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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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각각 기념하는 두 곳의 국립사적지

미국은 1951년 2월에 수정헌법 제22조를 비준해서 한 개인이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있는 최대 횟수를 2회로 제한하게 된다. 이와 같은 개헌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1932년부터 1944년까지 4번의 대선에 연달아 출마해 모두 당선되었던 제32대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FDR) 때문이다. 그의 미완성 4번의 대통령 임기에 대해서는 워싱턴DC에 있는 기념물 방문기에서 간단히 설명드렸었고, 이번에는 지난 가을의 북부 뉴욕주 2박3일 여행에서 그가 태어나고 또 죽어서 묻혀있는 'FDR의 집'을 찾아간 이야기이다. 허드슨 강을 따라 올버니와 뉴욕시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하이드파크(Hyde Park) 지역의 9번 국도변에 있는 커다란 간판이다. 국립공원청 로고 옆에 써진 것을 보면 공식명칭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집 국립사적지(Home of Franklin D. Roosevelt National Historic Site)로 왠지 '집(home)'이란 단어를 제일 앞에 써서 특히 강조한 느낌이다. 방문했을 때처럼 단풍이 든 국립 공원의 전체 조감도와 함께 하이드파크 부근 지도를 우측에 작게 보여주고 있는데, 3년전에 아내와 함께 보스턴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내부 투어까지 했던 밴더빌트 맨션(Vanderbilt Mansion) 국립사적지가 마을 위쪽에 표시되어 있고, 이 공원의 영역도 9번 국도를 건너 동쪽으로 길게 뻗어있음을 볼 수 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두 연방기관의 로고가 함께 그려진 공동 비지터센터는 2003년에 새로 만들어졌는데, FDR의 처음 8년 동안은 농무부 장관을, 그리고 3번째 임기에서 4년간 부통령을 역임했던 헨리 월리스(Henry A. Wallace)를 기려 명명되었다. 그러나 4번째 대선에서 월리스를 버리고 대신에 트루먼을 러닝메이트로 바꿨는데, 월리스가 너무 급진적인 진보주의자였기 때문이란다. 그래 놓고는 1945년 1월에 4번째 임기를 시작하고 불과 82일만에... 당시 셧다운으로 모든 건물은 잠겨 있었기 때문에 바로 발길을 옮기니 꾸준히 관리를 해온 흔적이 보이는 텃밭이 나왔다. FDR의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가 1867년에 여기 110에이커의 대지에 농장과 목장이 딸린 목조 저택을 구매해 '스프링우드(Springwood)'라 이름 붙였고, 1882년 1월 30일에 그 집 남동쪽의 2층방에서 늦둥이 프랭클린이 태어났다. 텃밭 맞은편의 커다란 건물은 집이 아니고 Franklin D. Roosevelt Presidential Library & Museum으로 1941년 6월에 개관한 미국 최초의 대통령 도서관이다. 그는 두번째 임기 말미에 고향 땅에 직접 이 시설을 짓기 시작했는데, 3선에 성공하면서 현직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되기도 한 특별한 이력을 가지게 되었단다. 국가기록원(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역시 문을 닫아 뒷마당의 조각정원만 잠깐 구경했는데, FDR과 마주보고 있는 흉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방세계를 함께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 영국총리이다. 베를린 장벽을 남녀의 모양으로 잘라낸 조각은 처칠 손녀의 작품으로, 이 부분이 잘려나간 장벽은 미주리주 풀턴(Fulton)에 있는 미국 국립 처칠 박물관(America's National Churchill Museum)에 전시되어서 두 사람의 우애를 상징한다. 1946년 3월에 처칠이 미국을 방문해서 그 도시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을 한 것을 기념해 박물관이 거기 만들어졌단다. FDR은 1945년 4월 12일, 조지아주 웜스프링스(Warm Springs)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뇌출혈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그는 소아마비가 재발한 하반신의 온천치료를 위해 1920년대부터 거기를 찾다가 아예 리조트를 사들여서 재단을 만들고 별장을 지어서 '리틀 화이트하우스(Little White House)'로 부르며 휴식을 위해 자주 방문했었다. 안내판 제일 오른쪽 아래 사진은 이듬해에 처칠이 여기 묘역을 방문해서 조화를 놓는 장면이다. 