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스님 극락왕생

예전에 영화 공부 할 무렵

By  | 2017년 6월 28일 | 
수강할 과목을 훑어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라캉주의 관련 수업이 하나 있다.학교를 다니는 내내 정신 분석을 공부한 것 같다. 고등학생 때 처음 지젝을 접하고 프랑스 철학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6~7년째다. 4년 전만 하더라도 모두가 냉소주의로 글을 쓰지 않았나 싶은데 이제 라캉과 지젝은 빈정대기 제일 쉬운 이름이 됐다. 2달 전 <매드 맥스> 평문이 논란이 됐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택광 선생의 모든 글은 문화 연구의 방법론이 사회 현상을 과잉해석하며 읽기도 전에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2000년대에 정성일 선생이 쓰던 평문의 결론 부분만 뚝 떼어 놓은 모양새같다. 오늘날에도 라캉-지젝주의 비평을 하는 분들은 영화의 모든 요소를 정신

386의 문화정치학은 엿먹어라!

By  | 2017년 6월 28일 | 
퇴행하는 남성성, 386의 문화 정치학 나는 386 세대에 관한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의도가 삐뚤게 이해되더라도,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밝히면서 시작하고 싶다. 부모는 1960년대생이지만, 386 세대의 바깥에 위치한 노동계급 출신이었고, 때문에 나는 386 세대가 1960년대생 전반을 과잉대표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386이 1987년의 광장에 기원한 문화 정치학을 통해 발언권을 획득하는 동안, 내 부모와 그들이 속한 정치적 계층은 하나의 세력으로 결속하지 못했다. 이 뿐만 아니다. 386 세대는 그들 자신을 혁명 전사이자 계몽주의 철학자로 자임했는데 이 때 계몽과 혁명적 교육의 대상이 된 건 내 부모와 같은 비(非) 386이었다. 어떻게 보면 같은

<액트 오브 킬링>에 관해서

By  | 2017년 6월 28일 | 
<액트 오브 킬링>에 관한 반응을 살피다가, 이 다큐멘터리를 관객의 반성을 유도하고 계몽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주장을 읽었다. 우스운 얘기다. 그 평자는 이 영화를 반성하지 않는 학살자의 모습을 냉혈한의 눈으로 담아냈고 그로 인해 관객들이 제 자신을 성찰하게끔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에게는 대상과 관찰자, 그리고 작품 사이의 거리를 세심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액트 오브 킬링>은 거리 설정에 완전히 실패했고, 그 덕분에 흥미로운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어쨌든 다큐멘터리로써는 구제할 길이 없는 작품이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거리는 3세계의 학살자와 1세계의 양심적 다큐멘터리스트의 거리와 동일하다. 감독은 학살자를 반성을 거부

20151005 정성일과 서울, 영화

By  | 2017년 6월 28일 | 
우리는 서울에서 온갖 영화를 보고 있다. 정성일 평론가가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영화들이 점점 줄고 있다고 말할 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서울에서 페드로 코스타와 몬테이로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저번 토요일에 라브 디아즈를 볼 수 있었다. 이제 얼마 뒤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필립 가렐전을 한다. 그리고 매년마다 홍상수도 볼 수 있고...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정성일 평론가에게 서울이란 프랑스 문화원에서 관람한 <기관총 부대>와 장철 영화를 보았던 유년기의 기억에 다름 아닐테니,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번 학기엔 59년 서울 출생의 영화 평론가의 수업을 듣는다. 영화에 대한 과도한 헌사, 전투적 태도, 끝없는 동어반복(쇼트는 A, B, C다..

우디앨런에 대해서

By  | 2017년 6월 28일 | 
우디 앨런을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망설이다가 답할 것 같다. 우디 앨런은 의외로 영화적 평가가 갈리는 영화감독이고 그에게 호의를 표하면, 씨네 큐브 풍 아트 하우스 영화를 보는 속물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정말 속물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부부일기>를 보고 나니 우디 앨런의 70, 80년대는 거의 다 훑었다 싶었고 나름대로의 평가 비슷한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충 이 영감님의 영화들은 얼개가 비슷하다. 두 커플이 이리저리 엮이다가 연인들의 위치가 뒤바뀌었지만 정작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 그런 이야기인데,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코미디던 냉정하기 짝이 없는 실내극이던 비슷한 리듬을 지녔다. 나는 우디 앨런이 잉마르 베리만이나 페데리코 펠리니를 참조하는 부분이 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