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주부의 미국 여행과 생활 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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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의 고대문명 유적지인 오하이오 칠리코시의 호프웰문화(Hopewell Culture) 국립역사공원
예전에 미서부를 여행할 때는 메사버디(Mesa Verde) 내셔널파크를 필두로 국립공원청이 관리하는 많은 원주민 유적지가 있었던게 기억이 난다. 그러나 미동부로 이사와서는 신대륙의 발견부터 남북전쟁 시대까지의 역사적 장소들은 많지만, 그 이전 시기의 유적지들은 동부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년말 오하이오 주 1박2일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들렀던 공원은, 놀랍게도 서구문명이 처음 만났던 인디언들 보다도 훨씬 더 오래된, 즉 북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했던 고대문명의 흔적이 발견된 장소였다. 오하이오 주도인 콜럼버스(Columbus)에서 정남향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칠리코시(Chillicothe) 부근의 호프웰 문화 국립역사공원(Hopewell Culture 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 도시가 현재는 인구 2만여명의 평범한 군청소재지에 불과하지만, 1803년에 오하이오가 미국의 17번째 주가 되었을 때는 첫번째 주도(state capital)였다고 한다. 문 닫는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도착한 비지터센터는 예상대로 아주 적막했는데, 오른편의 안내판 두 개를 직접 읽으실 수 있도록 고해상도로 다시 보여드리면서, 여기가 어떤 유적지인지 먼저 간단히 소개를 한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한마디로 여기는 대략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지금의 미동부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문명이 최초로 발견된 장소를 보존하는 국립 공원이다. 포함되는 유적지 6곳을 보여주는 오른쪽 공원 지도에 Hopewell Mound Group이라 표시된 장소가 1891년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는데, 그 고대인들이 스스로를 뭐라 불렀는지는 물론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 조차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땅의 당시 주인이었던 사람의 성씨인 '호프웰(Hopewell)'을 그냥 사용한게, 결국 광범위한 고대문명 전체를 일컫는 말이 되었단다. 호프웰 문명의 특징인 흙을 높이 쌓아서 만든 봉분(封墳, burial mound)이 발견된 장소들이 붉은 점으로 표시된 지도로, 멕시코 만(Gulf of Mexico)에서 오대호까지 거의 모든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유사한 문명의 흔적이 발견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화살표로 표시된 것처럼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나는 특산품을 서로 교역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넓은 비지터센터 실내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그 고대인들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인디언 부족의 깃발로, 오하이오에서 메릴랜드 서부까지 이르는 넓은 땅을 지배했던 쇼니족(Shawnee Tribe) 지파들이 제일 앞쪽에 걸려있다. 직원과 자원봉사자가 뜬금없는 위기주부의 방문에 상당히 당황해 하던 기억이 나는데, 안내영화를 틀어주면 퇴근이 늦어질까봐 걱정하는게 느껴져서 그냥 괜찮다고 했다.^^ 이 곳이 2023년에 미국의 25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으로, 흙언덕을 마운드(mound)라는 단어 대신에 어스워크(earthwork)로 써놓았다. 이 단어는 '토목공사'에서 나무 목(木)을 뺀 토공사(土工事) 또는 줄여서 '토공'이라 번역되는 듯 하다. 참고로 1978년에 서두에 언급한 메사버디가 첫번째, 옐로스톤(Yellowstone) 내셔널파크가 두번째 미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면 유적지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여기는 안내판의 모형처럼 정사각형의 테두리 안에 22개의 크고작은 흙언덕이 조밀하게 모여 있어서 마운드시티 그룹(Mound City Group)으로 불린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있지만, 흙언덕의 위로는 올라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작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 장소는 1920년에 군부대를 만들기 위해 땅을 갈아엎는 과정에서 유물이 나와 알려지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화장된 유골과 함께 판상으로 얇게 쪼개지는 광물인 운모(Mica)가 발견된 것으로, 안내판의 우측 사진처럼 운모판을 조심스럽게 깍아서 형상을 만들기도 했단다. 