곳이 미국에서 유일하게 '역사적 성지(Historic Shirine)'라는 칭호를 받으며 이런 특별대접을 받는 이유는 나중에 자세히 알려드린다. 하강하는 국기를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 육군과 해군 복장을 한 자원봉사자들이 챙기는 모습으로, 제1차 세계대전 때 포트 맥헨리는 유럽에서 돌아온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군사병원으로 사용되어 주변에 100채가 넘는 병동이 만들어졌었다고 한다. 나중에 우리가 둘러본 막사 한 곳에는 당시 의무장교와 간호사 복장을 한 사람들도 만나서 그 때 설명을 직접 들을 수도 있었다. 아내는 하강된 국기를 접는 것도 가서 도와줬는데, 같은 털모자를 쓴 3명은 함께 군대에서 복무했던 전우들로 매년 베테랑스 데이 직전 주말에 이 곳에서 다시 만나고 있단다! 이상으로 우리 부부에게도 의미있던 국기교체식 참가를 마치고 나머지 막사들의 전시를 둘러보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가 심각하게 책상을 짚고 우리를 노려보는 사람을 만나서 깜짝 놀랐다~ 미국과 영국이 다시 맞붙어서 제2의 독립전쟁이라 불리기도 하는 '1812년 전쟁'이 발발하고 2년이 지난 1814년 9월, 워싱턴DC를 불태운 영국군이 볼티모어 점령을 위해 육지와 바다로 동시에 접근하는 상황에서, 요새 지휘관인 조지 아미스테드(George Armistead) 소령이 방어전략을 수립하는 모습이란다. 그렇게 전시를 다 둘러보고 나왔는데, 파크레인저가 15개의 별과 줄이 있는 그 당시 성조기를 또 방문객들과 함께 펼쳐 들고 열심히 설명을 하고 계셨다. 요새의 방어벽 위와 바깥쪽으로도 둘러볼 수 있는 트레일이 있지만, 쌀쌀한 날씨 때문에 그만 비지터센터로 돌아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이 커다란 대포들만 잠깐 구경했는데, 이 곳은 볼티모어 항구의 한 가운데 위치한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1925년부터 국립공원청 관리로 넘어갔지만, 국가 비상시에는 다시 국방부가 통제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안경비대가 다시 주둔하기도 했단다. 비지터센터 전시실에는 국가(國歌, National Anthem)와 애국심 등에 대한 내용이 가득한데, 여기 맥헨리 요새가 현재의 미국 국가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의 노랫말이 만들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멀리 두 사람이 서있는 앞이 커다란 스크린인데, 정해진 시간마다 보여주는 짧은 영화의 내용인 즉슨... 위의 미영전쟁에서 영국이 요새를 공격하기 일주일 전에, 젊은 변호사인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는 다른 군장교와 함께 영국 해군에 억류된 민간인의 석방을 위해 비무장한 배를 타고 영국 함대의 본진으로 가서 협상을 벌인다. 협상이 잘 진행되어 인질은 풀려났지만, 영국은 볼티모어를 총공격할거라는 사실을 아는 그들의 배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게 된다. 그리고는 9월 13일 새벽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25시간 동안 무려 2천발에 가까운 폭탄과 로켓으로 맥헨리 요새를 공격했는데... 조국의 땅으로 퍼붓는 대영제국의 엄청난 화력을 안타깝게 적진에서 바라봐야만 했던 그가, 14일 아침에 맥헨리 요새에서 굳건히 계속 펄럭이는 성조기를 바라보는 가장 유명한 상징적인 그림이다. 그는 바로 가지고 있던 종이에 그 감동을 시(詩)로 쓰기 시작했고, 이틀 후 볼티모어로 돌아가서 4연으로 된 "맥헨리 요새의 방어(Defence of Fort McHenry)"를 완성해 신문에 기고한다. 그 후 사람들이 유명해진 그의 시를 영국에서 유래한 권주가 "천국의 아나크레온에게(To Anacreon in Heaven)"에 맞춰서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 노래가 1931년에 공식적으로 미국의 국가로 채택이 되었다. 영화에서는 사실적으로 망원경을 통해 국기를 확인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그럴만 한게 영국 공격선들이 요새를 방어하는 대포의 사거리 밖인 1.5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서 포격을 했고, 키 일행이 탄 배는 훨씬 더 뒤쪽의 영국 함대 본진에 있었기 때문에, 깃발이 아무리 컸다고 해도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을 거란다. 