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 주의 하퍼스페리 국립역사공원(Harpers Ferry National Historic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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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 주의 하퍼스페리 국립역사공원(Harpers Ferry National Historical Park)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 주의 하퍼스페리 국립역사공원(Harpers Ferry National Historical Park)

미국의 50개 주들 중에서 '동서남북'의 영어단어가 이름에 들어간 주는 North & South Carolina와 North & South Dakota, 그리고 West Virginia의 딱 5개 주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문은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와 짝인 버지니아 주의 이름은 왜 East Virginia가 아니고, 그냥 Virginia일까?"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남북으로 구분되어서 함께 사이좋게 미연방에 각각 가입한 앞의 두 쌍과는 달리, 웨스트버지니아는 미국이 남북전쟁 중이던 1863년에 남부 동맹(Confederacy)에 속했던 버지니아 주의 북서부 공업지역이 독립해 나와서, 따로 북부 연합(Union)에 새로운 주로 가입을 했기 때문이다. 현재 위기주부가 살고있는 버지니아(Virginia) 주를 중심으로 주변의 다른 주들을 보여주는 지도인데, 북쪽의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와 메릴랜드(Maryland)를 보면 주경계가 마치 직소퍼즐을 끼워서 맞춘 것처럼 특이하게 들쭉날쭉한 것이 보인다. 이사 와서 처음으로 점심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서 2월 중순의 나들이를 떠난 곳은 위의 지도에서 그 3개의 주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마을인 하퍼스페리(Harpers Ferry)이다. 그 마을은 구시가지인 로워타운(Lower Town)과 주변의 언덕 등이 모두 1944년부터 하퍼스페리 국립역사공원(Harpers Ferry 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여름에 찍은 구글 스트리트뷰 사진을 가져온 것임) 깊은 산골이지만 연간 5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국립공원이라서 마을 외곽에 1천대를 수용하는 큰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고, 공원 입장료도 차 1대당 $20을 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국립공원 연간회원권을 보여주고 그냥 통과~ 날씨가 추워서 차 안에서 점심 도시락을 까먹고 비지터센터에서 공원브로셔와 지도를 받은 후에 마을로 들어가는 셔틀버스에 탑승을 하는 모습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즉, 여기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기 위한 주차장이라고 보는 것이 맞고, 실제 역사공원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는 안내소와 기념품 판매 등은 모두 구시가지의 건물들에 나누어져 있다. 로워타운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리니 제퍼슨의 말이라는 "Worth a voyage across the Atlantic"과 함께 공원에 대한 소개와 사진이 안내판에 보인다. 강 건너 언덕에서 내려다 본 강물에 둘러싸인 이 마을의 모습은, 아래와 같이 연말에 딸이 선물 받았던 내셔널지오그래픽 <100 Parks, 5000 Ideas> 책에도 전체사진으로 등장할 만큼, 미동부를 대표하는 자연의 풍경으로 유명하다. 대서양을 건너와서 구경을 해야 할 정도의 절경은 아니지만, 위와 같이 특히 가을단풍이 들었을 때의 모습이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에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겨울의 끝자락인 2월 중순이었다... 흑흑~ 국립공원청에서 직접 관리하는 구시가지의 건물들은 각각의 용도로 활용되고 있는데, Bookshop과 Fancy Goods 간판이 붙은 건물은 기념품 가게로, 그 옆 건물은 1800년대 소총을 제작하던 공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Industry Museum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너편 두 곳은 돌아오는 길에 들렀고 먼저 도로 이 쪽에 있는 역사를 소개한 전시실을 구경했다. 이 곳은 이름에서 유추가 가능하듯이 1747년에 Robert Harper가 강을 건너는 페리를 운항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작은 마을이었지만, 1796년에 사진 제일 왼편의 미국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이 이 곳에 미군이 사용하는 총기류를 제작하는 병기창을 건설하기로 한다. 상류의 철광석과 석탄을 배로 운송해 와서 두 개의 강이 제공하는 풍부한 수력으로 총을 만들고, 다시 하류에 있는 수도까지 배로 운송하면서 이 곳은 공업도시로 발전을 했다. 