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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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립박물관과 논산에서 만나는 파평윤씨 이야기

파평윤씨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인물은 조선후기의 학자 윤증과 조선시대 문정왕후, 일제강점기 윤봉길 의사입니다.  2월 10일까지 대전시립박물관에서 열린 '교목세가(喬木世家) 파평윤씨, 시대의 부름에 답하다’가 전시를 방문해 파평윤씨 가문의 흔적들을 따라가봤습니다. '교목 세가'는 여러 대를 거쳐 중요한 벼슬을 지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평윤씨가 바로 그런 집안이죠. 파평윤문(坡平尹門)은 은진송씨와 함께 호서(湖西) 삼대족(三大族)으로, 고려에 시작되어 조선을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는 천년의 시간을 나라의 명운과 함께했죠. 고려말 조선초에 시대가 변화하고 있을 때 파평윤문(坡平尹門)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동참했다고 합니다. 당시 판도판서 윤승례는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하여 파주에 은거했다고 합니다. 파평윤씨는 조선왕조와 상당히 많은 연관이 있습니다.  파평윤씨의 다양한 흔적들이 대전시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그 쓰임새도 모두 다릅니다. 만들어진 사람은 멀리서 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서 대해 보면 부드럽고, 그의 말을 들어보면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파평윤문의 기록이 담긴 유물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사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문과 무를 함께 겸비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요. 내면과 외면을 모두 같이 닦는 일,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무예 연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파평윤씨의 중시조인 윤관은 여진족을 정벌하고 고려의 재상인 문하시중으로 올랐습니다. 숙종대 후반에서 예종대 초반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개척한 사람으로 역사책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나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 하나이다."  -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파평윤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윤봉길 의사의 말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홍구의거를 일으켜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렸죠. 전주이씨, 안동권씨의 뒤를 이어 파평윤씨는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추한 가문입니다. 파평윤씨 가문은 문정왕후대에 비극을 맞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그려진 대윤과 소윤은 당시 조선의 가문을 좌지우지하며 친족 간의 골육상쟁을 일으켰죠. 파평윤씨에 대한 이야기를 대전시립박물관에서 보았다면, 가까이에 있는 파평윤씨 종가를 가보는 것도 추천해드려요. 파평윤문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시대에 부응하여 조선왕조의 개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파평윤씨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곳은 바로 논산에도 있습니다. 윤증고택을 비롯하여 파평 윤씨의 재실이 있습니다.  대전과 연관이 많은 파평윤씨의 흔적을 따라가는 역사여행, 여러분도 떠나보시길 바랍니다.

무수천하마을 안동권씨 유회당종가, 고즈넉한 마을을 거닐며

대전에서 올해도 설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요. 설날과 같은 명절에는 항상 언론에서 등장하는 단골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댁과 친정 방문, 명절음식과 제사 준비 등으로 갈등을 빚는 집안의 이야기도 있고요. 결혼과 취업, 학업과 관련된 질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청년층의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대전에서 수십년을 살면서도 무수천하마을이라는 곳은 처음 왔는데요. 이 마을에는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대전 중구 운남로 63, 유형문화재 제29호)가 있습니다. 유희당종가의 흔적을 따라 거닐면서 설날 가족의 의미와 집안의 소통에 대해 생각하며 거닐어봤습니다.  가족간에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명절만 되면 허례허식으로 인해 문제를 더 많이 만들고 있지는 않은것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종가'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는 집단적인 동질성을 가지는 부계친족 집단의 큰집을 가리킬 때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가는 그 친족 집단 최고의 직계손으로서 존경을 받고 종가의 가계는 끊겨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자손이 없을 때에는 양자에 의해서라도 그 가계를 계승시키려 했습니다.  안동권씨의 유회당 종가는 대전에 얼마 없는 고택중 한 곳이기도 한데요. 영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유회댕 권이진 선생이 처음 터를 잡았고, 화재로 소실 된 것을 1788년 후손들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건물의 규모가 작고, 건물 사이의 공간을 여유롭게 배치한 점이 특징인데요.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곳을 둘러보다보니 안동권씨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930년 왕건의 고려군이 견훤의 백제군과 대치하자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 병산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운 권행(權幸)이 안동 권씨(安東 權氏)의 시조라고 합니다.  연산의 광산김씨와 니산(노성)의 파평윤씨는 회덕의 은진송씨와 더불어 호서 지역의 삼대족(三代族)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논산 지역의 대표적인 종가는 광산김씨와 파평윤씨로 대전보다 더 명문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안동권씨인 권행, 김선평, 장정필 세 사람은 고려 창업의 공으로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亞父功臣 三重大匡太師)를 제수받았으며 983년(성종 2) 이 세 명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안동시 북문동에 삼태사묘(三太師廟)를 세웠습니다. 그 종가가 설에는 북적이지 않을까요.  유회당 종가는 아담한 크기의 사당과 초가 정자, 작은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까운곳에는 유회당 종가 말고도 기궁재, 별묘, 삼근정사 등 문화유산이 있습니다.

