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적지

포스트: 7
Tags

Posts

7 posts

게티스버그 국립군사공원(Gettysburg National Military Park)에서 남북전쟁의 격전지를 차로 돌아보기

반응형 미국 국립공원청이 직접 관리하는 420여곳의 장소들 중에서 '국립군사공원' 분류에 해당하는 25곳은 독립전쟁, 남북전쟁 등에서 중요한 전투가 실제로 일어났던 장소를 기념하는 것으로 National Military Park 9개, National Battlefield Park 4개, National Battlefield 11개, 그리고 National Battlefield Site 1개로 구성되는데, 이들이 군사공원으로 따로 분류되는 이유는 대부분이 1930년대 이전에 지정되어서 전쟁부에서 관리를 하다가 내무부 국립공원청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전체 NPS Official Units 정리를 하면서 이 군사공원들이 미서부에는 하나도 없다고 투덜댄 적이 있었는데, 작년에 이사를 온 여기 미동부 버지니아 부근에는 오히려 집중적으로 모여있어서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그 중에서 처음으로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는 펜실베니아 주의 게티스버그 국립군사공원(Gettysburg National Military Park)을 방문한 두번째 이야기로, 이제 차를 몰고 남북전쟁의 사망자들이 묻힌 묘지와 실제 전투가 일어났던 격전지들을 돌아보려고 한다. (사진의 박물관과 비지터센터를 둘러본 첫번째 여행기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비지터센터 바로 북쪽에 있는 게티스버그 국립묘지(Gettysburg National Cemetery)는 전투가 끝나고 4개월여 후에, 전사한 연방군의 병사 3,512명의 유해를 안치했는데, 그 후에 세계대전 등의 다른 전사자들의 묘역도 추가되어서 미국의 공식적인 국립묘지들 중의 한 곳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편에, 앞서 전편에서 자세히 소개했던 링컨 대통령이 이 곳에서 1863년에 한 연설을 기념해서 1912년에 만들었다는 Lincoln Address Memorial이 그의 흉상과 함께 만들어져 있다. 철책 너머로 많은 비석들이 세워진 곳은 게티스버그 전투 전부터 있던 일반묘지인 Evergreen Cemetery라서 이 언덕이 세메터리힐(Cemetery Hill)로 불렸다. 이 언덕에서도 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좌우의 대포와 함께 여기서 싸웠던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북군들에게 헌정된 기념물이 앞쪽에 보인다. 높이 18 m의 Soldiers' National Monument가 국립묘지 중앙에 세워져 있고, 그 너머에 반원형으로 남북전쟁 북군의 묘역이 배치되어 있다. 그 앞에서 지혜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링컨이 출생한 켄터키 주에서 게티스버그 연설을 기념해서 1975년에 만든 기념물이다. 반원형의 묘역은 높은 비석도 없이 바닥에 이렇게 표석으로만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아마도 그 후손 중의 한 명이 최근에 다녀간 모양이다. 미국이 분단될 뻔한 남북전쟁의 묘역에 50개의 별이 박힌 지금의 성조기가 꽂혀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입구에서 만났던 자원봉사자가 실제로 링컨이 연설을 했던 위치는, 저 멀리 나무 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New York State Monument와 여기의 중간쯤이었다고 설명을 해주셨다. 하지만 이 묘지 말고도 둘러볼 곳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구경을 하고는 차로 돌아갔다. 게티스버그 국립군사공원의 지도로 비지터센터와 국립묘지가 중앙 오른편에 표시되어 있다. 게티스버그 마을 북쪽은 3일간의 전투 중에서 첫날이라서 그냥 생략하고, 남쪽 왼편으로 만들어진 자동차 투어코스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도의 제일 왼쪽 아래에 보면 별도의 국립공원인 아이젠하워 국가유적지(Eisenhower National Historic Site)가 있는데, 미국의 34대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의 농장이 있던 곳이란다. 하지만 5월부터 10월까지만 게티스버그 비지터센터에서 셔틀을 타고 가서 무료투어를 할 수 있고, 당시에는 직접 차로 가서 건물 외관만 볼 수 있다고 해서 이 때는 들리지 않았다. 격전지 자동차 셀프투어에서 제일 먼저 정차한 곳은 지도에 4번으로 표시된 노스캐롤라이나 기념비(North Carolina Memorial)이다. 게티스버그 전투 2일째와 3일째는 서쪽 평지의 남군이 동쪽 언덕의 북군을 공격했는데, 남북전쟁이 내전(civil war)이다 보니까 북군이 묻힌 국립묘지와 함께 이렇게 남군쪽에서 만든 추모비들도 함께 볼 수 있는게 처음에는 신기했다. 올바른 비유인지는 좀 의문이지만... 