특히 Hopewell Mound Group에서 발견된 길죽한 손바닥 모양의 운모판이 가장 유명해서 호프웰 문화를 대표하는 이미지로도 자주 사용이 된다. 대부분의 토공 내부에서 유골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피라미드처럼 장례의식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그러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한 임시건물을 나무로 지었던 흔적이라 한다. 하지만 바닥에 동그랗게 보이는 말뚝들은 2천년 전에 박은 것은 아니고, 아마도 복원하면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발굴지에서 가장 크고 높은 7번 마운드의 왼편으로 주차장이 있는 비지터센터 건물이 작게 보인다. 안내판의 단면도를 보면 그냥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진흙과 모래 및 자갈을 교대로 덮으면서 체계적으로 봉분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안에서 구리(copper)로 만든 매(falcon)와 다른 형상들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구리의 성분을 정밀 분석한 결과 채광된 장소가 여기서 600마일이나 떨어진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 부근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도 대서양에 사는 상어와 옐로스톤 그리즐리 곰의 이빨, 멕시코 만의 커다란 소라 조개, 그리고 인간의 두개골을 포함한 여러 뼈들을 깍아서 조각한 예술품들이 출토되었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유물은 그들의 얼굴과 각종 동물들이 조각된 작은 '인형 파이프(Effigy Pipe)'로 돌을 깍아서 형상을 만들고 아랫면에서 위쪽으로 구멍을 뚫어 연기가 나오게 만들어서, 화장 등의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이러한 호프웰 문명은 서기 500년경에 급속히 사라지는데, 활과 화살의 발명으로 사냥감이 줄어 본격적인 농업이 시작되고 또 전쟁이 치명적이 되면서, 더 크고 폐쇄적인 공동체 문화가 시작되어 지금의 여러 인디언 부족들로 갈라지기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란다. 비지터센터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다! 설마 불 켜놓고 모두 퇴근...? 이 공원은 기념품들도 따로 특별한 것이 없는지, 그냥 미국 국립 공원들 공통의 퍼즐이나 젱가 등만 책상 위에 몇 개 전시해 놓았다. 이런 곳까지 찾아온 자신이 참 대견하다는 생각을 하며 처음 들어왔던 정문으로 나가보니... 레인저가 오후 4시 칼퇴근을 위해 국기를 게양대에서 내리고 있었다. 여기를 끝으로 웨스트버지니아와 메릴랜드를 차례로 지나 버지니아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였다. 특히 메릴랜드로 접어들어 최고 해발고도가 877m나 되는 I-68 고속도로에서는 눈이 제법 내려 고생을 하기도 했다. 전날 새벽 4시에 집에서 출발했으니 정확히 43시간의 외출이었는데, 그 중에 21시간 운전을 했고 모텔에서 12시간을 보냈으니, 나머지 10시간 동안 9곳을 구경했던 어찌보면 좀 무모했던 지난 겨울의 오하이오 주 1박2일 여행기를 모두 마친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오하이오 주 윌버포스(Wilberforce)의 찰스영 버팔로솔져(Charles Young Buffalo Soldiers) 준국립공원
미동부 버지니아로 이사와서 국립공원청이 직접 관리하는 주변의 공원들을 빠짐없이 다녀보니, 노예해방 직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던 흑인을 기리는 곳들이 많다는게 눈에 띄었다. 방문 순서대로 적어보면 Carter Woodson, Mary Bethune, Frederick Douglass, Maggie Walker, Booker Washington, Harriet Tubman, Paul Dunbar 등으로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꼭 붙는 수식어는 '흑인최초'이다. 물론 그 시대의 흑백차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쯤되면 유사한 업적의 백인들은 받지 못하는 국가적 명예를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챙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좀 들기도 했다. 오하이오 주 1박2일 여행을 계획하며 처음 알게된, 그 시대의 또 다른 흑인 선구자를 기리는 준국립공원인 찰스영 버팔로솔져 내셔널모뉴먼트(Charles Young Buffalo Soldiers National Monument)를 찾아왔다. 