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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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언덕에 있는 알링턴하우스 겸 로버트 리 기념관(Arlington House, The Robert E. Lee Memorial)

국립묘지 언덕에 있는 알링턴하우스 겸 로버트 리 기념관(Arlington House, The Robert E. Lee Memorial)

1759년에 26세의 조지 워싱턴은 한 살 많은 과부 마사 커스티스(Martha Custis)와 결혼을 하는데, 그녀의 전남편은 버지니아 최고의 부자였으나 일찍 급사를 했다.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아내가 낳은 전남편의 아들과 딸을 키웠지만, 딸은 17세에 간질로 사망하고 결혼한 아들도 1781년 요크타운 전투 직후에 4명의 자녀를 남기고 병사한다. 그래서 워싱턴 부부는 그들 중 어린 손녀와 손자를 데려와 직접 키우는데,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관저에서 함께 살았으며, 나중에는 유산을 상속해주기 위해 법적으로 딸과 아들로 입양을 한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케네디 대통령 무덤을 둘러본 후에 좁은 산책로인 Custis Walk를 따라 언덕을 오르니, 꼭대기에 누리끼끼한 색깔의 그리스 신전같은 건물이 나온다. 바로 위에 설명한 워싱턴의 양아들인 조지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가 자신이 물려받은 플랜테이션에, 워싱턴을 기리는 의미로 웅장하게 만든 알링턴 하우스(Arlington House)로 1802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1818년에야 완공되었다. 1789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The Washington Family"라는 이 그림에서 왼쪽의 남자 어린이가 조지 커스티스인데, 어릴 때는 여러모로 워싱턴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한 때는 재혼한 친어머니 집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는 키워주신 할아버지 워싱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잊지 않았기에, 성인이 되어서 땅과 재산을 물려받은 동시에 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뭔가 좀 이상한게, 거대한 기둥이 나무계단 위에 세워져 있고, 그 바닥도 빨간 벽돌이다... 당시 의사당을 설계한 최고의 건축가를 고용해서 야심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는 땅과 노예만 많지 현금은 없었고 1812년 전쟁으로 물자부족까지 겹치면서, 결국은 벽돌로 지은 건물의 기둥과 벽면을 매끈하게 바른 후에 대리석처럼 보이게 칠을 한 것이란다. 뒤돌아 동쪽 아래로 내려다 보면, 국립묘지의 정문에서 이어지는 알링턴 기념교(Arlington Memorial Bridge)로 포토맥 강을 건너서 바로 링컨 기념관이 나오고, 오른편으로는 워싱턴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편 가족실(Family Parlor)의 좌우 벽난로 위에는 이 집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부부의 초상화가 각각 걸려있다. 왼쪽이 조지 커스티스의 유일하게 장성한 자손으로 알링턴 플랜테이션을 물려받은 딸인 메리 커스티스(Mary Anna Randolph Custis)이고, 1831년에 이 집에서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 오른쪽의 남편이 바로...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로 1838년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그의 아버지도 독립전쟁에 참전했었고 1799년의 워싱턴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할만큼 이미 명문가의 자제였는데, 법적으로 치자면 워싱턴 대통령의 손녀 사위가 후에 남북전쟁에서 남군을 이끌었던 리(Lee) 장군인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이라서 결혼 후 대부분 떠돌며 살았지만, 1857년에 장인이 사망하자 유산 집행을 위해 여기로 돌아온다. 결국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버지니아가 연방을 탈퇴하자, Lee는 이 집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남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부부가 함께 리치먼드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식탁이 차려진 다이닝룸(Dining Room)의 벽에는 조지 커스티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그는 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인 워싱턴 대통령의 소지품 보존과 기념사업 등을 위해 노력했고, 역사 희곡과 책을 쓰기도 하는 등 말년까지 활발히 활동했단다. 