당시 실제로 휘날렸던 세로 30피트, 가로 34피트의 200년 이상 된 깃발은 아미스테드 소령의 후손이 보관하다가 스미소니언 재단에 기증을 해서, DC의 국립 미국사 박물관 암실에 전시가 된 모습은 여기를 클릭해 예전 방문기에서 보실 수 있다. 극장 바닥까지 이용해서 성조기의 물결을 만들며 영화가 끝난 후에, 아래와 같은 가사의 미국 국가 1절 노래가 나오면서 갑자기 커다란 스크린이 위로 올라가면, O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What so proudly we hail’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Whose broad stripes and bright stars through the perilous fight O’er the ramparts we watch’d were so gallantly streaming? And the rocket’s red glare, the bombs bursting in air, Gave proof through the night that our flag was still there, O say does that star-spangled banner yet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오, 그대는 보이는가, 이 새벽의 여명 사이로, 황혼의 미광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하였던 넓은 줄무늬와 밝은 별들이 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저기 성벽 위로 당당하게 휘날리고 있는 것이 보이는가? 로켓의 붉은 섬광과 창공에서 작렬하는 폭탄은 밤새도록 우리의 깃발이 그곳을 지켰음을 증명할지니 오, 말해주오. 성조기는 지금도 여전히 휘날리고 있는가? 자유로운 이들의 땅과, 용기 있는 자들의 고향에서! 비지터센터 창문 밖으로 포트 맥헨리와 그 위로 높이 게양되어 있는 성조기가 나타나는데, 아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가장 큰 크기의 개리슨플래그(Garrison Flag)가 제대로 펄럭이고 있었다면 감동백배였을 듯... 그리고, 이렇게 화면이 올라가면서 실물이 등장하는 연출은 우리 부부에게는 옛날 30일간의 캠핑여행에서 방문했던 세인트헬렌스(St. Helens) 화산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한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두가지가 국기와 국가라고 볼 때,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Stars and Stripes)는 그 탄생지를 어디라고 딱 정하기가 애매한 반면에, 국가는 볼티모어 포트맥헨리(Fort McHenry)라는 확실한 위치가 있으므로, 여기가 국가적인 숭배의 장소로 손색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덩달아 성조기도 잔뜩 쌓아놓고 팔던 기념품 가게를 잠깐 구경하고는 볼티모어의 다른 관광지를 찾아 이동을 했는데, 이로써 마침내 위기주부가 거주하는 DMV 지역에 있는 5개의 준국립공원(National Monument)을 모두 방문한게 되었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터스키기 기술학교를 설립한 흑인 교육자의 출생지인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준국립공원

터스키기 기술학교를 설립한 흑인 교육자의 출생지인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준국립공원

원래 여기는 남부 버지니아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 당일여행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순환 경로에서 벗어나 왕복 2시간 이상을 더 운전해야 했고, 사실상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출생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번째 방문지를 떠나며 여기를 가보기로 한 이유는... 