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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posts뉴욕 13
출국을 며칠 앞두고 찾은 은행. 직원은 환전의 목적을 묻더니 친절하게도 여러 단위의 지폐를 꺼내들었다. 백 달러부터 일 달러까지 그득그득. 덕분에 내 지갑은 색색의 종이로 가득 찼다. 여행의 나날이 지날수록 지갑은 뚱뚱해졌다. 동전들은 단위만큼 색과 크기도 다양해서, 이방인의 눈엔 쉽게 헤아려지지 않았다. 수줍게 한 손에 동전 뭉치를 올려두고, 알아서 골라가셔요 란 눈빛을 보내는 것도 살짝 부끄러워질 때. 때가 왔다. 지갑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동전을 털어야 할 때가. 까페에 들어가 벽에 붙은 메뉴를 흘깃거리며 줄을 선다. 가격 끝단위까지 정확히 맞춰 한 손에 동전들을 쥐고 차례를 기다린다. 능숙하게 주문을 하지만 언제나 내야할 금액은 모아쥔 동전보다 많다. 고국과는 사뭇 다른, 택스와 팁이란 관습 때

뉴욕 12
헤드윅에 아직 동베를린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직 헤드윅이란 이름을 얻기 전이기도 하다. 장벽 근처에 엎드려 태닝하고 있던 한셀에게 슈가 대디가 다가온다. 그는 보잉 선글라스를 벗고선 환한 웃음과 함께 젤리를 건넨다. 화려한 색깔에 질감도 다양한 미제 젤리. 한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이것은 아주 긍적적인 맛이라고. 얻어 들은 풍문으로도 이 도시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주관적인 여행 난이도를 무척 낮춰주었다. 혼자 거대한 세계를 맞닥뜨렸다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크레딧 카드와 캐시, 그리고 아이폰만 있다면. 구글맵의 빨간 점이 이끄는 곳으로 걷다 나는 종종 다른 길로 빠지곤 했다. 익숙한 브랜드들의 유리문을 밀어젖히면, 에어컨 바람이 목 뒤를 쓸어내렸다.

뉴욕 11
태양을 착즙하면 이런 볕이 뚝뚝 흐를테다. 그리니치 빌리지를 따라 줄곧 걸었다. 작은 레스토랑과 세탁소들을 구경하면서. 첼시 마켓에 이르러 숨을 골랐다. 서늘한 서점에 틀어박혀 한참을 구경했다. 카드 섹션을 빙글빙글 돌리며 친구에게 쓸 엽서를 골랐다. 에코백과 파우치들도 잠시 만지작거리다 나왔다. 마켓 앞에선 조그만 거리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파라솔 아래의 벤치에 앉아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아가씨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은색 샌달을 보고 알았다. 뛰어가 어깨를 툭 치니 그 아가씨가 맞다. 우리 둘은 신기해하며 짧은 인사를 나눈다. 열네시간의 비행이 반쯤 지났을 무렵, 가벼운 인사와 함께 여행 이야기를 나눴던 사이였다. 각자의 숙소까지 가는 방법을 탐구하고, 여행 계

뉴욕 10
백 년을 넘긴 아파트들의 벽엔 진한 컬러의 광고들이 그려져 있다. 나는 생각한다. 어느날 끝없는 눈보라가 밀려와서, 혹은 우주의 무언가가 추락해서, 우리 모두가 사라지고 난 다음 이 그림들을 발견하는 이가 있다면. 저 그림들은 어떤 표지가 될 수 있을까. 현세의 복잡미묘함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희미해진 색을 보며 흥겨운 파티나, 달콤한 오레오를 상상할 수 있을까. 페인트를 칠하는 손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