주정부에서 따로 만든 안내 표지판의 옆으로 보이는 도로는, 흑백요리사 준우승자인 에드워드 리가 사는 도시로 한국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켄터키 루이빌(Louisville)에서 시작해, 신시내티와 콜럼버스를 차례로 지나며 대각선으로 오하이오를 완전히 관통해 북동쪽의 클리블랜드까지 이어지는 42번 국도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앞마당에는 찰스영 대령(Colonel Charles Young)의 집이 1974년에 국가역사 랜드마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는 동판이 있는데, 1864년에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세번째 흑인으로, 여기 윌버포스(Wilberforce) 대학교의 교수이며 흑인 최초의 군사 무관이자 국립공원 감독관, 그리고 1922년에 사망할 때까지 미군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흑인이었다는 간단한 이력이 적혀있다. 국도변에 좌우로 다른 주택들은 전혀 없는 곳에 이 커다란 집만 너무 깔끔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는데, 아주 최근에 내외부 리노베이션을 마쳤기 때문이다. 정문으로 들어가니까 예상치 못한 방문에도 불구하고, 흑인 레인저가 반갑게 맞아주며 2층의 극장에서 안내영화를 틀어주었는데 공원 홈페이지에서도 바로 보실 수 있다. 영은 노예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가 남북전쟁에 참전하며 가족은 자유인이 되었고, 어려서부터 음악과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지역 고등학교의 유일한 흑인 졸업생이었다. 1883년에 오하이오 주에서 치러진 웨스트포인트 입학시험의 응시자 26명중에 2등의 성적을 받았고, 1등이 지원을 포기한 후에 연방 하원의원의 추천서를 받아서 이듬해 미육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게된다. 육사에서 급우와 교관들에게 극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받았는데, 맨 아래 사진에서 2열의 뒤로 빠져 서있는 사람이 찰스 영 생도(cadet)이다. 그는 19세기에 육사에 입학했던 9명의 흑인들 중 하나로, 1학년 때 수학에서 낙제를 하는 바람에 동기보다 늦은 1889년에 졸업을 해서 3번째이자 마지막 흑인 졸업생이다. (그리고는 거의 반세기가 흘러 1936년에야 4번째 흑인 졸업생이 나옴) 첫번째 졸업생은 인종차별주의 상관의 모함으로 불명예 전역, 두번째는 소위로 재직중 병사했기 때문에, 이 후 영은 진급할 때마다 군대 내 흑인최초의 기록을 매번 갈아치우게 된다. 버팔로 솔저(Buffalo Soldier)는 흑인 군인을 말하는 것으로, 1870년대 인디언이 흑인들의 외모가 버팔로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 굳어졌다. 찰스 영은 당연히 이러한 흑인 부대의 지휘관으로만 계속 배치되었고, 중간에 윌버포스 대학교의 교수와 해외 여러나라의 무관 등을 거쳐서 1917년에 대령까지 진급한다. 문제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그도 자신의 파견을 요청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다수의 백인 장교들이 그의 지휘하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미군은 그에게 별을 달아 유럽으로 보내는 대신에 지병을 이유로 강제로 전역을 시키는 해결 방법을 택한다... 이듬해 복직 신청은 받아들여졌지만 라이베리아 군사 무관으로 발령을 내서 아프리카로 보내졌고, 찰스 영 대령은 나이지리아에서 임무 수행중 병을 얻어 1922년에 라고스에서 57세로 사망했다. 아내와 다른 흑인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1년 후에 유해가 발굴되어 미국으로 돌아왔고, 알링턴 국립묘지 원형극장에서 군사 장례식이 치러지고 거기에 묻혀있다. 이러한 그의 생애에 이어서 유산을 보여주는 설명판들이 나오는데, 위의 가운데 보이는 흑인이 앞서 언급한 육사 4번째 졸업생 Benjamin O. Davis Jr.로 육군 항공대를 거쳐서 공군 중장으로 1970년까지 복무했고 1998년에 예비역 대장 계급을 받았다. 이외에도 우리 세대가 아는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 및 대통령의 얼굴까지 계속 등장을 했다~ 특히 위기주부의 눈길을 끄는 이력으로 1903년에 찰스 영은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책임자(superintendent)로 발령을 받아서, 도로건설 등에서 직전의 3년을 합친 것보다 많은 진척을 보여주는 등 훌륭하게 관리했으며, 이를 기념해서 2004년에 그의 이름을 붙인 세쿼이아 나무가 사진에 보인다. 이상과 같이 10장도 안 되는 분량으로 포스팅을 끝내기는 좀 아쉬운 듯해서, 글을 쓰며 찾아본 사진을 가져와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면... 그가 아쉽게 객사하고 정확히 1백년이 흐른 후에 당시 인종차별로 진급의 장벽이 있었던 점이 인정되어, 2022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그에게 준장 계급이 추서되어 조카 손녀가 대신 별이 달린 계급장을 받는 모습이다. 그리고 지난 2024년 여름에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그를 기리는 나무의 이름판을 지정 20주년을 맞아 교체하는 행사가 열렸을 때의 사진으로, 찰스 영 준장(Brigadier General Charles Young) 나무는 크레센트 메도우(Crescent Meadow)로 들어가는 도로의 다른 유명한 오토로그(Auto Log) 부근에 서있다고 한다. "아~ 그리운 세쿼이아 국립공원..." 