어떤 흑인이길래 태어난 곳이 내셔널모뉴먼트(National Monument)로 지정되었는지 궁금함과 그의 이력에 등장하는 '터스키기(Tuskegee)'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또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은 5월초 봄날의 화창한 날씨도 한 몫을 했다~ 2021년 대륙횡단 이사를 하며 방문했던 내츄럴브리지(Natural Bridge)보다도 더 남쪽에, 정말 다시는 와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시골길을 한참 달려서 도착을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크게 잘 지어진 비지터센터며 다른 모든 시설이 아주 깔끔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그는 1896년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고, 사후 1940년 우표에 등장하고, 1942년 이름을 딴 수송선이 건조되고, 1946년 동전에 얼굴이 새겨졌으며, 출생 100주년이던 1956년에 여기 태어난 곳이 부커T워싱턴 내셔널모뉴먼트(Booker T. Washington National Monument)로 지정이 되었는데, 흑인으로서는 모두 최초의 기록이라 한다. 또한 우리가 다 아는 1935년작 심훈의 소설 에 그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한국의 농민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국립 공원에서는 월급 받는 레인저보다 자원봉사자들이 수다가 많은데, 저 여성분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아시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남부 버지니아 시골에 위치한, 옛날 흑인노예가 태어난 장소를 불쑥 혼자 찾아온 동양인이 신기할 법도...ㅎㅎ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끊고는 안내영화가 있냐고 물었더니, 위기주부만을 위해서 직접 영화를 틀어주셨다. 다 보고 궁금한 점은 나와서 또 물어보라는 말씀과 함께~ 그 제목이 이라서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 지를 좀 찾아봤더니,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 사람의 척도'라는 뜻으로 엘튼존의 노래, 시드니포이티어 자서전, 프랑스 영화 등의 제목이기도 한 굉장히 심오한 말인 듯 하다. 처음 입구 사진의 배너에도 씌여진 "Born Here, Freed Here"라는 말처럼, 그는 여기서 노예로 태어나 9살이던 1865년에 남북전쟁이 끝나며 자유인이 되었다. 그 후 새아버지와 가족은 웨스트버지니아 몰든(Malden)으로 이주하고, 그는 10살부터 염전과 광산에서 일을 하며 스스로 읽는 법을 깨우친다. (친아버지는 소유주였던 백인으로 추정된다고 함) 영화에도 나오는 장면으로, 연방군 장교가 마을에 와서 노예해방으로 이 시간부터 모든 흑인은 자유인이라는 성명을 낭독하는 모습의 조각이다. (다음 편에 소개할 첫번째 방문지가 바로 그 남북전쟁이 끝난 장소) 시간이 빠듯했지만 그래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담배농장은 한 번 둘러봐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야간학교를 다니며 배움의 열정은 점점 커져만 갔고, 버지니아 햄튼(Hampton)에 흑인들을 위한 고등교육 학교가 있다는 말만 듣고, 15살에 혼자 집을 떠나서 햄튼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모른채 동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500마일(800 km)을 마차를 얻어타거나 걸어서 Hampton Normal and Agricultural Institute에 도착했지만, 최소한의 학비를 낼 돈도 없었기 때문에 학교 청소일을 하며 3년만에 우등으로 졸업한다. (햄튼을 방문했던 여행기는 여기를 클릭) 사진 정면에 보이는 통나무집이 복원한 이 농장의 부엌 건물인데, 흙바닥의 여기서 그가 태어나고, 9살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모습이 영화에 나왔었다. 계속해서 그는 1875년에 웨스트버지니아로 돌아가 자신이 다녔던 야간학교에서 3년간 선생을 한 후, DC의 신학대에 입학하지만 1년만에 그만두고, 다시 햄튼의 모교로 돌아가서 강사와 사감을 맡아서 2년을 더 보내게 된다. 옆에 있던 다른 작은 통나무집은 당시의 창고 모습으로 복원을 해놓았다. 그러다가 햄튼 학교의 설립자였던 Samuel Armstrong이 당시 흑인들의 환경이 훨씬 더 열악했던 앨라배마(Alabama) 주에도 유사한 교육기관을 세우기로 하고, 그 책임자로 25살의 부커를 보낸 마을의 이름이 바로 '터스키기(Tuskegee)'였다. 농장에서 가장 큰 왼쪽 건물은 마굿간(horse barn)이었다고 하는데, 말은 볼 수가 없었고 대신에... 