신전같은 외관과 달리 내부는 거주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침실과 주방 등의 모습도 옛날 생활상 그대로 복원을 해 놓았다. 실내 투어코스의 마지막인 모닝룸(Morning Room)에 꾸며진 스튜디오인데, 조지 커스티스가 직접 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단다. 여기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 통로의 벽에 국립공원청이 관리하는 이 집의 공식 명칭인 알링턴 하우스, 로버트 리 기념관(Arlington House, The Robert E. Lee Memorial) 명칭이 붙어있다. 박물관 전시는 노예들의 숙소를 복원한 별도의 뒷채에 작게 만들어져 있지만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공원 홈페이지에서 사진과 그림만 몇 장 가져와서 설명을 드린다. 리 부부가 떠난 후에 이 언덕은 수도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바로 연방군이 점령을 했고, 농장에는 자유 흑인들의 정착촌과 흑인 병사들의 훈련을 위한 군부대가 임의로 설치된다. 결국 위 사진이 찍힌 1864년에 세금체납을 이유로 공식적으로 연방정부가 이 땅을 몰수한 후에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북군 병사들을 여기 매장하기 시작해서, 지금의 알링턴 국립묘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후 1877년에 부부의 장남인 조지 리(George Washington Custis Lee)가 소송을 해서, 몰수가 부당했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내었지만 이미 농장은 묘지로 바뀌어 있었고, 어차피 현금 보상을 원했던 그는 결국 15만불에 다시 모든 건물과 땅을 연방정부에 매각을 했다. 지난 5월초에 직접 방문했던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에서 남군의 항복문서에 서명한 리(Lee)가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Grant)와 악수하는 모습의 "Let Us Have Peace" 그림이다. 부하 장군들 중의 일부가 후퇴가 불가하니 뿔뿔이 흩어져서 게릴라전을 계속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국가가 하나로 회복되는데 수 년이 더 걸리는 무의미한 짓이라며 거부하고 깨끗한 항복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남북의 평화와 재결합을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한 때 미국에 맞서 싸웠던 인물을 기리는 유일한 연방정부 지원의 국가기념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버지니아 렉싱턴(Lexington)의 워싱턴 대학교 총장이 되었고, 위 사진의 1869년에 대통령이 된 그랜트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하고 이듬해 사망해서, 그의 사후에 Wasington and Lee University로 이름이 변경된 대학의 예배당 옆 묘지에 묻혔다. 남부연맹 가담자들은 전후 미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사면선서(Amnesty Oath)를 제출해야만 복권이 되었는데, 리도 당연히 서명해서 우편으로 보냈지만 남부에 반감을 가진 어떤 이가 고의로 누락했단다. 그래서 이 집은 1925년부터 문화재로 관리는 되었지만 그냥 Custis-Lee Mansion으로 불리다가, 1972년에 문서보관소에서 리의 사면선서가 발견된 이후에야 공식적으로 시민권이 회복되고 현재와 같이 그의 이름이 들어간 메모리얼이 될 수 있었단다. 맨션의 남쪽에 있는 정원을 지나면 나오는 남북전쟁 무명용사묘를 잠깐 구경하고는 다시 언덕을 걸어 내려가 알링턴 국립묘지 구경을 마저 했었다. 옛날 한국에서는 청바지 브랜드로, 또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있는 나무 이름으로 '리(Lee)'가 원래 미국에도 있는 성씨라는 것을 알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 동안 남북전쟁 관련 포스팅에 수 없이 등장했던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의 국립 기념관을 마침내 둘러봤고, 이로써 집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 NPS Official Unit들은 빠짐없이 모두 방문한 것이 되었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워싱턴이 항복했던 포트너세서티(Fort Necessity)와 미국 최초의 횡단도로인 내셔널로드(National Road)