글의 첫머리에 찰스 영과 동시대 흑인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이 흑인이라서 국립공원청에서 특별히 더 챙겨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고 했지만, 이 글을 마치며 내리는 결론은... 그 사람들 모두는 21세기의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극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성취를 이룬 위대한 '인간'들이라서 그러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고, 단지 그들의 피부색이 검었기 때문에 흑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오하이오 주 윌버포스(Wilberforce)의 찰스영 버팔로솔져(Charles Young Buffalo Soldiers) 준국립공원
미동부 버지니아로 이사와서 국립공원청이 직접 관리하는 주변의 공원들을 빠짐없이 다녀보니, 노예해방 직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던 흑인을 기리는 곳들이 많다는게 눈에 띄었다. 방문 순서대로 적어보면 Carter Woodson, Mary Bethune, Frederick Douglass, Maggie Walker, Booker Washington, Harriet Tubman, Paul Dunbar 등으로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꼭 붙는 수식어는 '흑인최초'이다. 물론 그 시대의 흑백차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쯤되면 유사한 업적의 백인들은 받지 못하는 국가적 명예를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챙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좀 들기도 했다. 오하이오 주 1박2일 여행을 계획하며 처음 알게된, 그 시대의 또 다른 흑인 선구자를 기리는 준국립공원인 찰스영 버팔로솔져 내셔널모뉴먼트(Charles Young Buffalo Soldiers National Monument)를 찾아왔다. 주정부에서 따로 만든 안내 표지판의 옆으로 보이는 도로는, 흑백요리사 준우승자인 에드워드 리가 사는 도시로 한국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켄터키 루이빌(Louisville)에서 시작해, 신시내티와 콜럼버스를 차례로 지나며 대각선으로 오하이오를 완전히 관통해 북동쪽의 클리블랜드까지 이어지는 42번 국도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앞마당에는 찰스영 대령(Colonel Charles Young)의 집이 1974년에 국가역사 랜드마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는 동판이 있는데, 1864년에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세번째 흑인으로, 여기 윌버포스(Wilberforce) 대학교의 교수이며 흑인 최초의 군사 무관이자 국립공원 감독관, 그리고 1922년에 사망할 때까지 미군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흑인이었다는 간단한 이력이 적혀있다. 국도변에 좌우로 다른 주택들은 전혀 없는 곳에 이 커다란 집만 너무 깔끔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는데, 아주 최근에 내외부 리노베이션을 마쳤기 때문이다. 정문으로 들어가니까 예상치 못한 방문에도 불구하고, 흑인 레인저가 반갑게 맞아주며 2층의 극장에서 안내영화를 틀어주었는데 공원 홈페이지에서도 바로 보실 수 있다. 영은 노예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가 남북전쟁에 참전하며 가족은 자유인이 되었고, 어려서부터 음악과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지역 고등학교의 유일한 흑인 졸업생이었다. 1883년에 오하이오 주에서 치러진 웨스트포인트 입학시험의 응시자 26명중에 2등의 성적을 받았고, 1등이 지원을 포기한 후에 연방 하원의원의 추천서를 받아서 이듬해 미육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게된다. 육사에서 급우와 교관들에게 극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받았는데, 맨 아래 사진에서 2열의 뒤로 빠져 서있는 사람이 찰스 영 생도(cadet)이다. 그는 19세기에 육사에 입학했던 9명의 흑인들 중 하나로, 1학년 때 수학에서 낙제를 하는 바람에 동기보다 늦은 1889년에 졸업을 해서 3번째이자 마지막 흑인 졸업생이다. (그리고는 거의 반세기가 흘러 1936년에야 4번째 흑인 졸업생이 나옴) 첫번째 졸업생은 인종차별주의 상관의 모함으로 불명예 전역, 두번째는 소위로 재직중 병사했기 때문에, 이 후 영은 진급할 때마다 군대 내 흑인최초의 기록을 매번 갈아치우게 된다. 버팔로 솔저(Buffalo Soldier)는 흑인 군인을 말하는 것으로, 1870년대 인디언이 흑인들의 외모가 버팔로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 굳어졌다. 찰스 영은 당연히 이러한 흑인 부대의 지휘관으로만 계속 배치되었고, 중간에 윌버포스 대학교의 교수와 해외 여러나라의 무관 등을 거쳐서 1917년에 대령까지 진급한다. 문제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그도 자신의 파견을 요청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다수의 백인 장교들이 그의 지휘하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미군은 그에게 별을 달아 유럽으로 보내는 대신에 지병을 이유로 강제로 전역을 시키는 해결 방법을 택한다... 