닭장에 커다란 닭들은 몇 마리가 있었다. (닭 키우는 연방 공무원 이야기를 보시려면 클릭) 1881년 독립기념일에 터스키기 보통학교(Tuskegee Normal School)가 개교하지만 땅도, 건물도, 선생님도, 돈도 없고 오직 부커와 30명의 학생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마를 만들어 벽돌을 직접 구워서 건물을 지으며 첫 해를 보냈지만, 1888년에는 400명의 학생과 여러 건물을 가진 터스키기 기술학교(Tuskegee Institute)로 발전하는데, 흑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술 교육과 함께 백인 사회에 동화될 수 있는 청결과 매너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교육자인 동시에 흑인 문학가로도 인정을 받는데, 자서전 "노예의 굴레를 벗고(Up From Slavery)"는 지금도 읽히며, 1895년 애틀란타에서 열린 목화 박람회에서의 명연설은 그를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이를 이용해 그는 의회와 대통령에게 흑인 정책에 대한 자문을 하고, 북부의 산업가들이 남부 흑인학교를 지원하도록 해서, 20세기 초까지 터스키기 졸업생들이 미국 남부 전역에 흑인 공립학교 5,000개를 설립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던 부커는 1915년 59세의 나이에 뉴욕에서 갑자기 쓰러져 터스키기의 자택에 실려와 숨을 거두고, 자신이 계속 교장을 맡았던 기술학교의 예배당 옆에 묻혔다. 지금은 터스키기 대학교가 된 캠퍼스에 남아있는 그의 묘지와 기념비, 자택과 박물관 등 초기 건물들은 1974년에 국립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이 되었는데, 미국의 수 많은 대학들 중에 캠퍼스 일부가 국립 공원으로 관리되는 유일한 경우라 한다. 또 그의 사후 일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흑인 전투기 조종사들을 일컫는 '터스키기 에어맨(Tuskegee Airmen)'들이 훈련을 받았던 학교 바로 옆의 비행장도 1998년에 별도의 국립사적지가 된다. 1939년 흑백분리 시절에 흑인들만을 위한 조종사 훈련시설이 거기 만들어진 이유도 터스키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군대의 극심한 차별을 극복한 흑인 조종사들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위기주부가 터스키기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 것도 그 때문으로 생각이 된다. 준국립공원을 나가면서 오두막이 함께 그려진 입구 표지판을 찍어봤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aliaferro Washington)은 당시 흑백평등의 즉각 실현은 불가하므로 교육을 통해서 흑인들의 경제적 자립과 사회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백인 우월체재를 받아들이는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흑인 교육자인 동시에 지도자이다. 그래서 나중에 급진적인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태도를 백인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소설 속 '톰 아저씨'같다며 엉클토미즘(Uncle Tomism)이라 비판하게 된다. 그의 사후 100년이 조금 못미쳐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지만, 과연 누구의 생각이 옳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중인 듯하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터스키기 기술학교를 설립한 흑인 교육자의 출생지인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준국립공원

터스키기 기술학교를 설립한 흑인 교육자의 출생지인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준국립공원