워싱턴이 항복했던 포트너세서티(Fort Necessity)와 미국 최초의 횡단도로인 내셔널로드(National Road)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말하는게 맞는데, 그가 전쟁에서 항복을 한 적이 있었다고? 도대체 워싱턴이 언제 어디서, 또 누구에게 항복을 했었는지 아래에서 알려드리고, 또 1800년대 초에 미국의 첫번째 전국적인 국책사업으로 건설되었던 횡단도로인 내셔널로드(National Road)에 대해서도 소개해드린다. 물론 아스팔트 포장의 자동차 도로가 아니라 자갈을 깐 마찻길이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웃 펜실베니아 주의 별볼일 없는 국립공원들 돌아보기의 두번째 목적지도, 역시 이름만 봐서는 어떤 전쟁의 누구와 관련된 곳인지 짐작이 어려운 포트너세서티 국립전쟁터(Fort Necessity National Battlefield)인데, 간판 아래쪽에 목책을 세워놓은 것이 특이해서 눈에 띈다. 이번에는 다른 차들도 4~5대 정도 있던 주차장 바로 옆에 비지터센터를 아주 크게 잘 만들어 놓았는데, 국립공원청 로고 옆으로 공원 이름말고도 뭔가를 길게 적어 놓았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이 곳은 전편에 잠깐 언급했던 '내셔널로드'에 관해 알려주는 National Road Heritage Corridor 교육센터도 겸한다는 문구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실내에서 처음 마주치는 얼굴은 바로... 환영사 옆에 커다랗게 그려진 조지워싱턴으로, 그는 21세에 버지니아 민병대 소령이 되어 3년이나 연달아서, 자신이 살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여기까지 원정을 왔기 때문이다. (중앙의 코걸이를 한 인형은 워싱턴이 아니고 이 지역의 원주민) 당시는 미국이 독립 전인 1750년대로 프랑스와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서로 영토확장을 하던 시기이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기간의 지도를 위키에서 가져와 보여드리는데, 제일 왼쪽 아래에 Ft. Necessity와 워싱턴의 이름이 보인다. 북쪽에서 남하하는 프랑스와 서쪽으로 확장하는 영국의 분쟁이 시작된 곳이 오하이오 강(Ohio River) 유역으로, 1753년 겨울에 버지니아 총독이 워싱턴을 처음 메신저로 여기 보내서 프랑스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는 거절하고 지금의 피츠버그에 포트듀케인(Fort Duquesne)을 건설하자, 이듬해 1754년 봄에 다시 워싱턴에게 이번에는 군대를 끌고가서 프랑스를 쫓아낼 것을 명령하게 된다. 5월 28일에 워싱턴의 민병대가 약 30명의 프랑스 정찰부대와 마주쳐, 지휘관을 포함해 10여명을 죽이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곧 듀케인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대규모 프랑스 병력이 보복공격을 해올 것을 예상해서, 초원에 목책을 세워 방어를 위한 요새를 만들고 이름을 Fort Necessity라 지었단다. 워싱턴이 서있는 옆문으로 나가서 비지터센터 뒤쪽의 초원으로 조금 걸어가면 복원해놓은 그 '필수 요새'를 직접 볼 수 있다. 둥근 요새 주변으로 흙을 쌓아서 참호도 만들고, 작은 대포도 설치를 했다는 기록대로 잘 복원을 해놓았다. 요새를 먼저 둘러본 후에 안내영화를 보기 위해서 비지터센터로 돌아갔는데, 이런 역사 공원에서는 영화를 꼭 보는 것이 좋다. 여기 영화는 최근에 새로 제작을 했는지 화질도 좋아서 아주 볼만했다. 첫번째 전투가 있고 한 달여가 지난 7월 3일에 이 요새를 지키던 워싱턴의 부대 약 400명이 프랑스군 600명과 인디언 100명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극장 앞에 만들어 놓은 디오라마인데, 정말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그 날 저녁 8시까지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워싱턴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프랑스 지휘관에게 항복을 하고, 다음 날 남은 병력이 부상자들을 데리고 버지니아로 철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대로 오하이오 강 유역을 프랑스에 내줄 수 없던 영국은, 이듬해 1755년 6월에 본토에서 파병된 에드워드 브래독(Edward Braddock) 장군이 이끄는 정규군 2,000명으로 다시 듀케인 요새를 공격하러 오는데, 이 때도 워싱턴이 참모로 원정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국립공원 브로셔에도 인쇄된 이 그림처럼 프랑스와 인디언의 매복 공격으로 브래독 장군까지 치명상을 입으며 엄청난 피해를 보고, 결국 몇일 후 사망한 장군을 땅에 묻고 500명 정도만 남은 패잔병을 이끌고 후퇴하는 것은 또 워싱턴의 몫이었다나... 이렇게 처음에는 프랑스가 이기는 듯 했지만, 유럽의 '7년 전쟁'과 맞물려서 결국은 영국이 프렌치 인디언 전쟁을 승리해서 오하이오 강 유역은 영국의 식민지로 굳어진다. 그리고 약 20년 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서 영국과 싸운 독립전쟁의 승리로 탄생한 신생국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워싱턴이 이 곳을 다시 방문했다고 한다. 