이듬해 복직 신청은 받아들여졌지만 라이베리아 군사 무관으로 발령을 내서 아프리카로 보내졌고, 찰스 영 대령은 나이지리아에서 임무 수행중 병을 얻어 1922년에 라고스에서 57세로 사망했다. 아내와 다른 흑인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1년 후에 유해가 발굴되어 미국으로 돌아왔고, 알링턴 국립묘지 원형극장에서 군사 장례식이 치러지고 거기에 묻혀있다. 이러한 그의 생애에 이어서 유산을 보여주는 설명판들이 나오는데, 위의 가운데 보이는 흑인이 앞서 언급한 육사 4번째 졸업생 Benjamin O. Davis Jr.로 육군 항공대를 거쳐서 공군 중장으로 1970년까지 복무했고 1998년에 예비역 대장 계급을 받았다. 이외에도 우리 세대가 아는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 및 대통령의 얼굴까지 계속 등장을 했다~ 특히 위기주부의 눈길을 끄는 이력으로 1903년에 찰스 영은 세쿼이아 국립공원의 책임자(superintendent)로 발령을 받아서, 도로건설 등에서 직전의 3년을 합친 것보다 많은 진척을 보여주는 등 훌륭하게 관리했으며, 이를 기념해서 2004년에 그의 이름을 붙인 세쿼이아 나무가 사진에 보인다. 이상과 같이 10장도 안 되는 분량으로 포스팅을 끝내기는 좀 아쉬운 듯해서, 글을 쓰며 찾아본 사진을 가져와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면... 그가 아쉽게 객사하고 정확히 1백년이 흐른 후에 당시 인종차별로 진급의 장벽이 있었던 점이 인정되어, 2022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그에게 준장 계급이 추서되어 조카 손녀가 대신 별이 달린 계급장을 받는 모습이다. 그리고 지난 2024년 여름에 세쿼이아 국립공원에서 그를 기리는 나무의 이름판을 지정 20주년을 맞아 교체하는 행사가 열렸을 때의 사진으로, 찰스 영 준장(Brigadier General Charles Young) 나무는 크레센트 메도우(Crescent Meadow)로 들어가는 도로의 다른 유명한 오토로그(Auto Log) 부근에 서있다고 한다. "아~ 그리운 세쿼이아 국립공원..." 글의 첫머리에 찰스 영과 동시대 흑인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이 흑인이라서 국립공원청에서 특별히 더 챙겨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고 했지만, 이 글을 마치며 내리는 결론은... 그 사람들 모두는 21세기의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극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성취를 이룬 위대한 '인간'들이라서 그러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고, 단지 그들의 피부색이 검었기 때문에 흑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취임 4개월만에 암살당한 대통령의 집이었던 클리블랜드 외곽의 가필드(James A. Garfield) 국립사적지
올해 트럼프가 제47대로 다시 취임하며 미국 역사상 두번째의 '징검다리 임기' 대통령이 되었다. 그 첫번째는 1885~1897년의 가운데 4년을 뺀 제22·24대를 역임한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였다. 비록 그는 뉴저지 출생에 뉴욕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되어 오하이오(Ohio) 주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1796년에 이리 호(Lake Erie) 연안을 탐험하다 쿠야호가 강(Cuyahoga River)이 호수로 흘러드는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을 처음 만들었던 모세스 클리블랜드(Moses Cleaveland) 장군의 먼 후손이다. 그 마을이 20세기 전반에 인구 1백만의 돈이 넘쳐나는 '철강도시' 클리블랜드(Cleveland)로 발전했지만, 중반 이후 오대호 지역의 제조업 쇠퇴와 함께 현재는 인구 40만명으로 쇠락한 대표적 '러스트 벨트' 도시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는 세계적 명성의 종합병원으로 다시 알려지며 '의료도시'로 탈바꿈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케스트라와 미술관이 유명하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대표적 관광지라지만, 위기주부는 그 모두를 제쳐두고 북동쪽의 멘토(Mentor)라는 위성도시로 향했다. 제임스 가필드 국립사적지(James A. Garfield National Historic Site)는 미국 제20대 대통령이 1880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4년전에 구입한 농장과 저택을 보존하기 위해 1980년에 지정되었다. 그는 남북전쟁 중인 1862년에 처음 하원에 당선되어 대선때가 18년째로,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현직 연방 하원의원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경우이다. 