그러다가 1859년에 급진적 노예해방론자였던 존 브라운(John Brown)이 (가운데가 젊었을 때, 왼쪽 두번째가 말년 모습) 흑인들의 무장을 위해서 여기 무기고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노예제에 대한 남과 북의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결국 1861년에 연방군이 주둔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섬터 요새를 남부군이 습격하면서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강가에 주춧돌만 남아 있는 여기가 당시 무기고(arsenal)의 자리이고, 주변에 요새와 건물들의 잔해가 남아있다. 결국 모두 파괴되기는 했지만 병기창과 무기고가 있는데다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남북전쟁 중에 격전지가 되어서 1865년에 전쟁이 끝날때까지 무려 10번 이상 이 곳의 점령군이 바뀌었단다... 역사공부는 일단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땅끝으로 걸어가 풍경을 감상해보자~ 사진 왼편에서 흘러와 가운데 멀리 흘러가는 누런 흙탕물이 본류인 포토맥 강(Potomac River)이고, 오른편에서 흘러와 합류하는 청록색의 맑은 물이 쉐난도어 강(Shenandoah River)이다. 이렇게 두 강이 합쳐져서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DC로 흘러가므로, 이 곳을 '미국판 양수리'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강물에 의해 끊기기는 했지만 앞에 보이는 언덕들이 블루리지 산맥(Blue Ridge Mountains)이니까, 유명한 존 덴버의 노랫가사가 어쩌면 여기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노래에 대해서는 웨스트버지니아를 처음 밟았던, 작년의 2차 대륙횡단 여행기에서 소개할 예정) 또한 여기는 남부 조지아(Georgia)에서 북동부 메인(Maine) 주까지 연결되는 약 2,100마일의 국가경관로(National Scenic Trail, NST)인 애팔래치안 트레일(Appalachian Trail)이 지나는 곳이다. 특히 안내판에 알 수 있듯이 전체 트레일의 거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Appalachian Trail Conservancy 본부 겸 비지터센터가 여기 하퍼스페리에 있다. 애팔래치안 트레일은 우리가 자동차로 건너왔던 버지니아 쪽 다리로 쉐난도어 강을 건너 웨스트버지니아의 이 마을을 통과하고, 다시 이 오래된 철교를 따라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 주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사진을 찍어줬는데, 밖에서도 마스크를 하고있는 이유는 강바람에 얼굴이 추웠기 때문이다. 거기에 필수품인 털모자까지... 이 추운 겨울은 언제 끝나는거야? 참, 뒤로 보이는 로워타운까지도 직접 차를 몰고 올 수는 있는데, 기차역 등에 마련된 공영주차장들도 모두 NPS가 관리하는 곳이라서 공원 입장료 $20을 자율적으로 내는 것이 원칙이다. 철교가 바로 이어지는 터널의 앞에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는 것으로 봐서, 오래된 철로지만 지금도 비정기적으로 화물열차 등이 다니는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정면의 바위산을 돌아서 올라가면, 앞서 보여드린 책에 나온 사진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절벽 위의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하지만, 하이킹은 우리 나들이 계획에 없었던 관계로 그냥 여기서 돌아섰다. 마을의 오르막길을 따라서 하퍼스페리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인 1833년에 지어진 St. Peter's Roman Catholic Church까지 올라왔는데, 남북전쟁 중에 당시 5개의 교회들 중에서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건물이라고 한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 아침 9시반에 예배가 열린다고 되어 있지만, 우리가 간 오후에는 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를 구경할 수는 없었다. 그 옆으로 이 돌계단의 애팔래치안 트레일을 따라서 언덕 위로 더 올라가면 이 곳의 마지막 구경거리가 나온다. 오른편에 보이는 폐허는 St. John's Episcopal Church가 남북전쟁 중에 파괴된 모습이고, 정면에 보이는 멋진 가정집은 전후 1887년에 만들어져서 1962년까지 개인소유였다가, 지금은 Potomac Appalachian Trail Club에 기증되어서 A.T. 하이커들의 유료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버지니아 출신의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1783년에 이 언덕에 올라서 '엄청난 풍경(stupendous scene)'이라고 불렀다는데, 저 멀리 사람들이 있는 곳에 특이하게 놓여진 바위가 제퍼슨락(Jefferson Rock)이다. 참, 제퍼슨 대통령은 미국 2달러 지폐의 앞면 모델인데, 문제는 2달러 지폐를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므로, 얼굴이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서 보시기 바란다. 그레이스 켈리를 모나코의 왕비로 만들었다는 행운의 미국 2달러 지폐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일까? 두 개의 납닥한 바위가 원래는 그냥 아슬아슬하게 포개져 있어서, 올라가서 흔들면 위에 큰 바위가 조금씩 움직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속 흔들어서 위에 바위가 완전히 굴러 떨어질 상황이 되자, 1855~60년 사이에 동네 사람들이 저렇게 4개의 기둥을 만들어서 받쳐놓은 것이라 한다. 