그 때 워싱턴을 만나서 제대로 된 동서를 연결하는 마찻길을 빨리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전편에서 소개한 앨버트 갤러틴(Albert Gallatin)으로 왼쪽에 그의 초상화가 보인다. 1806년 제퍼슨 대통령 시기에 건설법안이 통과되지만, 메릴랜드 컴벌랜드(Cumberland)부터 서쪽으로 폭 20미터로 산을 깍고 숲을 베고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놓는 도로공사는 1811년에야 시작된다. 산악지역을 통과해서 휠링(Wheeling)까지 가장 힘든 첫번째 구간이 7년만에 완공되어 부분개통을 하고, 아래 지도의 총 600마일 구간은 1837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포트네세서티가 있는 곳이 펜실베니아 유니언타운(Uniontown) 조금 아래쪽이고, 1850년대까지는 미국의 동서를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유지보수를 위해 각 지역이 구간별로 통행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내셔널파이크(National Pike)'로 불리기도 했다. 도로건설 과정은 물론 당시의 모습도 많이 전시를 해놓았는데, 마지막에 보여드릴 여행객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는 태번(tavern)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저 분들이 계속 뭐라고 떠느는 목소리가 나옴) 그러나 곧 철도가 화물과 사람을 모두 더 저렴하게 운송하는 수단이 되면서 내셔널로드는 통행량이 급감하며 잊혀져 가다가... 1900년대 자동차가 등장하며 내셔널 하이웨이(National Highway)로 부활해서 국도 40번(US Route 40)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고, 1950년대 고속도로망이 만들어지면서 펜실베니아 워싱턴(Washington)부터 서쪽으로는 인터스테이트 70번(Interstate 70)이 그 경로를 따라 건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원 입구쪽에 있는 빨간 벽돌집을 잠깐 구경했는데, 1828년경에 문을 열었던 마운트워싱턴 태번(Mount Washington Tavern)으로 내셔널로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던 건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바로 옆으로 조지 워싱턴이 3번이나 왔었던, 그 중에 2번은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갔던 길이 국도 40번으로 바뀌어 21세기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근처 도로변에 전사한 브래독 장군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기념비도 만들어져 있다고 해서 가볼까 했지만, 이 날 6곳을 둘러보는 스케쥴이 아주 빡빡했기 때문에 바로 다음 장소로 또 이동을 했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워싱턴이 항복했던 포트너세서티(Fort Necessity)와 미국 최초의 횡단도로인 내셔널로드(National Road)

워싱턴이 항복했던 포트너세서티(Fort Necessity)와 미국 최초의 횡단도로인 내셔널로드(National Road)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말하는게 맞는데, 그가 전쟁에서 항복을 한 적이 있었다고? 도대체 워싱턴이 언제 어디서, 또 누구에게 항복을 했었는지 아래에서 알려드리고, 또 1800년대 초에 미국의 첫번째 전국적인 국책사업으로 건설되었던 횡단도로인 내셔널로드(National Road)에 대해서도 소개해드린다. 물론 아스팔트 포장의 자동차 도로가 아니라 자갈을 깐 마찻길이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웃 펜실베니아 주의 별볼일 없는 국립공원들 돌아보기의 두번째 목적지도, 역시 이름만 봐서는 어떤 전쟁의 누구와 관련된 곳인지 짐작이 어려운 포트너세서티 국립전쟁터(Fort Necessity National Battlefield)인데, 간판 아래쪽에 목책을 세워놓은 것이 특이해서 눈에 띈다. 이번에는 다른 차들도 4~5대 정도 있던 주차장 바로 옆에 비지터센터를 아주 크게 잘 만들어 놓았는데, 국립공원청 로고 옆으로 공원 이름말고도 뭔가를 길게 적어 놓았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이 곳은 전편에 잠깐 언급했던 '내셔널로드'에 관해 알려주는 National Road Heritage Corridor 교육센터도 겸한다는 문구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실내에서 처음 마주치는 얼굴은 바로... 환영사 옆에 커다랗게 그려진 조지워싱턴으로, 그는 21세에 버지니아 민병대 소령이 되어 3년이나 연달아서, 자신이 살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여기까지 원정을 왔기 때문이다. (중앙의 코걸이를 한 인형은 워싱턴이 아니고 이 지역의 원주민) 당시는 미국이 독립 전인 1750년대로 프랑스와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서로 영토확장을 하던 시기이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기간의 지도를 위키에서 가져와 보여드리는데, 제일 왼쪽 아래에 Ft. Necessity와 워싱턴의 이름이 보인다. 