만약에 한국도 6·25전쟁에서 북진통일을 했다고 가정하면, 인천상륙작전 기념지에 그 곳에서 전사한 북쪽출신 병사들의 위령비가 따로 만들어져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 (노스캐롤라이나는 이름에 'North'가 들어있다고 북군이 아니고, 버지니아 남쪽에 있는 주로 남부동맹에 가담했음) 결과적으로 남군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전투라서 그런지, 노스캐롤라이나 기념비로 만들어진 병사들의 동상도 왠지 좀 안타깝고 짠한 느낌이 들었다~ 남군의 주둔지들을 연결하는 이 남쪽으로 일방통행 도로의 이름도 West Confederate Ave인데, 그 옆으로는 이렇게 대포들이 수 없이 줄지어 놓여져 있었다. 동쪽 언덕에 있는 북군에게 대포를 발사하려고 하는 아내인데... "큰 나무가 앞에 있어서 쏠 수가 없습니다!" 다음은 남부의 주력군인 버지니아 군대가 주둔했던 장소에 만들어진 Virginia Memorial로 말을 타고있는 동상은 멀리서 봐도 남군 총사령관인 Robert Lee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비록 반란군의 수장으로 군생활을 마감했지만, 남북전쟁 발발 당시에 미국 최고의 군인이었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는 게티스버그 전투의 마지막 3일째에 George Pickett 소장에게 12,000명을 이끌고 정동쪽으로 약 1 km 떨어진 언덕에 주둔한 북군을 정면돌파할 것을 명령하는데 (지도의 15번 High Water Mark), 이것은 그가 지휘관으로 내린 가장 큰 실수였다. 전편에 소개했던 사이클로라마 그림으로도 그려진 이 무모한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으로 남군 5,000명이 1시간만에 전사하며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다음날 빗속에서 버지니아로 퇴각하게 된다. 다른 곳들은 건너뛰고 자동차 투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인 8번 리틀라운드탑(Little Round Top) 언덕에 왔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이 곳은 전투 2일째에 남군의 2인자였던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가 점령을 시도했으나 북군이 필사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곳이다. 가운데 보이는 기념비는 이 곳에서 싸웠던 펜실베니아 부대를 추모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있는 언덕 끝 쪽으로 걸어가면... 군복(?)을 입으신 분이 저 멀리 바위 위에 세워진 동상의 사진을 찍고있는 것이 보인다. 북군의 공병대 장교였던 워렌(Gouverneur K. Warren)은 방비가 허술했던 이 언덕이 요충지임을 파악하고, 남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미리 병력을 보충하도록 해서 "Hero of Little Round Top"이라고 불린단다. 그래도 남군의 반복되는 돌격에 북군도 병력이 부족해졌고, 탄약까지 모두 떨어지자 메인 주에서 온 체임벌린(Joshua Chamberlain)이 이끄는 연대는 '착검 돌격'으로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남군을 육탄전으로 물리치며 이 고지(高地, high ground)를 사수했다고 한다. 역시 전투에서는 높은 위치에 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한데, 일찌기 오비완 케노비가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용암이 흐르는 무스타파 행성에서 맞짱을 뜰 때 마지막에 한 말이 있다... "I Have the High Ground!" 마침 5월 4일 스타워즈데이(Star Wars Day)도 다가오고 해서, 해당 영화장면과 대사를 이용해서 정말 잘 만든 뮤직비디오가 있어서 소개해드린다. 참 대단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듯...^^ 자신의 뉴욕 주 부대를 이끌고 이 고지를 방어하다가 26살로 숨진 Patrick O'Rork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의 뒤로 1889년에 뉴욕 주에서 만든 추모탑이 작은 성처럼 우뚝 서있다. 모녀가 어느새 성의 위에 올라가서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 찍어주고 뒤따라 올라갔더니 벌써 내려오더라는... 미국 남북전쟁 최대의 전투가 벌어졌던 게티스버그 들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2022년 봄방학 여행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언덕을 내려가서도 자동차 투어코스가 더 남아있기는 했지만, 표지판을 놓치면서 다음 번호를 찾아가는 것을 관두고 그냥 약 1시간반 거리의 집으로 향했다. 게티스버그 국립군사공원(Gettysburg National Military Park)은 이런 경치를 보기 위해서 일부러 다시 찾아갈 것 같지는 않지만, 펜실베니아의 주도인 해리스버그(Harrisburg)에 여행을 간다거나 또는 그 위쪽으로 지나가는 길이라면 잠시 들러서, 이번에 다 보지 못한 다른 격전지와 기념물들도 둘러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반응형