연휴 마지막 날 중앙로지하상가를 거닐다

대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구지하상가와 신지하상가가 하나로 연결되는 '중앙로 프로젝트 사업'이 올해 대전시 도시재생 분야 중점사업으로 진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설연휴 마지막날 중앙로지하상가를 거닐어봤습니다. 각종 정보도 얻고 지하상가에데 몰랐던 것도 알게 됐습니다. 대전에서는 곧 3대가 함께한다는 2019 대전연축제가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연축제는 2월 16일 갑천둔치에서 열리게 됩니다. 이제 대전을 대표하는 축제가 하나 더 만들어지겠네요. 설명절 연휴의 마지막날에도 신지하상가를 찾아온 분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대전친환경생활 지원센터는 바로 신지히상가 내부에 있습니다. 자연에게 빌려 쓰고 작연에게 되돌려주는 착한 소비를 지원하는 공간입니다.  대전친환경생활지원센터의 대표 캐릭터입니다. 센터에서 대전을 대표하는 친환경 제품도 만나보세요.  설명절에는 운영하지 않지만 평일에는 이곳 시설을 이용도 할 수도 있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중앙로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연결될 구(역전)지하상가는 대전 공단 관할지역입니다. 연결이 된다면 원도심 활성화에도 큰 몫을 할 것이라고 기대해봅니다.  구지하상가 점포수가 200개이고, 신지하상가가 600개입니다. 합치면 800개의 큰 상권이 형성될 것입니다.  지하상가의 중심에는 무인민원발급창구도 설치되어있습니다. 각종 민원서류를 간편하게 출력할 수 있습니다. 황금색의 철새가 비상하듯이 우아하게 날고 있네요.  지하상가의 끝에는 무인정신건강검 코너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하상가 캐릭터 룰루와 랄라의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선물을 주는 이벤트도 진행됩니다.  이 시설은 대전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고 적혀있네요. 근대문화탐방로가 지하상가의 바닥에 그려져 있는데요. 옛 충남도청부터 충청남도관사촌, 대흥동성당, 대전여중강당, 목척시장, 옛 산업은행 등이 근대문화탐방로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액자에 화려하게 수놓아 만든 부엉이가 참 귀여워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올빼미와 부엉이를 구별하는 것은 귀깃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귀깃이 있는 것은 부엉이, 귀깃이 없는 것은 올빼미입니다.  다음주면 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파티를 할 예정인데요. 저는 이곳에서 멋진 액자를 하나 구입하다가 집에다가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하상가를 포함한 상권을 살리기 위해 공영주차장 개발과 상가연합번영회 결성, 매년 특색있는 축제를 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날이 얼른 오기를 기다려봅니다.

독립운동 100주년 대전의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흔적을 찾아서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했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한 단재 신채호. 지금 그 생가지가 복원되어 있어서 그 흔적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단재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틀을 만든 사람으로,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우리의 역사를 많이 정립하기도 했죠. 지금은 행정구역상 동구에 속한 곳이지만 이 지역은 원래 대덕군으로 지역이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단재는 1880년 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나 구한말 독립협회에서 활동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을 쓰며 친일파의 매국 행위를 비판했는데요. 단재는 대전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며 대전의 자부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재는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곳 생가지는 단재가 태어나서 8살까지 살던 곳입니다.   단재는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관을 둘러보면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이나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주제로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다양한 잡지를 발행했던 단재. 그의 글에서 이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 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당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나 독립운동가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조직을 만들던가 운동을 꾀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진의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 시대에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독립'이라는 것이 알게 된 것이죠. 신채호는 봉건 유생에서 자강 운동가로, 자강 운동가에서 민족주의자로, 다시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전환됐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전환을 한 것을 보면 유연한 생각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한국사 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단재 신채호. 그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파악했다는 것이 조금 독특합니다.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추구하였으며, 감옥에 있으면서도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영위하였던 신채호의 흔적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