장미정원 안에 묘지가 만들어져 있는데, 당시에는 셧다운 때문에 관리자가 없어서 그런지 철조망으로 막혀 있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커다란 흰 대리석은 1962년에 사망한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이름도 추가되어 공동묘비 역할을 하고, 오른편으로 보이는 작은 기둥 아래에는 애완견 팔라(Fala)도 묻혀있다. 이렇게 부부가 애완견과 함께 영원히 같은 자리에 잠들어 있으나, FDR의 임종을 지켰던 팔라와 다른 한 명은 영부인이 아니라 그가 불륜을 저질렀던 상대인 오랜 연인 루시 머서(Lucy Mercer)였단다... 스프링우드 저택은 원래는 가운데 부분만 있는 평범한 2층집이었지만, FDR의 어머니 사라(Sara)의 주도로 대대적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웅장한 모습이 되었다. 시간을 되돌려 부부사를 좀 더 짚어보면... 둘은 1905년에 현직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조카딸을 소개해줘서 결혼했는데, 즉 부부가 따지자면 13촌의 아주 먼 친척이었다. 앞서 등장한 루시는 엘리너의 개인 비서로 FDR을 1914년에 처음 만났고, 1918년에 불륜을 알게된 엘리너는 이혼을 결심했지만 당시 해군성 차관으로 승승장구하던 FDR의 정치생명을 고려해, 결국 둘은 정치적 동반자의 관계만 유지하는 쪽으로 합의하고 불륜을 비밀로 지킨다~ 그러나 스프링우드 대저택의 실질적인 주인은 FDR의 어머니 사라였고, 그런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 엘리너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을 알았기에, 1924년에 FDR은 집에서 3km 떨어진 자신의 사유지에 엘리너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땅을 내어주게 된다. 거기에 엘리너는 친구들과 함께 집을 짓고 지역 농민들에게 가구 제작과 금속 공예를 가르치는 공장도 만들게 되는데, 그 곳이 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발킬(Val-Kill)이다. 집의 뒤쪽에 있는 차고와 마굿간 건물 등을 포함해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데, 이는 FDR이 죽기 전에 미리 스프링우드 전체를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생전인 1944년에 일찌감치 국립사적지로 지정이 되었고, FDR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 엘리너는 바로 짐을 싸서 스프링우드를 떠났기 때문에, 서거 1주기에 맞춰서 일반에게 FDR이 사망한 날의 모습과 똑같이 공개될 수 있었단다. 온실과 농장 창고 건물을 스쳐지나 주차장으로 돌아가서, 이제 별도의 국립사적지로 지정이 된 엘리너 루스벨트의 거주지 '발킬'을 찾아간다. 공식명칭은 엘리너 루스벨트 국립사적지(Eleanor Roosevelt National Historic Site)이지만, 그녀가 생전에 이 곳을 부른 이름을 더 큼지막하게 적어 놓았다. 얼핏 섬뜩한 느낌의 발킬(Val-Kill)은 작년에 사망한 영화배우 발 킬머(Val Kilmer)와는 당연히 아무 관련이 없고...^^ 네덜란드어로 '계곡의 시냇물(Valley Stream)'이란 이쁜 뜻이란다. 같은 연유로 뉴욕주에는 '-kill'로 끝나는 지명이 많은데, 전설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렸던 뉴요커의 대표적 산악 휴양지인 캐츠킬(Catskill) 등이 그 예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그런데 여기는 진입로가 아예 잠겨있었다! 흑흑~ 사실 열려있었다고 해도 아래와 같은 시냇가의 '돌담집(Stone Cottage)' 사진만 후다닥 찍고 나와야만 했을 것이기는 하다. 그래서 짜투리로 소개하며 방문한 국립 공원 리스트에 추가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공원 간판만 직접 찍어놓고 방문했다고 우기는 경우는 글의 마지막에 역시 간판 사진만 등장하는 15년전 여행기의 이 곳 이후로 두번째이다.^^ 폴킬(Fall Kill) 개울에 비친 그녀의 돌답집에 살면서, 엘리너 루스벨트는 미국 최초의 유엔(UN) 대사로 임명되어 인권위원회 의장을 맡아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직접 작성했고, 미국내 시민권 운동과 여성지위 향상 등을 위해 적극 활동했다. 이러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77년에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별도의 국립사적지로 지정이 되었는데, 현재까지도 미국의 대통령 영부인 개인을 기리는 국립 공원으로는 유일한 장소이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날 '오케이(Okay, OK)'란 말을 쓰이게 만든 미국 대통령!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 국립사적지