북쪽에서 남하하는 프랑스와 서쪽으로 확장하는 영국의 분쟁이 시작된 곳이 오하이오 강(Ohio River) 유역으로, 1753년 겨울에 버지니아 총독이 워싱턴을 처음 메신저로 여기 보내서 프랑스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는 거절하고 지금의 피츠버그에 포트듀케인(Fort Duquesne)을 건설하자, 이듬해 1754년 봄에 다시 워싱턴에게 이번에는 군대를 끌고가서 프랑스를 쫓아낼 것을 명령하게 된다. 5월 28일에 워싱턴의 민병대가 약 30명의 프랑스 정찰부대와 마주쳐, 지휘관을 포함해 10여명을 죽이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곧 듀케인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대규모 프랑스 병력이 보복공격을 해올 것을 예상해서, 초원에 목책을 세워 방어를 위한 요새를 만들고 이름을 Fort Necessity라 지었단다. 워싱턴이 서있는 옆문으로 나가서 비지터센터 뒤쪽의 초원으로 조금 걸어가면 복원해놓은 그 '필수 요새'를 직접 볼 수 있다. 둥근 요새 주변으로 흙을 쌓아서 참호도 만들고, 작은 대포도 설치를 했다는 기록대로 잘 복원을 해놓았다. 요새를 먼저 둘러본 후에 안내영화를 보기 위해서 비지터센터로 돌아갔는데, 이런 역사 공원에서는 영화를 꼭 보는 것이 좋다. 여기 영화는 최근에 새로 제작을 했는지 화질도 좋아서 아주 볼만했다. 첫번째 전투가 있고 한 달여가 지난 7월 3일에 이 요새를 지키던 워싱턴의 부대 약 400명이 프랑스군 600명과 인디언 100명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극장 앞에 만들어 놓은 디오라마인데, 정말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그 날 저녁 8시까지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워싱턴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프랑스 지휘관에게 항복을 하고, 다음 날 남은 병력이 부상자들을 데리고 버지니아로 철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대로 오하이오 강 유역을 프랑스에 내줄 수 없던 영국은, 이듬해 1755년 6월에 본토에서 파병된 에드워드 브래독(Edward Braddock) 장군이 이끄는 정규군 2,000명으로 다시 듀케인 요새를 공격하러 오는데, 이 때도 워싱턴이 참모로 원정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국립공원 브로셔에도 인쇄된 이 그림처럼 프랑스와 인디언의 매복 공격으로 브래독 장군까지 치명상을 입으며 엄청난 피해를 보고, 결국 몇일 후 사망한 장군을 땅에 묻고 500명 정도만 남은 패잔병을 이끌고 후퇴하는 것은 또 워싱턴의 몫이었다나... 이렇게 처음에는 프랑스가 이기는 듯 했지만, 유럽의 '7년 전쟁'과 맞물려서 결국은 영국이 프렌치 인디언 전쟁을 승리해서 오하이오 강 유역은 영국의 식민지로 굳어진다. 그리고 약 20년 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서 영국과 싸운 독립전쟁의 승리로 탄생한 신생국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워싱턴이 이 곳을 다시 방문했다고 한다. 그 때 워싱턴을 만나서 제대로 된 동서를 연결하는 마찻길을 빨리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전편에서 소개한 앨버트 갤러틴(Albert Gallatin)으로 왼쪽에 그의 초상화가 보인다. 1806년 제퍼슨 대통령 시기에 건설법안이 통과되지만, 메릴랜드 컴벌랜드(Cumberland)부터 서쪽으로 폭 20미터로 산을 깍고 숲을 베고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놓는 도로공사는 1811년에야 시작된다. 산악지역을 통과해서 휠링(Wheeling)까지 가장 힘든 첫번째 구간이 7년만에 완공되어 부분개통을 하고, 아래 지도의 총 600마일 구간은 1837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포트네세서티가 있는 곳이 펜실베니아 유니언타운(Uniontown) 조금 아래쪽이고, 1850년대까지는 미국의 동서를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유지보수를 위해 각 지역이 구간별로 통행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내셔널파이크(National Pike)'로 불리기도 했다. 도로건설 과정은 물론 당시의 모습도 많이 전시를 해놓았는데, 마지막에 보여드릴 여행객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하는 태번(tavern)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도록 해놓았다. (저 분들이 계속 뭐라고 떠느는 목소리가 나옴) 그러나 곧 철도가 화물과 사람을 모두 더 저렴하게 운송하는 수단이 되면서 내셔널로드는 통행량이 급감하며 잊혀져 가다가... 1900년대 자동차가 등장하며 내셔널 하이웨이(National Highway)로 부활해서 국도 40번(US Route 40)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고, 1950년대 고속도로망이 만들어지면서 펜실베니아 워싱턴(Washington)부터 서쪽으로는 인터스테이트 70번(Interstate 70)이 그 경로를 따라 건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원 