농장의 말과 마차를 보관하던 커다란 캐리지 하우스(Carriage House)를 개조한 비지터센터의 입구로, 계속 내리던 진눈깨비는 그쳤지만 꾸물꾸물한 날씨가 이제 소개할 그의 슬픈 죽음과 맞물려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입구를 장식하는 제임스 A.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대통령의 옆모습으로, 워싱턴DC 내셔널몰에 있는 그의 동상을 찾아봤던 여행기에서 이력을 짧게 소개한 것을 클릭해서 보실 수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힘들게 공부해서 윌리엄스 대학을 졸업하고 고대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를 거쳐 모교의 학장이 되었고, 변호사와 군장교를 거쳐 정치에 입문해 대통령까지 된 정말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마굿간을 개조해서 그런지 비지터센터 내부구조가 좀 특이했는데, 취임선서를 하는 모습의 하얀 동상이 있는 곳에서 오른편 안쪽으로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도서관(Presidential Library)이라면 그냥 특정 대통령의 기념관을 좀 우아하게(?) 부르는 표현으로 인식되지만, 여기는 그가 암살되고 4년후인 1885년에 계속 여기에 거주하던 미망인이 집의 일부를 그가 문학교수와 변호사로 일하며 소유했던 책들을 모아서 따로 공개하는 공간으로 만들었기에, 공식적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 도서관으로 인정되는 유적지이다. 인문학자답게 남북전쟁을 노예제에 대항하는 성전으로 인식해서, 스스로 의용군을 조직해서 북군에 합류해 서부전선의 최대 격전이었던 치카모가 전투(Battle of Chickamauga) 등에서 활약해 명성을 얻기도 했다. (다른 오하이오 출신의 미래 대통령이 두 명이나 참전했던 동부전선 버지니아 지역의 전투에 대한 포스팅을 보시려면 클릭) 다음으로 대통령 선거와 취임식 등을 보여주는데, 제일 왼쪽에 빨간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당시 선거운동원 모습이란다. 공화당 내 급진파였던 가필드는 선거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최대파벌의 지원을 받는 대신에 부통령 후보로 그쪽 계파 사람을 골랐고, 당선되면 상대 파벌에도 요직을 준다는 조건에 합의해야만 했다. 그 결과로 아주 근소한 차이로 대선에서 승리해서 1881년 3월에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대통령이 된 가필드는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엽관제가 만연한 당시의 부패한 공직사회를 일소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 파벌에 행정부 요직을 준다는 약속도 지킬 수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Charles J. Guiteau가 불과 취임 4개월만에 기차역에서 그의 등 뒤에 두 발의 총격을 가했다. 문제는 자신이 가필드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믿었던 암살범은 정치판 주변을 기웃거리는 과대망상증 환자였고,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 자신은 사면될거라 주장했지만, 약 1년 후에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총알 하나가 몸에 박힌 상태로 가필드는 2개월 이상을 병석에 누워 있다가 패혈증이 겹치면서 결국 사망했는데, 안타깝게도 의사들이 무리하게 총알을 찾으려다가 병세가 오히려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단다. 마지막에는 병상에 누운 상태로 백악관을 떠나 기차를 타고 뉴저지 바닷가 휴양지로 향했다가 거기서 사망하는데, 당시 덜컹거리는 기차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철망으로 특수 제작되었던 매트리스 실물이란다. 이외에도 사망 후에 제작한 데드마스크와 손의 모형 등도 유리함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앞서 링크로 소개한 그의 동상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학자, 군인, 정치가로서 모두 역량을 보여준 훌륭한 인물이었기에, 만약 암살되지 않았다면 대통령으로 어떤 업적을 이루고 또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가, 짧은 안내영화를 보면서 계속 궁금했다~ 저택의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 이 날의 마지막 무료 가이드투어에 20분 정도 기다리면 참여가 가능했지만, 예약해 놓은 숙소까지 또 2시간을 더 운전해서 가야했기 때문에, 그냥 혼자 집 주위만 둘러보고는 떠나기로 했다. 가필드 사망 후에도 많은 확장과 시설 추가를 거친 후에, 자녀들에 의해서 1936년에 클리블랜드 역사학회에 기증되었다가, 국립사적지로 지정된 후에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면서, 19세기 미국 대통령 유적지들 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복원되고 세부묘사가 뛰어난 실내로 여겨진단다. 본채 옆으로는 대선 때 선거운동 본부로 사용되었던 작은 별채인 캠페인오피스(Campaign Office)가 있어서,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짝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상당히 독특한 외관의 1895년에 추가된 풍차(Windmill)는 곡식을 빻는 용도가 아니라, 창문이 보이는 2~3층의 안에 있는 커다란 저수조의 물을 지하로 매설된 파이프를 통해 저택 꼭대기의 작은 물탱크로 보내는 역할을 했단다. 