원래 여기는 남부 버지니아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 당일여행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순환 경로에서 벗어나 왕복 2시간 이상을 더 운전해야 했고, 사실상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출생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번째 방문지를 떠나며 여기를 가보기로 한 이유는... 어떤 흑인이길래 태어난 곳이 내셔널모뉴먼트(National Monument)로 지정되었는지 궁금함과 그의 이력에 등장하는 '터스키기(Tuskegee)'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또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은 5월초 봄날의 화창한 날씨도 한 몫을 했다~ 2021년 대륙횡단 이사를 하며 방문했던 내츄럴브리지(Natural Bridge)보다도 더 남쪽에, 정말 다시는 와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시골길을 한참 달려서 도착을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크게 잘 지어진 비지터센터며 다른 모든 시설이 아주 깔끔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그는 1896년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고, 사후 1940년 우표에 등장하고, 1942년 이름을 딴 수송선이 건조되고, 1946년 동전에 얼굴이 새겨졌으며, 출생 100주년이던 1956년에 여기 태어난 곳이 부커T워싱턴 내셔널모뉴먼트(Booker T. Washington National Monument)로 지정이 되었는데, 흑인으로서는 모두 최초의 기록이라 한다. 또한 우리가 다 아는 1935년작 심훈의 소설 에 그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한국의 농민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국립 공원에서는 월급 받는 레인저보다 자원봉사자들이 수다가 많은데, 저 여성분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아시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남부 버지니아 시골에 위치한, 옛날 흑인노예가 태어난 장소를 불쑥 혼자 찾아온 동양인이 신기할 법도...ㅎㅎ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끊고는 안내영화가 있냐고 물었더니, 위기주부만을 위해서 직접 영화를 틀어주셨다. 다 보고 궁금한 점은 나와서 또 물어보라는 말씀과 함께~ 그 제목이 이라서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 지를 좀 찾아봤더니,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 사람의 척도'라는 뜻으로 엘튼존의 노래, 시드니포이티어 자서전, 프랑스 영화 등의 제목이기도 한 굉장히 심오한 말인 듯 하다. 처음 입구 사진의 배너에도 씌여진 "Born Here, Freed Here"라는 말처럼, 그는 여기서 노예로 태어나 9살이던 1865년에 남북전쟁이 끝나며 자유인이 되었다. 그 후 새아버지와 가족은 웨스트버지니아 몰든(Malden)으로 이주하고, 그는 10살부터 염전과 광산에서 일을 하며 스스로 읽는 법을 깨우친다. (친아버지는 소유주였던 백인으로 추정된다고 함) 영화에도 나오는 장면으로, 연방군 장교가 마을에 와서 노예해방으로 이 시간부터 모든 흑인은 자유인이라는 성명을 낭독하는 모습의 조각이다. (다음 편에 소개할 첫번째 방문지가 바로 그 남북전쟁이 끝난 장소) 시간이 빠듯했지만 그래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담배농장은 한 번 둘러봐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야간학교를 다니며 배움의 열정은 점점 커져만 갔고, 버지니아 햄튼(Hampton)에 흑인들을 위한 고등교육 학교가 있다는 말만 듣고, 15살에 혼자 집을 떠나서 햄튼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모른채 동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500마일(800 km)을 마차를 얻어타거나 걸어서 Hampton Normal and Agricultural Institute에 도착했지만, 최소한의 학비를 낼 돈도 없었기 때문에 학교 청소일을 하며 3년만에 우등으로 졸업한다. (햄튼을 방문했던 여행기는 여기를 클릭) 사진 정면에 보이는 통나무집이 복원한 이 농장의 부엌 건물인데, 흙바닥의 여기서 그가 태어나고, 9살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모습이 영화에 나왔었다. 계속해서 그는 1875년에 웨스트버지니아로 돌아가 자신이 다녔던 야간학교에서 3년간 선생을 한 후, DC의 신학대에 입학하지만 1년만에 그만두고, 다시 햄튼의 모교로 돌아가서 강사와 사감을 맡아서 2년을 더 보내게 된다. 옆에 있던 다른 작은 통나무집은 당시의 창고 모습으로 복원을 해놓았다. 그러다가 햄튼 학교의 설립자였던 Samuel Armstrong이 당시 흑인들의 환경이 훨씬 더 열악했던 앨라배마(Alabama) 주에도 유사한 교육기관을 세우기로 하고, 그 책임자로 25살의 부커를 보낸 마을의 이름이 바로 '터스키기(Tuskegee)'였다. 