입구쪽에 있는 빨간 벽돌집을 잠깐 구경했는데, 1828년경에 문을 열었던 마운트워싱턴 태번(Mount Washington Tavern)으로 내셔널로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던 건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바로 옆으로 조지 워싱턴이 3번이나 왔었던, 그 중에 2번은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갔던 길이 국도 40번으로 바뀌어 21세기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근처 도로변에 전사한 브래독 장군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기념비도 만들어져 있다고 해서 가볼까 했지만, 이 날 6곳을 둘러보는 스케쥴이 아주 빡빡했기 때문에 바로 다음 장소로 또 이동을 했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프리메이슨 조지워싱턴 기념관과 강가의 올드타운(Old Town)

반응형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7마일(11 km) 떨어진, 버지니아 주에 속하는 포토맥 강의 서안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미국 독립전인 1749년에 생긴 유서깊은 마을이다. 현재는 약 16만명이 거주하는 행정구역 상 독립된 시(independent city)인데, 버지니아 주에서 가구당 평균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이며, 바로 북쪽에 펜타곤이 있어서 국방부와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단다. 그리고 도시의 이름은 이집트의 고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따온 것은 아니고, 마을이 만들어질 당시에 그 땅의 소유주였던 John Alexander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우뚝 서있는 이 타워는, 동명의 그 이집트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파로스 등대(Pharos Lighthouse)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전체 높이도 333피트(101 m)로 역사학자들이 추정하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높이와 비슷하게 만든 이 건물은, 미국의 프리메이슨(Freemason) 조직이 1932년에 완공한 조지워싱턴 매소닉 내셔널메모리얼(George Washington Masonic National Memorial)이다. 북쪽 주차장과 연결된 이 육중한 옆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남성이 중앙홀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내부는 유료투어로만 관람이 가능한데, 우리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그냥 기념품 가게만 잠깐 둘러보기로 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가게의 벽에 그려진 저 그림이 당시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프리메이슨은 옛날 솔로몬의 신전을 건설하는 석공(mason)들에서 자신의 기원을 찾고 있단다. 일루미나티와 함께 각종 음모론에 자주 등장하는 조직인 프리메이슨의 로고가 새겨진 옷과 각종 소품들을 일반인들도 여기서 살 수가 있고, 프리메이슨의 리더를 상징하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그림과 관련 서적 등도 판매를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제1대 워싱턴을 시작으로 제38대 제럴드 포드(Gerald Ford)까지 14명의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프리메이슨 조직원(?)이었다고 하니 막강한 비밀결사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페이스북으로 신규 회원모집을 광고해야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점점 쇠퇴하고 있단다. 유명한 프리메이슨의 엠블럼(Emblem of Freemasonry)에 관한 그들의 설명이 왼편에 씌여있는데, 나름대로 간단히 요약하자면... 직각자(The square)처럼 똑바르게, 원을 그리는 컴파스(The compass)처럼 둥글게, 그리고 이러한 기하학(Geometry)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신(God)을 중심에 두고 살자는 뜻이란다. 안내판 아래쪽으로 그 상징을 콘크리트로 커다랗게 만들어 놓았는데, 여기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까 잔디밭 사이로 만들어 놓은 산책로를 따라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니까 정문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벽에 워싱턴의 얼굴 부조와 기념관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청소를 한 지가 제법 오래되어 보였다. 