이외에 마굿간 옆으로는 지하 가스전에서 나오는 연료를 보관해서 집의 난방과 취사에 사용하기 위해 1885년에 설치된 가스홀더(Gasholder) 건물도 있었다. 이상으로 또 한 명의 미국 대통령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는 대각선으로 오하이오의 중심을 향하는 71번 고속도로를 따라 주도인 콜럼버스(Columbus)로 향했다. 시간이 있었으면 사진 가운데 빌딩의 뒤에 위치한 주청사라도 잠깐 구경하고 싶었지만, 도심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나왔을 때는 사진보다 더 어두워진 저녁에 겨울비까지 내리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바로 외곽순환 270번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도시 북서쪽의 예약한 모텔로 향했다. 따로 저녁 먹을 곳을 찾기도 귀찮을 것 같아 미리 준비해간 즉석밥에 팝콘과 맥주를 후식으로 먹고는 바로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도 방에서 간단히 해결하고는 이미 블로그에 소개한 1시간 거리의 미공군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취임 4개월만에 암살당한 대통령의 집이었던 클리블랜드 외곽의 가필드(James A. Garfield) 국립사적지
올해 트럼프가 제47대로 다시 취임하며 미국 역사상 두번째의 '징검다리 임기' 대통령이 되었다. 그 첫번째는 1885~1897년의 가운데 4년을 뺀 제22·24대를 역임한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였다. 비록 그는 뉴저지 출생에 뉴욕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되어 오하이오(Ohio) 주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1796년에 이리 호(Lake Erie) 연안을 탐험하다 쿠야호가 강(Cuyahoga River)이 호수로 흘러드는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을 처음 만들었던 모세스 클리블랜드(Moses Cleaveland) 장군의 먼 후손이다. 그 마을이 20세기 전반에 인구 1백만의 돈이 넘쳐나는 '철강도시' 클리블랜드(Cleveland)로 발전했지만, 중반 이후 오대호 지역의 제조업 쇠퇴와 함께 현재는 인구 40만명으로 쇠락한 대표적 '러스트 벨트' 도시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는 세계적 명성의 종합병원으로 다시 알려지며 '의료도시'로 탈바꿈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케스트라와 미술관이 유명하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대표적 관광지라지만, 위기주부는 그 모두를 제쳐두고 북동쪽의 멘토(Mentor)라는 위성도시로 향했다. 제임스 가필드 국립사적지(James A. Garfield National Historic Site)는 미국 제20대 대통령이 1880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4년전에 구입한 농장과 저택을 보존하기 위해 1980년에 지정되었다. 그는 남북전쟁 중인 1862년에 처음 하원에 당선되어 대선때가 18년째로,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현직 연방 하원의원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경우이다. 농장의 말과 마차를 보관하던 커다란 캐리지 하우스(Carriage House)를 개조한 비지터센터의 입구로, 계속 내리던 진눈깨비는 그쳤지만 꾸물꾸물한 날씨가 이제 소개할 그의 슬픈 죽음과 맞물려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입구를 장식하는 제임스 A.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대통령의 옆모습으로, 워싱턴DC 내셔널몰에 있는 그의 동상을 찾아봤던 여행기에서 이력을 짧게 소개한 것을 클릭해서 보실 수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힘들게 공부해서 윌리엄스 대학을 졸업하고 고대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를 거쳐 모교의 학장이 되었고, 변호사와 군장교를 거쳐 정치에 입문해 대통령까지 된 정말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마굿간을 개조해서 그런지 비지터센터 내부구조가 좀 특이했는데, 취임선서를 하는 모습의 하얀 동상이 있는 곳에서 오른편 안쪽으로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도서관(Presidential Library)이라면 그냥 특정 대통령의 기념관을 좀 우아하게(?) 부르는 표현으로 인식되지만, 여기는 그가 암살되고 4년후인 1885년에 계속 여기에 거주하던 미망인이 집의 일부를 그가 문학교수와 변호사로 일하며 소유했던 책들을 모아서 따로 공개하는 공간으로 만들었기에, 공식적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 도서관으로 인정되는 유적지이다. 