영어권을 넘어 전세계에서 통용되며 한국에서는 'ㅇㅋ'로 쓰기도 하는 이 말은 1839년 3월 23일자 보스턴 지역신문에 최초로 등장했다. 당시 미국 식자층들 사이에서 표현을 발음대로 적은 다음에 이니셜로 약어를 만들어 자기들끼리만 아는 은어(隱語)를 쓰는게 유행이어서 '모두 맞다(all correct)'는 것을 Oll Korrect → O.K.로 표시했던 것이다. 이런 원리로 많은 약어가 등장해서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오케이(O.K.)'만 지금까지 살아 남아서 만국공통어가 된 것은 바로 이 사람 때문이다. 뉴욕 주도 올버니(Albany)에서 허드슨 강을 건너 남쪽으로 9번 국도를 따라 조금 내려오면 킨더훅(Kinderhook)이란 마을이 나오고, 거기서 옛날 샛길로 빠지면 바로 등장하는 마틴밴뷰런 국립사적지(Martin Van Buren National Historic Site)의 간판을 주차장에 내려서 돌아보고 찍었다. 그는 20달러 지폐의 모델인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의 부통령으로 재임하며 1836년 대선에서 승리해 미국의 제8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와 같이 선거를 통해 현직 부통령에서 차기 대통령이 바로 된 경우는 제41대 '아버지 부시(Father Bush)'와 함께 지금까지도 유이(有二)한 케이스란다. 1782년생인 마틴 밴뷰런(Martin Van Buren)은 미국 시민권자로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인 동시에 지금까지 유일하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술집을 운영한 네덜란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네덜란드어만 쓰며 자라다가, 독학으로 영어를 익혀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뉴욕주 상원의원과 검찰총장을 거쳐 주지사에 당선되고, 국무장관과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까지 거머쥔 말 그대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당시 연방정부 셧다운에 늦가을 낙엽까지 뒹굴어서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던 길을 따라서 비지터센터까지 일단 먼저 걸어가본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공원 브로셔라도 하나 챙기고 싶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고, 이제는 집의 바깥만 한바퀴 돌며 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할게 없었다. 빈약한 방문기를 보충하기 위해 홈페이지 내용을 살펴보다가, 첫 페이지에 레인저가 직접 만든 소개 영상이 올라와 있어서 아래 유튜브 링크를 띄운다. 의욕이 넘치는 젊은 국립공원청 직원이 그랜드캐년, 옐로스톤, 그레이트스모키같은 인기있는 국립공원이 아니라... 여기같은 썰렁한 국립사적지로 발령을 받으면 이런 영상을 직접 만들게 된다. "But we all know that the jewel in the crown of the National Park Service is..." 셧다운이 아니었으면 정해진 시간에 무료로 내부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었겠지만, 이 날의 빠듯했던 일정을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었을 수도...^^ 그는 대통령 재임 중이던 1839년에 이 집과 농장을 구입해서 독일어 '린덴발트(Lindenwald)'로 이름지었는데, 이듬해 재선에 실패하고 1841년에 이사와서 1862년에 79세로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특히 아깝게 탈락한 1844년의 민주당 경선과 직접 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을 만들어 출마했던 1848년 대선의 선거본부로 사용되기도 해서, 미국 정치사의 중요한 장소였던 이 집 거실의 사진이 안내판에 보인다. 특이한 타워를 포함한 집의 뒤쪽 부분은 1849-50년 동안에 증축된 것으로, 그 결과 모두 36개나 되는 방을 가진 대저택이 되어서, 4명의 아들 부부와 손주들 및 다수의 하인들이 모두 함께 거주하기도 했단다. 이 집도 그의 사후에 아들들이 매각해서 다른 소유자들을 거쳤지만 전체적인 골격은 유지되었고, 1974년에 국립사적지로 지정되며 연방정부가 인수해서 옛모습으로 내외부를 완전히 복원을 한 것이란다. 