농장에서 가장 큰 왼쪽 건물은 마굿간(horse barn)이었다고 하는데, 말은 볼 수가 없었고 대신에... 닭장에 커다란 닭들은 몇 마리가 있었다. (닭 키우는 연방 공무원 이야기를 보시려면 클릭) 1881년 독립기념일에 터스키기 보통학교(Tuskegee Normal School)가 개교하지만 땅도, 건물도, 선생님도, 돈도 없고 오직 부커와 30명의 학생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마를 만들어 벽돌을 직접 구워서 건물을 지으며 첫 해를 보냈지만, 1888년에는 400명의 학생과 여러 건물을 가진 터스키기 기술학교(Tuskegee Institute)로 발전하는데, 흑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술 교육과 함께 백인 사회에 동화될 수 있는 청결과 매너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교육자인 동시에 흑인 문학가로도 인정을 받는데, 자서전 "노예의 굴레를 벗고(Up From Slavery)"는 지금도 읽히며, 1895년 애틀란타에서 열린 목화 박람회에서의 명연설은 그를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이를 이용해 그는 의회와 대통령에게 흑인 정책에 대한 자문을 하고, 북부의 산업가들이 남부 흑인학교를 지원하도록 해서, 20세기 초까지 터스키기 졸업생들이 미국 남부 전역에 흑인 공립학교 5,000개를 설립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던 부커는 1915년 59세의 나이에 뉴욕에서 갑자기 쓰러져 터스키기의 자택에 실려와 숨을 거두고, 자신이 계속 교장을 맡았던 기술학교의 예배당 옆에 묻혔다. 지금은 터스키기 대학교가 된 캠퍼스에 남아있는 그의 묘지와 기념비, 자택과 박물관 등 초기 건물들은 1974년에 국립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이 되었는데, 미국의 수 많은 대학들 중에 캠퍼스 일부가 국립 공원으로 관리되는 유일한 경우라 한다. 또 그의 사후 일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흑인 전투기 조종사들을 일컫는 '터스키기 에어맨(Tuskegee Airmen)'들이 훈련을 받았던 학교 바로 옆의 비행장도 1998년에 별도의 국립사적지가 된다. 1939년 흑백분리 시절에 흑인들만을 위한 조종사 훈련시설이 거기 만들어진 이유도 터스키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군대의 극심한 차별을 극복한 흑인 조종사들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위기주부가 터스키기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 것도 그 때문으로 생각이 된다. 준국립공원을 나가면서 오두막이 함께 그려진 입구 표지판을 찍어봤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aliaferro Washington)은 당시 흑백평등의 즉각 실현은 불가하므로 교육을 통해서 흑인들의 경제적 자립과 사회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백인 우월체재를 받아들이는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흑인 교육자인 동시에 지도자이다. 그래서 나중에 급진적인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태도를 백인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소설 속 '톰 아저씨'같다며 엉클토미즘(Uncle Tomism)이라 비판하게 된다. 그의 사후 100년이 조금 못미쳐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지만, 과연 누구의 생각이 옳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중인 듯하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버지니아 햄프턴의 '자유의 요새'라 불리는 포트먼로 준국립공원(Fort Monroe National Monument)