그리고 지금은 저 위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국립공원청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없이, 명당 자리에 앉아서 제퍼슨의 정기를 받는 포즈로 열심히 사진을 찍으시던 여성분~ 여기서 두 강이 합류해서 흘러가는 동쪽 방향으로 바라본 이 모습을 일러스트로 만든 자석과 엽서 등이 기념품 가게에 많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반대편으로 애팔래치안 트레일을 따라 더 걸어서 마치 쓰루하이커(thru-hiker)인 것처럼 트레일 본부 건물 앞에서 인증사진도 남기고,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서 돌아갈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냥 아무 말 않고 왔던 길로 돌아서 셔틀버스를 타러 내려갔다. 북스토어 간판을 달고있는 건물답게 기념품가게에는 남북전쟁과 특히 여기서 만들었던 당시 총기류에 관한 책들이 많았다. 미동부에서 "아는만큼 보이는" 여행을 다니려면 미국의 역사공부는 정말 필수라 할 수 있고, 다녀와서 이렇게 블로그에 여행기를 쓰는데도 옛날 LA에 살 때보다 시간이 엄청 더 걸리는데, 이 수고를 알아주시는 분이 계실랑가 모르겠다~ T_T 함께 셔틀버스를 기다리던 다른 분들의 복장을 보니 이 날 우리만 추웠던 것이 아니었다.^^ 다음에 날씨가 풀리고 나무에 잎들이 파랗게 돋아나면, 도시락과 간식을 배낭에 넣어와서 애팔래치안 트레일도 더 걸어보고, 강 건너 언덕의 전망대까지도 올라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위기주부가 5번째로 방문한 미국의 국립역사공원(National Historical Park)인 하퍼스페리(Harpers Ferry) NHP의 구경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리스버그 프리미엄아울렛(Leesburg Premium Outlets)으로 향했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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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 지역에서 인기있는 하이킹인 C&amp;O운하 국립역사공원 내의 빌리고트(Billy Goat) 트레일 A구간

공원의 트레일을 사진 찍으려고 후다닥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메고 제대로 된 하이킹을 한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를, 작년 여름의 아이슬란드 여행 기간은 제외하고 따져보니까, 재작년 겨울에 어떤 바위산을 오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때 하이킹이 버지니아 주 전체에서도 유명한 코스였다면 이번에는 DMV, 즉 워싱턴DC 도시권에서 가장 인기있다 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마침내 여기까지 정복(?)을 하고나니까, 이 동네에 살면서는 이제 더 새롭게 갈만한 곳이 남지를 않았다는 불안감이 갑자기 엄습해온다~ 강 건너 메릴랜드 주의 체사피크-오하이호 운하(Chesapeake and Ohio Canal) 국립역사공원을 3년만에 다시 찾았는데, 이번에는 공원 입구 전에 나오는 앵글러스(Anglers) 주차장을 이용했다. 그 때도 이 단어의 뜻이 뭘까 궁금해하며 그냥 넘어갔던게 생각이 나서 이번에 찾아보니까 '낚시꾼'을 이렇게 부른단다. 주차장에서 바로 옛날 운하를 건너는 보행교가 나오는데, 몇일 전에 낮기온이 섭씨 30도 가까이 올라간 적이 있어서 그런지 한여름용 경고판을 벌써 꺼내 놓았다. 다리를 건너서는 일단 오른편으로 보이는 배를 끌던 평평한 예인로(towpath)를 따라 상류쪽으로 올라간다. GPS앱으로 기록한 이 날의 보라색 경로가 빌리고트 트레일 A구간(Billy Goat Trail - Section A)으로, 강변을 따라서는 남쪽으로 일방통행을 하는 것이 원칙이며 그 길만 애완견의 출입이 금지된다. (하류쪽으로 비슷한 형태의 B구간과 C구간이 따로 있음) 그리고 역사공원 입구를 지나면 나오는 메인 주차장에서 섹션A 입구가 더 가깝지만 거기는 입장료를 내야하기 때문에 Anglers에 주차를 한 것이다. 입장료를 못 내는 이유는 직전의 블로그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으므로 생략... 거의 200년전에 인공적으로 건설된 뱃길이 넓어지는 곳에 놓여진 이 다리가 그 옛날에도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운하를 통행하는 배를 올리고 내리는 갑문(lock)은 모두 그 때 만들어진 것인데, C&O운하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여기를 클릭해서 3년전의 방문기를 보시면 된다. 전체 75개의 갑문 중에서 위 사진은 하류쪽에서부터 헤아려서 15번째 갑문이고,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오는 16번째는 갑문지기(Lockkeeper)가 살던 집도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위쪽에 '지붕이 있는 다리(?)'로 운하를 건너도록 해놓은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복습을 해보니까... 이것은 그냥 다리가 아니라 '스톱게이트(Stop Gate)'라는 수위조절 장치로, 저 안에 차단문과 도르래가 설치되어서 홍수가 나면 나무판을 내려 물을 막아서 하류쪽으로 흐르는 유량을 줄여 운하시설에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로 당시 만들어졌단다! 거기를 지나면 바로 이 날의 트레일 입구가 나오는데, 국립 공원답게 안내판 등이 아주 잘 만들어져 있다. 왼쪽의 안내판으로 여기가 곰섬(Bear Island)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옛날에는 정말로 곰이 살았을까?