마틴 밴 뷰런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앤드루 잭슨과 함께 현재의 미국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1828년에 창설했고, 오늘날 사용되는 현대적인 선거 캠페인의 기초를 닦은 정치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전략 덕분에 아군들은 '작은 마법사(The Little Magician)', 적군들은 '킨더후크의 붉은 여우(The Red Fox of Kinderhook)'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올드 킨더후크(Old Kinderhook)'라 불렀기에 1840년 재선 캠페인에서 지지자들이 지역마다 'OK 클럽'을 조직하고 슬로건으로 "Vote for OK"를 사용하며 그 단어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흐지부지 잊혀질 수도 있는 약어를 상대편이 네거티브 공세에 적극 활용하며 그 뜻을 모두에게 각인시켰는데, 잭슨과 밴뷰런이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스펠링을 'Oll Korrect'로 틀리게 쓴다거나, 위의 1840년 신문에 실린 휘그당이 만든 풍자 만화처럼 양쪽 진영이 모두 'OK'란 표기를 적극 활용했기에 오늘날 공용어로 살아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국 대통령사에서 또 하나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퇴임 후 21년 동안에 제16대 링컨까지 무려 8명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그 기간에 2명이 재임중 병사했고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아무도 없었기에 가능했다. (2024년말에 100세로 사망한 지미 카터는 퇴임 후 44년이나 생존한 기록을 가지지만 7명의 후임을 지켜봤는데, 그 중 4명이 재선했고 임기 중 사망자도 없었기 때문) 이제 계속해서 허드슨 강을 따라 남쪽으로 달려서 또 다른 뉴욕주 출신의, 이번에는 아주 유명한 대통령의 집을 또 찾아간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펜실베니아 스크랜턴(Scranton)의 스팀타운(Steamtown) 국립사적지로 시작한 북부 뉴욕주 2박3일 여행

아내가 혼자 한국을 살짝 다녀오기로 한 10월말에 맞춰서 2박3일로 업스테이트 뉴욕(Upstate New York) 여행 계획을 '몰래'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10월부터 미국 연방정부가 셧다운에 들어가면서 모든 국립 공원들이 문들 닫았다! 여행의 주목적이 위기주부의 취미인 'NPS 오피셜유닛 도장깨기'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냥 등산이나 한두번 더 다녀올까 하다가, 어차피 비지터센터에서 진짜 도장(stamp)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 곳에 대한 공부는 현장보다 돌아와 위키로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대로 강행하기로 했다. 위의 초승달같은 경로를 시계방향으로 돌았는데, 2박3일 동안 실주행 거리는 1,200마일도 넘었다. 지도에 표시된 곳들 외에도 들린 장소가 많아서 모두 12개의 NPS official unit들이 리스트에 추가될 예정이며, 국립 공원 외에 서너곳 정도 관광지(?)도 사이사이에 등장하게 된다. 뉴욕 주에 속하지 않는 장소가 경로상 처음과 마지막에 각각 하나씩 딱 2곳뿐이었는데, 첫날 5시에 출발해서 두 시간을 달려 펜실베니아 주청사가 있는 해리스버그에서 아침을 먹고 또 두 시간을 더 운전해 도착한 첫번째 공원부터 시작한다. 이번 로드트립에서 가장 많이 달린 인터스테이트 81번에서 스크랜턴(Scranton)으로 빠지는 길의 이름이 '바이든 대통령 고속도로(President Biden Expressway)'였던 것이 제일 먼저 기억에 남아서, 구글 스트리트뷰 한 장 캡쳐해봤다. 펜실베니아 스크랜턴이 바이든이 태어나서 10살까지 살았던 도시라서, 그가 대통령에 취임했던 2021년에 도로명을 이렇게 변경한 것이라 한다. 살짝 낙후된 공업도시 느낌을 받으며 도심 기차역의 차량기지에 해당하는 곳을 찾아왔는데, 넓은 주차장이 입구쪽 일부분만 개방되어 있었다. 쌀쌀한 내륙의 가을바람을 맞으며 차에서 내려, 갈색 표지판의 스팀타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PARK CLOSED" 사인이 위기주부를 반겨주었다! 국립공원청에서 추가로 붙여놓은 안내문에는 '정부 폐쇄(government shutdown)'라는 말 대신에 '예산 중단(lapse in appropriations)'이란 표현을 쓰는게 특이했고, 나중에는 방문하는 곳마다 저 안내문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ㅎㅎ 그래도 꿋꿋하게 건물쪽으로 걸어와보니 매표소 겸 안내소 건물이 나온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공원이 운영되는 주말에는 인근의 마을로 향하는 실제 복원된 증기 기관차가 끄는 열차를 타고 '소풍(excursion)'을 갈 수도 있는데, 그 목적지들 중에는 여기서 남동쪽으로 11마일 떨어진 모스크바(Moscow)도 있단다.