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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센테니얼 맨 Bicentennial Man (1999)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은 프랑켄슈타인의 역발상인 동시에 피노키오의 어른 버젼 혹은 해방 이후의 흑인에 대한 은유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요소들을 갖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은 사회의 시스템이 아닌, 자기 스스로 결정할 일이라는 메시지가 읽히기도 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응원 같기도 하다. 영화는 여기에 로맨스를 가미해, 마치 해방된 노예와 주인 가문 여성의 투쟁처럼 보이게 각색된다. 혹은 사회적으로 암묵의 금기인 모든 관계의 로맨스를 대입해도 좋을 것이다. 로봇의 시선에서 인간성을 정의하는 과정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집사 로봇인 앤드루는 자신의 몸을 점차 인간에 가깝게 개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유한함" 혹은 "불완전성"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즉, 그토록

매트릭스 The Matrix (1999)
굳이 비교를 하자면 [터미네이터] 플롯을 확장한 개념이다. 인간에게 반기를 든 기계가 인간을 몰살시키기로 결정하면 터미네이터 세계관이 되는 거고, 매트릭스에 넣어 살아있는 건전지로 써먹기를 결정했다면 이 영화의 세계관이 되는 셈이다. 전자의 기계들이 분노했다면, 후자인 이 영화의 기계들은 조금 더 생산적으로 머리를 굴렸다고 볼 수 있겠지. "살아있다"는 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탐구하는 과정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간들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죽음보다 못한 삶임에도 실체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한지(모피어스) 아니면 허상에 속더라도 삶을 누린다는 느낌과 만족감이 더 중요한지(사이퍼)에 대한 대비가 중요한 고민이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인간들을 사육하기로 결정한 기계들에게도 해당되는 동일한 고민

여섯번째 날 The 6th Day (2000)
사실 영화의 논쟁 자체는 해묵은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어 "철학의 부재"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것 말이다. 영화의 세계관은 복제 인간 기술이 이미 완성된 근미래. 마치 복사기 돌리듯이 클론을 뚝딱 찍어낼 수 있는 판타지의 영역에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이 부분은 마이클 키튼 주연의 [멀티플리시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영화는 코미디인데!) 쟁점은 그것을 합법의 영역, 즉 양지로 끌어낼 수 있느냐에 대한 여부인데, 재미있는 점은 영화의 악당인 자본가나 과학자를 단순한 악인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세계관 자체에 이미 어느 정도는 생명에 대한 철학과 윤리의 수준이 바닥에 도달했음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의 세상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람처럼 생긴 데다가 심

13층 The Thirteenth Floor (1999)
[트루먼 쇼]처럼 자신이 가짜 세상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선 [버추오시티]의 SID처럼 세상으로 나오려는 인공지능, [로보캅]처럼 자아의 주체는 기억이라고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혹은 [매트릭스]처럼 그것은 전자 신호로 만들어진 가짜 기억. 즉, "자아"에 대해 철학적 냄새를 풍기는 SF 영화 속 아무개들의 집합체같은 영화다. 철학적이다 못해 추상적인 고민에 빠진 인물은 빈센트 도노프리오가 연기한 제리 애쉬튼. 그러나 이 남자, 아니 이 CG 퍼펫은 "나는 누구인가"라며 한가하게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뻔한 존재론적 고민에 빠지는 대신 그는 그래픽 세상과 그래픽 몸에서 벗어나 현실로 역류해 유저의 몸을 차지한다. 소 뒷걸음질로 쥐 잡듯 돌발적인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자신이 태어난 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