미국의 서부개척과 인디언들의 한 맺힌 역사가 있는 아칸소 주의 포트스미스(Fort Smith) 국가유적지

미국의 서부개척과 인디언들의 한 맺힌 역사가 있는 아칸소 주의 포트스미스(Fort Smith) 국가유적지

미국의 50개 주들 중에서 남부 시골에 아칸소(Arkansas) 주가 있다는 것을 위기주부가 처음 알게 된 것은 1992년에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Bill Clinton) 때문이다. 그는 아칸소 주에서 태어나서 결손가정에서 소년시절을 보냈지만, 1978년에 불과 32세의 나이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주지사가 되었고, 1993년 1월에 사상 3번째로 젊은 46세에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자동차로 대륙횡단을 하지 않고서는 미국에서 평생을 살아도 왠만해서는 발을 들여놓기 어려운 그 아칸소 주의 이야기가 이제 시작된다.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인터스테이트 40번을 타고 2시간반 정도 동쪽으로 달리다가, 주경계를 만나기 직전에 64번 국도로 빠지니까 아칸소 주의 환영간판이 나왔다. 아내가 스마트폰으로 급하게 찍어서 화질이 좋지 않은데, 주 이름 바로 밑에는 "The Natural State"라고 작게 적혀 있다. 환영간판은 여기 서있지만 실제로는 미시시피 강의 지류인 아칸소 강(Arkansas River)을 건너는 멀리 보이는 다리를 넘으면 나오는 도시인 포트스미스(Fort Smith)부터 아칸소 주가 시작된다. 강을 건너 바로 오른쪽 강가에 대륙횡단 3일차의 마지막 목적지인 포트스미스 국가유적지(Fort Smith National Historic Site)가 있다. 역사상 최대의 부동산 거래의 하나인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으로 미시시피 강의 서쪽이 미국땅이 된 후에, 백인 서부개척자(Western Frontier)들의 보호와 원주민들간의 분쟁 해결을 위해 1817년에 최초로 미군이 주둔하는 요새(fort)가 여기 아칸소 강가에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1836년에 아칸소가 미국의 25번째 주가 된 후에, 강 건너 서쪽 인디언 영토(Indian Territory)의 원주민들이 혹시 도시를 침략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사진 왼편의 막사(Barracks) 등을 지어서 튼튼한 요새를 다시 만들었다. 그 후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인 1871년에 군부대는 철수하고, 오른편 건물이 추가되어 연방법원(Federal Court)으로 1896년까지 사용되어서 약 80년의 격동의 역사가 남아있는 장소이다. 내부를 구경하려고 현관쪽으로 갔더니, 입구는 건물 왼쪽이라고 해서 급히 가봤는데... 나무그늘 아래로 보이는 건물 옆쪽의 비지터센터 입구의 철문을 잠그고 나오는 공원직원과 마주쳤다~ 시계를 보니까 4:50분... 아직 10분쯤 남은 것 아니냐고 하니까, 일찍 왔어도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건물 내부는 공개하지 않는다면서, 바깥만 마음껏 둘러보고 가라고 공원브로셔 하나만 쥐어주고는 칼퇴근을 하셨다.^^ 당시 예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하나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바로 뒤쪽에 왠지 서늘한 기운을 뿜으며 눈길을 확 끄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얀색으로 깨끗하게 만들어진 교수대(Gallows)로, 1873년부터 1896년까지 24년간 86명이 여기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 범죄자들의 이름이 안내판 아래에 순서대로 빼곡히 적혀있다. 단, 법원이 문을 닫은 후에 교수대가 바로 철거되었기 때문에, 지금 보이는 것은 옛날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안내판 속의 인물은 "Prince of Hangman"으로 불리며 저 무대 위에서 올가미를 죄수 목에 걸고 절반 이상의 교수형을 직접 진행했던 사형집행인(hangman)인 George Maledon이다. 