^^ 스팀타운 국립사적지(Steamtown National Historic Site)는 여기 1986년에 설립되었지만, 그 역사는 사실 다른 곳에서 한 개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사업가이자 열렬한 철도애호가였던 F. Nelson Blount는 개인적으로 수집한 증기 기관차들을 전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1964년에 'Steamtown USA' 재단을 만들었는데, 안타깝게도 3년만에 개인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백만장자 주인을 갑자기 잃은 개인 박물관은 장기간 적자에 허덕이기 시작했고, 결국 도시 재개발을 추진하던 스크랜턴 시가 관광지로 개발할 목적으로 1984년에 재단을 인수하고, 수집된 기차들을 모두 펜실베니아 북동부에서 운영되는 철도 노선 DL&W의 야적장으로 끌고 오게 된다. 어차피 안으로 못 들어가니까, 공원 브로셔의 조감도라도 보여드리며 설명을 계속하면... 스크랜턴 시는 철도 박물관이 매년 20만~40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일거라 홍보했지만, 그 수는 개장 첫해에 6만 명에 불과했고 바로 이듬해부터 2백만 달러 이상의 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역 국회의원이 발빠르게 국립사적지로 지정을 추진해서 연방정부에 운영을 떠넘기게 된 것이다. 수집품 중에는 캐나다에서 운영된 기차가 많아서 미국사적 가치도 별로 없었고, 지역의 역사적 특색도 반영하지 못한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주지사까지 나서서 노력한 끝에 1986년에 법이 통과된 것이다. 입구에 전시되어 있던 크레인 철도 차량인 듯 하고... 그렇게 떠밀려서 스팀타운을 인수한 국립공원청은 불필요한 기차는 폐기하거나 매각하고, 노후된 기관차 정비소와 건물 등을 개조하고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등에 무려 6,600만 달러를 사용한 후인 1995년에야 처음 일반에 공개를 해서, 그 해에 스크랜턴 시가 꿈에 그리던 212,000명의 방문객을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연간 운영비로 500만 달러 이상이 지출됨에도 불구하고 방문객은 지속적으로 감소해서 현재는 5만~6만 명에 불과한 수준이란다. 구경 다 했으니까 뒤돌아 주차장으로... 옛날에 LA의 시립 철도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듯이, 미국 전역에 이런 곳들이 워낙 많아서 여기가 가장 크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차를 소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연방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철도 박물관으로 특히 조감도에 중앙에 보이는 기관차를 철로와 함께 통째로 회전시켜서 정비와 보관을 위한 라운드하우스(Roundhouse)에 입고시키는 턴테이블이 작동하는 단 3~4곳들 중의 하나인게 큰 의미란다. 돌아가는 길에 다른 두 쌍의 노부부가 위기주부처럼 여기를 찾아와 비지터센터 쪽으로 걸어가는게 보였다. "나중에 여기를 마누라랑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잠깐 들었었고, 떠나기 전에 별도의 카운티 박물관인 트롤리 뮤지엄(Trolley Museum)에 대해서도 잠깐 알아보면, 스크랜턴은 1880년에 미국에서 전기를 가장 먼저 도입한 도시들 중의 하나로, 특히 1886년에 최초로 노면 전차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Electric City'라는 별칭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기념하기 위해서 1999년에 카운티에서 전차 박물관을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는 문을 열었다고 해도, 금요일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듯... "그러면, 주차장에 제법 있는 차들은 다 누가 타고 온 걸까?" 참, 여기까지 복습을 하다보니 시즌9까지 제작되어서 나름 미국에서는 인기가 있었다는 NBC의 시트콤 드라마 의 배경 도시가 스크랜턴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했던 스크랜턴을 대표하는 네온사인으로 덕분에 '일렉트릭 시티'라는 별명이 알려지는데 도움이 되었단다.^^ 주차장을 빠져 나가려는데 그 옆으로 뻗은 철로에 세워져 있던 기차와 안내판이 정면으로 보여서, 예의상 한 대라도 제대로 꼼꼼히 보고 가자는 생각에 다시 차에서 내려서 국립공원청에서 만든 안내판을 (읽지는 않고) 사진만 찍었다. 볼드윈 기관차(Baldwin Locomotive)에서 1916년에 제작해서 1937년까지는 테네시에서 여객을 운송했고, 그 후 뉴저지로 와서 Rahway Valley #15 이름의 화물열차로 1953년까지 사용된 기차라고 한다. 북부 뉴욕주 2박3일 여행기의 첫 편을 이렇게 마치며 돌이켜 보니, 사실 국립 공원들이 문을 열어서 비지터센터에서 안내영화도 보고 전시물들도 더 둘러봤다면, 앞으로 계속 소개될 곳들을 과연 모두 방문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살짝 들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전화위복 아니면 새옹지마, 또는 불행 중 다행이라 부르는 걸까? ㅎㅎ