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처음에는 나무와 바위에 방향을 알려주는 하늘색 표식을 너무 많이 해놓아서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조금만 지나서는 표식이 없으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를 정도로 바윗길이 험해지다가... 포토맥 강이 가장 좁아지는 협곡인 매더고지(Mather Gorge)의 절벽끝이 바로 나왔다! 바로 건너편의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트레일을 예전에 했던 모습은 여기를 클릭해서 보실 수 있고, 여기서부터 한동안은 이 울퉁불퉁 위험하게 솟은 바위들을 밟으며 걸어야 하기 때문에 접지력이 좋은 등산화가 정말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고비를 넘기고 나오는 평탄한 길의 삼거리에 친절하게도 또 세워놓은 경고문이다.^^ 지금 지나온 바윗길보다 더 험한 암벽인 '트래버스(Traverse)'라는 놈이 앞에 있으니, 아니다 싶으면 지금 포기하고 왼편의 노란 블레이저 표식을 따라서 안전하게 샛길로 빠져서 예인로로 돌아가라는 말씀이다. 경고문을 무시하고 계속 직진하면 이렇게 강가까지 일단 내려오게 되고, 왼쪽 멀리 작게 하늘색 표식이 그려진 절벽이 바로 그 놈이다. 이른 봄날의 평일이라서 모델을 할 다른 사람들도 전혀 없어서, 이 사진으로는 얼마나 되는 높이에 어떤 경사인지 감이 잘 오지 않을 것이므로, 공원 관리자가 예전에 페북에 직접 올려 놓았던 사진을 아래에 가져와 보여 드린다. 거의 에베레스트의 '힐러리 스텝'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모습이 여름철에는 주말마다 벌어지는 곳이란다. 앞쪽의 바위에 걸터 앉은 두 여성분은 조금 전의 경고문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계실 듯... 가뿐하게 네 발로 기어서 높이 50피트의 트래버스의 정상까지 올라와 뒤돌아 보니, 이 날은 사람이라고는 힘차게 카누를 몰고 상류쪽으로 올라가는 한 명 뿐이었다.^^ 여기서 트레일 이름의 유래를 밝혀드리면... 1919년부터 워싱턴 하이커 클럽이 이 등산로를 개척하면서 '수컷 산양(billy goat)'처럼 바위를 잘 타야하는 길이라고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단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이번에는 엉덩이를 붙이고 급경사 바위를 내려오면 퍼플호스 비치(Purplehorse Beach)라 불리는 제법 넓은 모래사장이 나오는데, 과거에는 여기 모래가 보랏빛을 띄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리고 이름은 비치지만 강이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흐르는 곳이라서 수영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좀 전에 상류쪽으로 올라가던 분이 그레이트폴 아래에서 배를 돌려서 이제는 하류쪽으로 열심히 노를 저으며 앞으로 지나갔다. 그리고는 맞은편에서 일방통행 규칙을 어기고 혼자 걸어오는 여성분과 마주쳤는데... 순찰을 도는 파크레인저였다~ 그리고 지대가 높은 운하쪽에서 강으로 흘러드는 개울을 다리로 건너기도 했는데, 비록 퍼밋을 보여달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여성 레인저와 마주치고 또 이런 통나무를 건너게 되니까, 정확히 딱 10년이나 지난 존뮤어 트레일의 추억이 떠올랐다... "JMT의 남은 두 구간은 언제 해보나?" 앞서 트레일맵에 Overlook 2라 표시된 마지막 강가의 높은 바위에 올라서 포토맥강이 꺽이는 쪽을 바라본 후에, 늙어가는 모습도 남겨두려고 셀카도 하나 올려 놓는다. 5월말에 조카 결혼식 참석할 때는 정말로 염색을 한 번 해야겠다는...ㅎㅎ 그리고는 다시 평탄한 토우패스(towpath)를 만나서 오른편의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약 4마일의 빌리고트 트레일 A구간의 하이킹을 모두 마쳤다. 이후에 일부러 포토맥의 강변북로라 할 수 있는 클라라바튼 파크웨이(Clara Barton Parkway)를 달려서 워싱턴DC의 벚꽃을 구경한 것은 이미 보여드렸고... 이 다음의 하이킹도 바로 이어진 주말에 홀로 떠났던 2박3일 여행에서 또 4시간을 걷게 된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사라토가(Saratoga) 국립역사공원에서 영국군이 항복한 장소, 필립 스카일러 장군의 집, 그리고 기념비

내년 2026년은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홀에서 미국이 공식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지 250주년(Semiquincentennial)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미국의 혁명 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은 1775년 4월 19일의 렉싱턴/콩코드 전투를 그 시작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포함해 독립전쟁의 가장 중요한 5개의 전투를 기념하는 아래와 같은 우표가 올해 발행됐었다. 제일 윗줄의 Battles of Lexington & Concord는 보스턴 외곽에서 벌어져 현재 Minute Man National Historical Park로 관리되고 있는데, 예전에 주변을 몇 번 지나가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같은 해 6월의 벙커힐 전투(Battle of Bunker Hill) 기념비는 2015년에 방문했었고, 셋째줄 1776년 12월의 트랜턴 전투(Battle of Trenton)에 대해서는 수채화로 묘사된 워싱턴이 델라웨어 강을 건넌 곳을 올초에 지나간 적이 있다. (사진은 트랜턴에서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막사) 전편에서 보여드렸던 대포의 사진이 들어간 새러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 대해서는 이제 설명을 드릴 예정이고, 마지막 줄은 사실상 전쟁이 종결된 1781년 10월의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로 3년전에 역시 현장을 들렀다. 