인문학자답게 남북전쟁을 노예제에 대항하는 성전으로 인식해서, 스스로 의용군을 조직해서 북군에 합류해 서부전선의 최대 격전이었던 치카모가 전투(Battle of Chickamauga) 등에서 활약해 명성을 얻기도 했다. (다른 오하이오 출신의 미래 대통령이 두 명이나 참전했던 동부전선 버지니아 지역의 전투에 대한 포스팅을 보시려면 클릭) 다음으로 대통령 선거와 취임식 등을 보여주는데, 제일 왼쪽에 빨간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당시 선거운동원 모습이란다. 공화당 내 급진파였던 가필드는 선거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최대파벌의 지원을 받는 대신에 부통령 후보로 그쪽 계파 사람을 골랐고, 당선되면 상대 파벌에도 요직을 준다는 조건에 합의해야만 했다. 그 결과로 아주 근소한 차이로 대선에서 승리해서 1881년 3월에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대통령이 된 가필드는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엽관제가 만연한 당시의 부패한 공직사회를 일소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 파벌에 행정부 요직을 준다는 약속도 지킬 수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Charles J. Guiteau가 불과 취임 4개월만에 기차역에서 그의 등 뒤에 두 발의 총격을 가했다. 문제는 자신이 가필드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믿었던 암살범은 정치판 주변을 기웃거리는 과대망상증 환자였고,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 자신은 사면될거라 주장했지만, 약 1년 후에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총알 하나가 몸에 박힌 상태로 가필드는 2개월 이상을 병석에 누워 있다가 패혈증이 겹치면서 결국 사망했는데, 안타깝게도 의사들이 무리하게 총알을 찾으려다가 병세가 오히려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단다. 마지막에는 병상에 누운 상태로 백악관을 떠나 기차를 타고 뉴저지 바닷가 휴양지로 향했다가 거기서 사망하는데, 당시 덜컹거리는 기차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철망으로 특수 제작되었던 매트리스 실물이란다. 이외에도 사망 후에 제작한 데드마스크와 손의 모형 등도 유리함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앞서 링크로 소개한 그의 동상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학자, 군인, 정치가로서 모두 역량을 보여준 훌륭한 인물이었기에, 만약 암살되지 않았다면 대통령으로 어떤 업적을 이루고 또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가, 짧은 안내영화를 보면서 계속 궁금했다~ 저택의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 이 날의 마지막 무료 가이드투어에 20분 정도 기다리면 참여가 가능했지만, 예약해 놓은 숙소까지 또 2시간을 더 운전해서 가야했기 때문에, 그냥 혼자 집 주위만 둘러보고는 떠나기로 했다. 가필드 사망 후에도 많은 확장과 시설 추가를 거친 후에, 자녀들에 의해서 1936년에 클리블랜드 역사학회에 기증되었다가, 국립사적지로 지정된 후에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면서, 19세기 미국 대통령 유적지들 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복원되고 세부묘사가 뛰어난 실내로 여겨진단다. 본채 옆으로는 대선 때 선거운동 본부로 사용되었던 작은 별채인 캠페인오피스(Campaign Office)가 있어서,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짝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상당히 독특한 외관의 1895년에 추가된 풍차(Windmill)는 곡식을 빻는 용도가 아니라, 창문이 보이는 2~3층의 안에 있는 커다란 저수조의 물을 지하로 매설된 파이프를 통해 저택 꼭대기의 작은 물탱크로 보내는 역할을 했단다. 이외에 마굿간 옆으로는 지하 가스전에서 나오는 연료를 보관해서 집의 난방과 취사에 사용하기 위해 1885년에 설치된 가스홀더(Gasholder) 건물도 있었다. 이상으로 또 한 명의 미국 대통령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는 대각선으로 오하이오의 중심을 향하는 71번 고속도로를 따라 주도인 콜럼버스(Columbus)로 향했다. 시간이 있었으면 사진 가운데 빌딩의 뒤에 위치한 주청사라도 잠깐 구경하고 싶었지만, 도심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나왔을 때는 사진보다 더 어두워진 저녁에 겨울비까지 내리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바로 외곽순환 270번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도시 북서쪽의 예약한 모텔로 향했다. 따로 저녁 먹을 곳을 찾기도 귀찮을 것 같아 미리 준비해간 즉석밥에 팝콘과 맥주를 후식으로 먹고는 바로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도 방에서 간단히 해결하고는 이미 블로그에 소개한 1시간 거리의 미공군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