취임 4개월만에 암살당한 대통령의 집이었던 클리블랜드 외곽의 가필드(James A. Garfield) 국립사적지

취임 4개월만에 암살당한 대통령의 집이었던 클리블랜드 외곽의 가필드(James A. Garfield) 국립사적지

올해 트럼프가 제47대로 다시 취임하며 미국 역사상 두번째의 '징검다리 임기' 대통령이 되었다. 그 첫번째는 1885~1897년의 가운데 4년을 뺀 제22·24대를 역임한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였다. 비록 그는 뉴저지 출생에 뉴욕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되어 오하이오(Ohio) 주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1796년에 이리 호(Lake Erie) 연안을 탐험하다 쿠야호가 강(Cuyahoga River)이 호수로 흘러드는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을 처음 만들었던 모세스 클리블랜드(Moses Cleaveland) 장군의 먼 후손이다. 그 마을이 20세기 전반에 인구 1백만의 돈이 넘쳐나는 '철강도시' 클리블랜드(Cleveland)로 발전했지만, 중반 이후 오대호 지역의 제조업 쇠퇴와 함께 현재는 인구 40만명으로 쇠락한 대표적 '러스트 벨트' 도시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는 세계적 명성의 종합병원으로 다시 알려지며 '의료도시'로 탈바꿈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케스트라와 미술관이 유명하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대표적 관광지라지만, 위기주부는 그 모두를 제쳐두고 북동쪽의 멘토(Mentor)라는 위성도시로 향했다. 제임스 가필드 국립사적지(James A. Garfield National Historic Site)는 미국 제20대 대통령이 1880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4년전에 구입한 농장과 저택을 보존하기 위해 1980년에 지정되었다. 그는 남북전쟁 중인 1862년에 처음 하원에 당선되어 대선때가 18년째로,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현직 연방 하원의원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경우이다. 농장의 말과 마차를 보관하던 커다란 캐리지 하우스(Carriage House)를 개조한 비지터센터의 입구로, 계속 내리던 진눈깨비는 그쳤지만 꾸물꾸물한 날씨가 이제 소개할 그의 슬픈 죽음과 맞물려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입구를 장식하는 제임스 A.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대통령의 옆모습으로, 워싱턴DC 내셔널몰에 있는 그의 동상을 찾아봤던 여행기에서 이력을 짧게 소개한 것을 클릭해서 보실 수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힘들게 공부해서 윌리엄스 대학을 졸업하고 고대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를 거쳐 모교의 학장이 되었고, 변호사와 군장교를 거쳐 정치에 입문해 대통령까지 된 정말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마굿간을 개조해서 그런지 비지터센터 내부구조가 좀 특이했는데, 취임선서를 하는 모습의 하얀 동상이 있는 곳에서 오른편 안쪽으로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도서관(Presidential Library)이라면 그냥 특정 대통령의 기념관을 좀 우아하게(?) 부르는 표현으로 인식되지만, 여기는 그가 암살되고 4년후인 1885년에 계속 여기에 거주하던 미망인이 집의 일부를 그가 문학교수와 변호사로 일하며 소유했던 책들을 모아서 따로 공개하는 공간으로 만들었기에, 공식적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 도서관으로 인정되는 유적지이다. 인문학자답게 남북전쟁을 노예제에 대항하는 성전으로 인식해서, 스스로 의용군을 조직해서 북군에 합류해 서부전선의 최대 격전이었던 치카모가 전투(Battle of Chickamauga) 등에서 활약해 명성을 얻기도 했다. (다른 오하이오 출신의 미래 대통령이 두 명이나 참전했던 동부전선 버지니아 지역의 전투에 대한 포스팅을 보시려면 클릭) 다음으로 대통령 선거와 취임식 등을 보여주는데, 제일 왼쪽에 빨간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당시 선거운동원 모습이란다. 