반응형 2016년에 미국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3부작 포스팅의 두번째로 준국립공원(準國立公園)이라 할 수 있는 당시 121개의 내셔널모뉴먼트(National Monument)에 대해 정리한 포스팅을 여기를 클릭해 보실 수 있다. 지난 10월에 바이든 대통령이 콜로라도의 육군 산악훈련소였던 곳을 Camp Hale - Continental Divide National Monument로 지정하면서 지금은 130개가 되었는데, 이처럼 최근에 추가된 곳들은 해제된 군부대나 연방정부가 새로 취득한 역사적인 건물 등이 많다. 지난 9월 남부 버지니아 1박2일 여행의 둘쨋날 아침에 잠깐 구경했던, 이제 소개하는 내셔널모뉴먼트도 한 때 미국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요새가 NPS 소관의 공원으로 지정된 경우이다. 숙박했던 버지니아비치(Virginia Beach)에서 30여분을 달려서 햄프턴(Hampton) 마을의 도서관에 도착을 했는데, 여기가 포트먼로 내셔널모뉴먼트(Fort Monroe National Monument)의 방문자 및 교육 센터로 사용되는 곳이지만... 우리가 방문한 월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았다. 흑흑~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포트 먼로(Fort Monroe)는 2011년 9월까지 군대가 주둔하던 요새로 사용되다가 해제된 후에, 바로 11월에 당시 오바마의 대통령령에 의해 준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신호등까지 잘 만들어져 있는 오래된 요새의 정문으로 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가 보는데, 이 곳은 아래의 항공사진을 가져와서 보여드리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바닷가 모래톱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만든 해자(垓子, moat)로 둘러싸인 기하학적인 성벽의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이 요새는 미영전쟁 이후인 1819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834년에야 완공되었고, 제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James Monroe)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우리가 들어간 정문이 요새의 왼편에 보이는 해자를 건너는 가장 긴 다리인데, 이렇게 당시로는 난공불락의 대단한 요새를 여기에 만든 이유는 나중에 지도로 설명을 드릴 예정이다. 요새 안으로 들어와 차를 몰고 미리 예습해서 찾아놓은 케이스메이트 뮤지엄(Casemate Museum), 즉 '포대(砲臺) 박물관'을 찾아왔지만 매한가지로 문을 닫았다... 그래서 입구에 쌓아놓은 이 대포알 피라미드만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정작 이 잘 만들어 놓은 큰 요새에서 실제 전투가 벌어져서 대포를 쏜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성곽 모서리에 돌출되게 만들어 놓은 보루(堡壘)를 영어로 'bastion'이라 한다는데, 여기 워킹투어 4번은 제일 높은 깃대를 세워놓아서 Flagstaff Bastion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번 포스팅은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나오는 듯...^^ 경사로를 따라 성곽 위로 올라오면 앞바다의 지도가 안내판에 그려져 있는데, 남쪽으로 바라보는 것이라서 지도도 위쪽이 남쪽이다. 요새가 있는 곳은 제임스 강(James River)이 체사피크 만(Chesapeake Bay)과 만나는 입구로, 여기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은 햄프턴로드(Hampton Roads)라 불리며 식민지 시절부터 중요한 항해로였다. 안내판에 미국의 해군기지로 유명한 노퍽(Norfolk)이라는 지명도 보이는데, 그래서 아래 구글지도를 따로 준비했다. 작은 사진들은 모두 올해 초에 찍힌 구글어스 위성사진으로, CVN 일련번호로 알 수 있듯이 가장 최신의 미국 항공모함 3척이 여기 모여있다. 마지막 10번째 니미츠급 항공모함인 오른쪽 USS George H.W. Bush는 노퍽 해군기지에서 보수중에 있고, 올해부터 작전에 투입된 차세대 포드급(Ford class) 항공모함인 왼쪽 아래 USS Gerald R. Ford와, 그 위에 제작중인 같은 급의 USS John F. Kennedy의 두 척은 뉴포트뉴스(Newport News)의 해군 조선소에 나란히 정박해 있다. 이것만 봐도 빨간 마커로 표시된 Fort Monroe가 지키고 있는 입구가 식민지 시절부터 지금 21세기까지 미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인지를 잘 설명해준다. 그렇기는 한데... 요새의 성벽 위에서 딱히 더 구경할 것은 없어서, 괜히 미안해 했던 가이드의 모습이다. 