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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을 쓴 소녀(La religieuse, The Nun, 2013)
감 독 : 기욤 니클루 / 114분 출 연 : 폴린 에티엔, 이자벨 위페르 관람일 : 2014.01.28 원작 소설도 영화도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던 작품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말고. 줄거리만 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작품을 보고 나니 왜 그런지는 알 것 같았다. 카톨릭이 베이스인 나라라면, 이건 사회고발적인 성격의 작품으로 낙인찍힐 수 밖에 없다. 막 꽃봉오리가 피어나려는 소녀에게 그녀의 가족은 수녀가 되기를 강요한다. 형부가 은근한 추파를 던지기도 했고, 가세가 기울어져 지참금을 줄 수 없기도 했으며, 어머니의 죄의 씨앗이기도 했으니까(가족은 모르고 집안 신부만 안다고 했지만 뉘앙스가 다들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다고 봐야 하려나). 수녀원의 부드러운 강요와 집안의 강압적인 강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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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osts[베일을 쓴 소녀] 누가 아버지인가?
수녀원에서 탈출하자 곧 아버지는 죽는다.사실상 수녀원에서 감금 생활을 하고 있는 수잔에게 아버지는 두 명이다. 1) 친아버지는 하느님을 유비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모두가 신의 뜻을 참칭하는 가운데 그는 침묵 속에서 딸의 고백에 귀기울이고, 딸의 소망을 이뤄주고, 딸을 구원한 후 결국 사라진다. 애초에 수잔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며, 거의 대부분이 몰랐으며, 지금도 어떤 이들은 모른다. 2) 양아버지, 세 명의 수녀원장들 모두 교회를 유비하는 장치들이다. 누구도 “살려달라”는 수잔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듣더라도 이뤄줄 수 없다. 영화 상에서 그건 교황이라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가슴으로 써 내려와 수신자를 기다리는 ‘고백’이 있다. 신이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들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
2013 씨네큐브 예술영화 프리미어 페스티벌 후기
01 잔뜩 심술이 나 있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또 일정한 양을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어떻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시간표 대로 움직이는 자동 로봇이라면 충분히 배터리를 충전하고 극장에서 영화만 보면 될 뿐 아닌가. 그렇지만 아니다.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일단 영화가 충분히 힘이 없으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자동적으로 눈부터 감긴다. 가장 기분이 상했던 것은 한 시간 이상 영화를 보면서 졸았는데 내용이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도대체 서사를 넘어 이미지로 그릴 수 있는 시간의 범위란 무엇이란 말인가. 고무줄처럼 늘어난 감정의 시간을 얼마나 견뎌내야 하는 것인가. 그 점에서 화가 났다. 말 그대로 자기 감정에 놀아나는 것 아닌가. 호흡이 느려진다는 건 그 감정의 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