공화당 내 급진파였던 가필드는 선거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최대파벌의 지원을 받는 대신에 부통령 후보로 그쪽 계파 사람을 골랐고, 당선되면 상대 파벌에도 요직을 준다는 조건에 합의해야만 했다. 그 결과로 아주 근소한 차이로 대선에서 승리해서 1881년 3월에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대통령이 된 가필드는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엽관제가 만연한 당시의 부패한 공직사회를 일소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 파벌에 행정부 요직을 준다는 약속도 지킬 수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Charles J. Guiteau가 불과 취임 4개월만에 기차역에서 그의 등 뒤에 두 발의 총격을 가했다. 문제는 자신이 가필드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믿었던 암살범은 정치판 주변을 기웃거리는 과대망상증 환자였고,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 자신은 사면될거라 주장했지만, 약 1년 후에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총알 하나가 몸에 박힌 상태로 가필드는 2개월 이상을 병석에 누워 있다가 패혈증이 겹치면서 결국 사망했는데, 안타깝게도 의사들이 무리하게 총알을 찾으려다가 병세가 오히려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단다. 마지막에는 병상에 누운 상태로 백악관을 떠나 기차를 타고 뉴저지 바닷가 휴양지로 향했다가 거기서 사망하는데, 당시 덜컹거리는 기차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철망으로 특수 제작되었던 매트리스 실물이란다. 이외에도 사망 후에 제작한 데드마스크와 손의 모형 등도 유리함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앞서 링크로 소개한 그의 동상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학자, 군인, 정치가로서 모두 역량을 보여준 훌륭한 인물이었기에, 만약 암살되지 않았다면 대통령으로 어떤 업적을 이루고 또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가, 짧은 안내영화를 보면서 계속 궁금했다~ 저택의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 이 날의 마지막 무료 가이드투어에 20분 정도 기다리면 참여가 가능했지만, 예약해 놓은 숙소까지 또 2시간을 더 운전해서 가야했기 때문에, 그냥 혼자 집 주위만 둘러보고는 떠나기로 했다. 가필드 사망 후에도 많은 확장과 시설 추가를 거친 후에, 자녀들에 의해서 1936년에 클리블랜드 역사학회에 기증되었다가, 국립사적지로 지정된 후에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면서, 19세기 미국 대통령 유적지들 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복원되고 세부묘사가 뛰어난 실내로 여겨진단다. 본채 옆으로는 대선 때 선거운동 본부로 사용되었던 작은 별채인 캠페인오피스(Campaign Office)가 있어서,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짝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상당히 독특한 외관의 1895년에 추가된 풍차(Windmill)는 곡식을 빻는 용도가 아니라, 창문이 보이는 2~3층의 안에 있는 커다란 저수조의 물을 지하로 매설된 파이프를 통해 저택 꼭대기의 작은 물탱크로 보내는 역할을 했단다. 이외에 마굿간 옆으로는 지하 가스전에서 나오는 연료를 보관해서 집의 난방과 취사에 사용하기 위해 1885년에 설치된 가스홀더(Gasholder) 건물도 있었다. 이상으로 또 한 명의 미국 대통령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는 대각선으로 오하이오의 중심을 향하는 71번 고속도로를 따라 주도인 콜럼버스(Columbus)로 향했다. 시간이 있었으면 사진 가운데 빌딩의 뒤에 위치한 주청사라도 잠깐 구경하고 싶었지만, 도심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나왔을 때는 사진보다 더 어두워진 저녁에 겨울비까지 내리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바로 외곽순환 270번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도시 북서쪽의 예약한 모텔로 향했다. 따로 저녁 먹을 곳을 찾기도 귀찮을 것 같아 미리 준비해간 즉석밥에 팝콘과 맥주를 후식으로 먹고는 바로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도 방에서 간단히 해결하고는 이미 블로그에 소개한 1시간 거리의 미공군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