이 곳이 남부 버지니아에 속하니까,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여기 주둔하던 연방군은 적군에 포위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남군은 감히 이 철통방어의 요새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북군은 우수한 해군력의 지원을 받아 이 요새를 거점으로 노퍽 등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이 '자유의 요새(Freedom's Fortress)'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따로 있는데, 아래 비지터센터의 내부 사진을 한 장 가져와서 보여드리며 설명한다. 남북전쟁이 시작된 직후에 인근에 살던 흑인노예 3명이 이 요새로 목숨을 걸고 탈출을 했고, 당시 미국 연방법은 도망친 노예는 잡아서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변호사 출신의 군인이었던 Benjamin Butler 사령관이 판단하기를... 버지니아는 미연방에서 탈퇴를 했으니 이 3명을 연방법에 따라 주인에게 돌려줄 의무가 없고, 남부가 노예들을 연방과의 전쟁에 이용하고 있으니 이 3명은 적군에게서 빼앗은(제발로 걸어왔지만^^) '전리품(contraband)'이라 선언하고는 안전하게 요새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게 된다. 이 소문이 퍼져 다른 노예들도 이리로 탈출을 해와서 '자유의 요새'로 불리게 되고, 버틀러 소장의 이러한 법해석이 나중에 링컨이 남부의 노예해방(Emancipation)을 선언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여기처럼 1800년대에 벽돌로 지은 대규모 요새가 미국의 공원으로 관리되는 곳들이 이외에도 많이 있고, 그 중에 한 곳은 최고 등급(?)인 내셔널파크(National Park)로 지정되어 있는데 아직 못 가봤다! 여기를 클릭하면 그 국립공원에 가장 가까이 갔었던 여행기와 함께, 글의 제일 마지막에서 그 곳의 이름을 확인하실 수 있다. "언제 가볼 수 있을까?" 이 정도로 요새 안쪽의 구경은 마치고, 반대쪽 동문으로 나가기 위해서 파란불을 기다렸다. 모든 게이트가 차 한대만 지나갈 수 있는 폭이라서, 교차신호로 운영을 하기 때문에 중간에 절대 설 수는 없다. 요새의 바깥쪽도 저 건물을 포함해서 공원에 속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성조기 장식을 한 저 집은 뭘 하는 곳일까? 맞은편으로는 피싱피어(fishing pier)가 만들어져 있어서 아내가 끝까지 걸어가보고 있는데, 말 그대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이 피어를 지나서 조금 더 걸어간 바닷가에 또 중요한 이정표가 하나 있는데, 거기까지 가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관광청에서 가져온 사진으로 대신 보여드린다. 앞서 미국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에 관해 말씀 드렸는데, 사실 그 미국 흑인노예의 역사가 시작된 곳도 이 바닷가라고 한다. 식민지 시절이던 1619년에 영국 사략선(privateer)이 서인도 제도로 가던 포르투갈 노예선에서 뺏은 흑인노예 약 20명을 여기 포인트컴포트(Point Comfort)에서 식량과 교환했다는 기록에 따라서, 그들이 영국의 버지니아 식민지에 최초로 발을 디딘 아프리카 흑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야전상의를 입고 낚시를 하시는 분 너머로 보이는 올드 포인트컴포트 등대(Old Point Comfort Lighthouse)는 1802년에 만들어져 지금도 불을 밝히고 있어서, 체사피크베이(Chesapeake Bay)에서 운영되고 있는 등대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 한다. 이렇게 오래간만에 준국립공원(National Monument) 한 곳을 간단히 둘러보았는데, 전날 국가기념물(National Memorial), 국립해안(National Seashore), 국립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의 3곳을 방문했으니, 1박2일 여행에서 벌써 4번째 NPS official unit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 바로 이어지는 다음 방문지는 또 국립역사공원(National Historical Park)이었으니까, 1박2일만에 유형이 다른 총 5곳을 골고루 이 리스트(보시려면 클릭!)에 추가하는 기록을 세웠던 여행이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