여기를 클릭해 보실 수 있는 1부에서 설명드린 두 번의 공격이 모두 실패한 후에, 전장에서 몇 마일 북쪽의 작은 마을로 후퇴했던 존 버고인(John Burgoyne) 소장이 이끄는 영국군이 열흘이 지난 10월 17일에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 소장의 대륙군에게 이 자리에서 항복을 하게 된다. 이는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의 장군이 통솔하는 5천명 이상의 정규군이 야전에서 항복한 역사상 최초의 사례라 한다. 그것도 다른 유럽의 강대국이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의 반란군에게! 포신에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왕관과 대문자 'R'이 새겨진 이 대포는, 항복한 영국군의 왕립 포병대로부터 압류한 것의 모조품이라 한다. 당시 30문 이상의 대포를 압류해서 계속 이어진 독립 전쟁에 대륙군이 대부분 사용을 했고, 지금까지 몇 개 남아있는 실물은 다른 박물관 등에 보존되어 있단다. 좌우로 두 개가 원래 설치되었던 모양인데 오른편의 것은 누가 훔쳐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기념물의 중앙에 부조로 새겨진 그림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예정이고, 좌우로 4개의 어록이 동판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게이츠 장군이 다음날 의회에 승전보를 알린 문장을 아래에 보여드린다. 꼼꼼히 1부를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게이츠는 전투 직전에 북부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와서, 두 번의 전투 동안에 계속 수비만 주장하며 요새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왔었다... 자신의 상관인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에 대한 보고는 건너뛰고 바로 대륙의회에 전문을 보낼 때부터 꿍꿍이가 있었던 그는, 지금도 미국에서 가장 받기 어려운 훈장인 의회 황금 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을 받고 전쟁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게 되자, 워싱턴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총사령관을 하겠다는 야망에 부풀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콘웨이 음모(Conway Cabal)가 사전에 발각되자 그는 워싱턴에게 직접 사과해야 했고, 자신이 신생 미국의 지도자가 되려던 꿈도 접어야 했다. 커다란 의회 황금 메달을 자랑스럽게 걸고 있는 호레이쇼 게이츠의 초상화지만... 여차저차해서 그는 1780년에 다시 남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그 해 8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캠던(Camden)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수적우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용병술로 영국군에게 대패하고 혼자 북쪽으로 300 km를 쉬지 않고 줄행랑을 친다. 친분이 있는 의원들의 로비로 군사재판은 면하고 종전때까지 참모직은 유지했지만, 그는 흔히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장군들 중의 하나로 항상 언급된다. 허드슨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는 4번 국도 옆의 여기 사라토가 항복지(Saratoga Surrender Site)를 내려다 보는 저 커다란 집의 주인은 누굴까? 외롭게 서있는 차로 돌아가면서 마지막으로 왼쪽의 안내판을 둘러봤다~ 기념물의 동판은 워싱턴DC의 미의사당 로툰다에 걸려있는 총 8개의 대형 역사화들 중에서, 존 트럼벌((John Trumbull)이 그린 4개 중의 하나인 그림이었다. 사라토가 전투에서 대륙군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영국과 앙숙이던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동맹을 맺으며, 스페인과 함께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독립전쟁은 유럽 강대국들간의 국제전으로 확대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게이츠가 그림의 중앙에 서있고 오른편이 대륙군인데, 그 중에 유일하게 민간인 복장으로 등장하는 23번 인물의 집을 이제 찾아간다. 북쪽으로 딱 1 km만 달리면 나오는 필립 스카일러 장군의 집(General Philip Schuyler House)으로 위기주부는 그의 이름을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뮤지컬 을 예전에 관람하면서 주인공의 장인으로 잠깐 등장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필립 스카일러는 이 지역 출신의 전임 북부군 사령관으로 버고인의 영국군이 여기까지 남하하는 것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대륙군에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남아서 후임자인 게이츠를 도와서 식량 보급과 민병대 충원 등에 큰 도움을 줬다. 