특히 부조 아래의 워싱턴의 어록과 서명이 붙어있는데, 쇠로 만든 서명은 부러져서 아래 화단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 장소는 이름에 '내셔널(National)'이라는 말이 들어가지만 정부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유지에 만들어진 기념관으로, 그 규모가 미국에서 가장 큰 곳들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인 2015년에 미국의 국가유적지(National Historic Landmark)로도 지정이 되었다. 기념관의 내부는 9층으로 되어있고 단순히 조지 워싱턴에 관한 전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도 프리메이슨 조직이 회합을 가지는 롯지(Lodge)와 특이한 벽화 및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을 기리는 예배당 등을 볼 수 있다고 하므로, 이런 류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투어를 해보시면 흥미가 있으실거다. 관심은 있지만 시간이 없는 위기주부는 주차장으로 돌아가서 이제 언덕 아래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 시내로 향했다. 알렉산드리아 시청 앞 광장에서 올해 처음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났는데, 장식이 아직 다 안 끝난건지? 아니면 노란 전구로만 장식을 끝낸 미니멀리즘인지? 트리 장식이 아주 단순했다~^^ 시청에서 강가로 뻗어있는 킹스트리트(King Street)는 식당과 가게들이 좌우로 늘어선 보행자 도로로 꾸며져 있는데, 여기 올드타운 알렉산드리아(Old Town Alexandria)에는 1700년대에 지어진 벽돌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워싱턴을 지나서 흘러 온 포토맥 강(Potomac River)과 만나는 곳에 워터프론트 공원(Waterfront Park)이 나온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작은 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강물 위로 늦가을 맑은 날씨의 붉은 노을이 참 멋있었다~ 사모님이 너무 웃기게 나왔다고 공개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우리 부부가 이러면서 노는 것은 이미 다들 아시는 사실이고, 영하의 기온이 추워서 모자를 뒤집어 쓴 것 뿐이니까, 그냥 결혼 23주년 기념 나들이의 추억으로 올려놓는다. 남쪽으로는 강을 건너는 우드로윌슨 기념다리(Woodrow Wilson Memorial Bridge)가 보이고 그 뒤로 작게 회전관람차와 컨벤션센터 건물이 보이는 곳이, 작년 크리스마스 당일에 방문했었던 메릴랜드 주의 내셔널하버(National Harbor)이다. (여행기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그 때 사진 왼쪽의 고층빌딩인 MGM 카지노호텔도 한 번 가보겠다고 해놓고, 벌써 1년이 다되어 가는데 아직 못 가봤으니까...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저기를 가볼까? 강가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걸으니까 노란 수상택시(water taxi)와 선상 카지노처럼 보이는 배가 정박되어 있었다. 부두에 고급 식당들이 많이 있었지만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이른 것 같아서, 따뜻한 음료수 한 잔만 마시고 강가를 따라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킹스트리트를 따라 주차한 곳으로 돌아가다가 들어간 '별다방'도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핫초콜렛을 하나 사고 운 좋게 자리가 난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나누어 마셨는데, 아래에 인터넷에서 가져온 이 가게의 다른 내부 사진을 한 장 보여드린다. 벽난로 위에 Seaport Inn & Restaurant 간판과 함께 엄청 낡아보이는 벽과 천장이 보인다. 즉, 이 건물은 1760년대에 지어진 여관과 식당이 영업을 하던 곳으로, 아마도 미국의 스타벅스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에 입점한 가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까 가로등과 나무에 장식한 조명이 들어와서 때 이른 연말 분위기가 팍팍 느껴졌다. 다음 날 사모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 동네에서 1등으로 집밖에 크리스마스 전구를 설치해서 불을 밝혔고, 화요일 저녁에는 딸아이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왔다. 미국에 계신 이웃분들은 모두 추수감사절 연휴 잘 보내시기 바라며, 지금 진행되고 있는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도 잘 싸웠으면 좋겠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