스카일러의 저택은 남쪽으로 35마일 거리인 뉴욕 주도 올버니(Albany)에 있으나, 안내판의 그림처럼 여기를 중심으로 주변의 넓은 땅을 아우르는 자신의 농장을 방문할 때 노란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독립전쟁 당시에 이 마을의 이름이 바로 새러토가(Saratoga)였지만, 그 후 1831년에 스카일러빌(Schuylerville)로 마을 이름을 바꿔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 영국군이 마을을 점령했을 때는 여기 스카일러의 집을 본부로 사용했지만, 두 번의 전투가 끝나고 북쪽으로 위험한 후퇴 또는 깔끔한 항복을 놓고 고민할 때, 버고인 장군은 집과 농장의 다른 모든 건물을 불태우라고 직접 명령을 했다. 그래서 지금 보이는 집은 전투가 끝나고 불과 한 달만에 새로 만들어서 지금까지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라 한다. 평소에는 내부도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지만, 방문했을 때는 연방정부 셧다운 안내문만 또 읽어야 했다.^^ 버고인과 스카일러의 이야기 및 사라토가 전투의 후일담은 시리즈 다다음편에서 또 잠깐 이어질 예정이다. 사라토가 국립역사공원 둘러보기의 마지막 장소로 영국군이 항복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둔했던 언덕 위에 세워진 사라토가 기념비(Saratoga Monument)를 찾아왔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언덕에는 프로스펙트 힐 공동묘지(Prospect Hill Cemetery)가 1865년에 먼저 만들어지긴 했지만, 독립전쟁이나 남북전쟁 전사자와는 관련이 없는 개인 소유의 일반 묘지라 한다.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옛날 영국군 참호의 흔적 등이 발견되어서, 여기가 마지막 주둔지였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기념비도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여행의 첫날에도 묘지에서 예쁜 노란 단풍을 구경했었는데 둘쨋날도...^^ 이 길을 따라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참호 등을 복원해놓은 빅토리 우즈(Victory Woods)가 나온다고 하지만, 이 날도 그렇게 한가한 일정이 아니라 바로 뒤돌아서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약 47m(155피트)의 오벨리스크로 전투 100주년인 1877년에 초석을 놓고 1883년에 완공된 사라토가 기념비만 한바퀴 빨리 둘러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동서남북 네 방향 모두 출입문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윗층에는 흔히 조각을 세워놓는 등의 장식을 위해 벽을 파놓는 공간을 뜻하는 '벽감(壁龕, niche)'이 만들어져 있지만, 지금 보이는 남쪽은 그냥 비워져 있다... 오전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는 동쪽 면에는 자신의 농장을 내려다 보는 필립 스카일러 장군의 동상이 이렇게 멋있게 세워져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정반대 서쪽 벽감에 세워진 동상은 맹활약한 저격수 부대를 이끌었던 대니얼 모건(Daniel Morgan) 대령으로 앞서 설명한 그림에도 흰 옷을 입고 가장 크게 그려져 있다. 그는 글도 거의 모르는 민간인 마차꾼으로 1755년 브래독 원정에 조지 워싱턴과 함께 참여했었고, 이듬해 식민지 영국군 장교를 때린 죄로 499대의 태형을 견뎌낸 것으로 유명하며, 준장으로 독립전쟁을 마친 후에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현재 출입구로 사용되는 북쪽 문에는 어김없이 또 안내문이 붙어있는데, 평소에는 188개의 계단을 따라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단다. 여기 위에는 어쨌거나 북쪽에서 내려온 영국군을 막아낸 사령관인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동상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렇다면 남쪽의 벽감만 비워져 있는 이유는? 새러토가 전투의 가장 큰 영웅이지만 이름이나 형상을 남길 수는 없는 그 놈을 상징적으로 기리는 것이다! "저기 사시는 분은 대문을 나설 때마다 대포가 자기 집을 조준하고 있는 모습을 보시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주차한 곳으로 돌아가서, 북부 뉴욕주 2박3일 여행 둘쨋날의 다음 목적지인 유서 깊은 휴양도시로 짧게 이동했다. PS. 미국에서는 특별히 독립 250주년이 되는 해라고, 타임스퀘어의 크리스털 볼도 아래와 같이 '250'이란 숫자와 성조기 디자인으로 번쩍이며 새해를 맞이할 예정이랍니다. 2년전에는 맨하탄에서 새해맞이를 했었지만 이번에는 딸의 아파트가 연말내내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 못 가고 조용히 집에서 보낼 듯하여 미리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블로그 방문해주시는 모든 분들 2026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미국의 반역자와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는 인물의 신발(boot) 기념물을 찾아갔던 사라토가 국립역사공원

요즘 한국에서 아들의 이름을 '완용'으로 짓는 분이 계실까 모르겠다. 특히 성이 이(李)씨라면 정말로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와 같이 미국에도 나라의 배신자이자 반역자의 상징(icon)인 인물이 있는데, 미국 독립전쟁 전반기의 가장 중요한 승리로 평가받는 1777년 새러토가 전투의 부사령관이었던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장군이다. 위기주부의 2박3일 북부 뉴욕주 여행기 시리즈 전편에 언급했던 심리전술로 스탠윅스 요새의 포위를 무너뜨린 구원군 지휘관이 바로 그였는데,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돌로 조각된 그의 신발을 직접 보기 위함이었다. 둘쨋날도 해 뜨기 전에 차에 시동을 걸고, 단 10분 거리의 첫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작년의 1박2일 오하이오주 솔로 여행에서는 그냥 저렴한 모텔을 이용해서 불편함이 좀 있었지만, 이번에는 사모님의 윤허를 받아 기한이 얼마 남지않은 하얏트 숙박권을 혼자 쓰는 사치를 부려서, 아주 넓고 편안한 밤을 보내고 또 따뜻한 아침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진입로에 잠시 차를 세우고 1938년에 설립된 사라토가 국립역사공원(Saratoga National Historical Park) 간판을 찍었는데, 제일 왼편의 돌 하나가 색깔이 다른게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이... 본인도 약간의 OCD(Obsessive-Compulsive Disorder, 강박장애)가 있는 모양이다~ 살짝 절정을 지난 가을 단풍의 주차장에는 의외로 먼저 온 차가 두세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블로워로 낙엽을 치우고 있던 계약직원(?)이 타고 온 것이었다. 안내판 옆에 공원 브로셔도 남아 있어서 기분좋게 하나를 챙기고는, 가운데 보이는 계단을 이용해서 비지터센터 쪽으로 일단 올라갔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거기서는 막 떠오른 햇님과 '태양을 향해 쏴라'를 시전하는 대포를 피사체로 작품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잠시 헷갈렸는데 유명한 추억의 서부영화 제목은 구나...ㅎㅎ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는 사라토가 국립역사공원 비지터센터의 모습이고, 이 곳의 방문기는 두 편으로 작성될 예정으로 순서가 좀 바뀐 감은 있지만, 전투의 전체적인 상황과 그 결과의 중요성 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2부에 설명할 예정이고, 본편에서는 한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파란 하늘이 비친 비지터센터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니, 안내판에 그림자가 비춰서 잠깐 비싼 인형들이라 생각했지만 그냥 판대기 사진을 세워둔 것이었다. 제일 오른편에 얼굴을 검게 칠한 인디언 전사가 보이는데, 당시 대표적인 6개의 인디언 부족국들 다수는 영국편을 들었고 일부는 식민지 반란군에 합류했으며, 또 같은 부족내에서도 의견이 갈려서 내분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단다. 공원의 지도로 일방통행 순환도로를 따라서 운전하며, 9월과 10월의 두 번의 전투 경과를 번호 순서대로 놓여진 안내판 등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고 많은 기념물들도 함께 구경할 수 있다. 지도에 씌여진 이름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미 블로그에 등장했던 인물이 한 명 있는데 ②번 부근의 코시치우슈코(Kosciuszko)로 여기를 클릭해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의 국립기념관 방문기를 보실 수 있다. 비지터센터는 폐쇄되었지만 도로를 따라 둘러볼 계획을 가지고 주차장으로 돌아가 진입구로 씩씩하게 차를 몰고 갔는데... 게이트가 아직 닫혀 있었다! 연방정부 셧다운 안내문이 붙어있지 않은 것으로 봐서, 야외전시를 볼 수 있는 공원 도로는 개방을 하는 것으로 알고 왔는데, 열어줄 사람이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고 해서 잠깐 고민을 하다가, 브로셔 지도를 보니까 이 공원에서 꼭 직접 보고싶은 '신발 기념물'까지는 걸어갈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해서 다시 주차를 하고 비지터센터 계단을 또 올라갔다. 헉헉~ 그 길의 이름은 윌킨슨 트레일로 특이하게도 1777년 존 버고인(John Burgoyne) 소장이 이끄는 영국 침공군의 지도제작자였던 윌리엄 윌킨슨(William Wilkinson) 중위를 기리는 것이란다. 그가 만들었던 이 지역의 상세한 지도를 바탕으로 당시 전투가 벌어진 정확한 위치 등의 확인이 가능했기에 특별히 '적군'의 이름이 국립역사공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가을 아침이슬에 신발을 적시며 신발 기념물을 찾아간다~ 첫번째 전투는 9월 19일에 영국군이 3개 방면으로 나눠서 ③번 베미스 고지(Bemus Heights)에 주둔한 대륙군을 포위하기 위해 진군하며 시작되었다. 직전에 새로 부임한 북부 대륙군 사령관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 소장은 요새에서 버티기로 결정하지만, 부사령관 아놀드 준장이 포위되기 전에 나가서 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마지못해 허락한다. 저격수 부대와 함께 직접 나가서 싸운 아놀드의 활약으로 포위 작전은 실패하고, 비록 영국군이 ⑥번 프리먼 농장(Freeman's Farm)을 점령했지만 사상자 수는 영국이 590명, 미국이 320명으로 영국측의 피해가 더 컸다. 10여분을 걸으니 대포들과 함께 안내판이 하나 나왔는데, 영국측에서 싸웠던 독일 용병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흥미있는 사실은 우측의 그림으로 약 100명 이상의 독일인 아내와 자녀들이 같이 대서양을 건너와서 저런 모습으로 전쟁터를 따라 다녔다 한다. 1차 전투 후에 게이츠가 보고서를 의회에 보내면서 나가서 싸운 자신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놀드가 항의하면서 둘 사이의 불화가 폭발했고, 결국 게이츠는 아놀드의 부사령관 지휘권을 박탈하고 막사에 감금을 시키게 된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 두 개의 안내판과 하나의 작은 책상(?) 그리고 펜스로 보호된 석조 기념물을 찾았다. 민병대의 합류로 대륙군의 수는 계속 늘어났지만 영국군은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후퇴와 진군을 놓고 고민하던 버고인이 다시 공격을 명령하면서 10월 7일에 2차 전투가 벌어진다. 아놀드는 총소리를 듣고 막사에서 나와 직접 선두에서 병사들을 지휘했지만, 게이츠는 전투 내내 안전한 숙소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단다. 이번에도 사기가 오른 대륙군이 영국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퇴각하는 영국군을 선봉에서 추격하던 아놀드는 이 자리 근처에서 왼쪽 발에 총을 맞았는데 말이 쓰러지면서 깔리는 바람에 다리가 완전히 부서졌단다! 그 상태에서도 아놀드가 부하들을 지휘하는 모습으로 공원 브로셔의 표지로 사용된 그림이다. 그는 새러토가 전투에서의 무공으로 얼마 후에 소장으로 진급은 되지만, 부러진 다리가 잘못 붙어서 왼발이 5 cm나 짧아져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겨우 걸을 수 있었고, 그래서 다시 야전 사령관으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듬해 1778년에 필라델피아 군정장관에 취임하지만 부정부패 혐의로 군법재판에 수 차례 회부되자 그는 영국군과 내통을 시작하고, 1780년에 웨스트포인트 사령관이 된 후에 요새를 영국군에 넘기려다가 발각되어서 당시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뉴욕으로 도망쳐 영국군에 합류한다. 이러한 아놀드의 배신을 부추긴 것이 오른편에 그려진 1779년 4월에 재혼한 두번째 아내로, 식민지 독립에 반대하고 영국에 충성하는 왕당파였던 필라델피아 대법원장의 딸인데, 결혼 당시에 아놀드는 38세였고 아내는 20살이나 어린 18세였단다. 웬 책상을 가져다 놓았는지 의아했는데, 시각장애인이 어떤 형상의 조각인지 만져서 확인할 수 있도록 축소 모형을 올려다 놓은 것으로, 실제 크기도 가늠할 수 있도록 별도로 축척도 길이와 함께 점자로 표기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2부에서 보여드릴 예정인 새러토가 전투 기념비를 19세기말에 건립하면서, 승전의 주인공인 베네딕트 아놀드가 부상당한 장소에 간단한 표식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위원들이 찬성을 했단다. 하지만 일부는 그 이상의 경의를 표하고 싶었고, 그렇다고 독립전쟁 중에 반역한 군인의 동상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전투에서 희생된 그의 왼쪽 발만 기념하기로 결정해서, 대리석으로 기병용 승마 부츠를 조각한 부트 모뉴먼트(Boot Monument)가 1887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높이 1.2 m의 석판에 월계관이 씌워진 원통형의 포신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거기에 소장(Major General)을 상징하는 두 개의 별이 달린 견장으로 장식된 부츠가 매달려 있다. 자세히 보면 대포가 땅을 향해 거꾸로 조각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불명예의 표시라 한다. 또 구두의 앞부분만 돌이 다른 이유는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기 전에 누가 망치로 훼손을 했던 것을 복원했기 때문이라고... 뒷면을 보면 설립을 주도한 사람의 이름이 위쪽에 있고, 아래쪽에 비문이 있는데 그를 '대륙군의 가장 뛰어난 군인(the most brilliant soldier of the Continental Army)'으로 칭할 뿐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그래서 이 신발 기념비는 미국에서 베네딕트 아놀드에게 바쳐진 유일한 기념물인 동시에 국립 공원에서 헌정된 인물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단 하나의 기념물이라 한다. 그는 독립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군 준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망명한 아내와 함께 전후 1782년에 영국으로 가서 잠시 사교계에 나가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비난과 놀림의 대상이 되다가 1801년에 사망하고 런던 근처의 교회에 묻혔다. 일설에 의하면 아놀드가 여기 전투중에 말에서 떨어진 것을 본 부관이 달려와 다친 곳이 있냐고 물었을 때, 씁쓸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 다리에 맞았다. 차라리 심장에 맞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가운데 멀리 보이는 비지터센터로 돌아가는 길은 왼편이라고 알려주는 그림자 독사진 마지막으로 보여드리며 1부를 마친다.  21세기 미국에서도 여전히 'Benedict Arnold'란 이름은 (한국의 이완용처럼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자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최근의 역사학계는 그의 배신이 탐욕이나 사익을 추구했다기 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개인적 좌절감 등의 요인이 컸다고 보며, 그래서 그를 복잡한 동기를 가진 영웅이자 비극적인 인물로 재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단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