누군가가 몰래 찍었던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교수형 집행 당시의 스케치와 설명이 옆 안내판에 있었다. (클릭해서 확대하면 읽으실 수 있음) 우측 위 사진의 Issac C. Parker는 이 법원의 판사로 21년간 재직하면서 160번의 사형선고를 내려서 "교수형 판사(The Hanging Judge)"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그 중 79명만 실제로 처형되었으며, 당시 살인과 강간 등의 강력범죄 344건의 절반 미만만 사형선고를 했던, 오히려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I do not desire to hang you men. It is the law." 이제 강가쪽으로 좀 더 과거의 역사를 찾아서 거슬러 올라가보자. 안내판 제일 아래쪽에 보면 트레일오브티어스(Trail of Tears), 즉 번역하자면 '눈물의 길' 또는 '눈물의 여정'이라고 씌여있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 전에 녹슨 화물열차가 서있는 철길을 배경으로 꼭 인물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셔서 잠시 모델을 해야했다.^^ 여기 안내판은 백인들의 미서부 개척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고 눈물의 길 전망대까지는 조금 더 가야 하지만, 빨리 차로 돌아가서 숙소를 예약한 곳까지 또 달려야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둘러보기로 했다. 미국의 20달러 지폐 속 인물인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의 주도로 1830년에 통과된 으로 미시시피 강 동쪽의 고향을 잃고 쫓겨난 원주민들이 저 너머 지금의 오클라호마 땅으로 강제 이주를 해야만 했는데, 아래의 지도를 보면서 그들의 눈물의 여정을 살펴보자. 지도에 다섯 색깔로 그려진 경로를 따라서 표시된 각각의 부족이 1830~50년 사이에 강제로 지금의 오클라호마 주인 Indian Territory로 추방되었는데, 도합 약 6만명의 인디언이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수가 길 위에서 죽었다. 특히 지금의 조지아(Georgia) 주의 북쪽에 모여살던 체로키(Cherokee) 족은 1938년 겨울에 약 1만3천명이 북쪽 육로로 이동을 하면서 혹독한 추위와 기근, 질병으로 약 4천명이나 객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시 인디언들이 눈물을 흘리며 걸었던 길들은 현재 Trail Of Tears National Historic Trail로 지정되어서 국립공원청에서 별도로 관리를 하고 있는데, 여기 미국남부 아칸소 주의 포트스미스 강가에서 위기주부는 처음으로 그들의 한 맺힌 역사를 가까이 접한 것이라서 자세히 소개를 해봤다. 국립공원청이 관리하는 국가유적지(National Historic Site)는 2021년 현재 74곳이 있는데, 여기는 그 중 위기주부가 7번째로 방문한 NHS인 셈이다. 동부로 갈수록 이런 미국의 역사 유적지는 점점 갈 기회가 많아지는 것 같고, 덩달아 포스팅을 쓰기 위해서 역사공부를 해야하는 시간도 늘어나고 있다~ 잔디밭 너머로 왠지 범선의 돛대같은 높은 기둥에 성조기가 걸려있고, 그 아래에 돌로 만든 2층 건물은 1838년에 만들어진 Commissary Building으로 1846~48년의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중요한 보급창고 역할을 했던, 이 공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지금은 비지터센터로 사용되는 처음 소개했던 막사-법원 건물의 지하는 한동안 교도소(Jail)로 사용되었는데, 좁은 철창 안에 최대 50명까지 한 번에 감금하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서 "Hell-on-the-Border"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사모님이 안 보여서 어디 가셨나 했더니... 그 '국경의 지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태웠던 법원의 죄수호송용 마차를 직접 끌고 계셨다~^^ 대륙횡단 여행기에서 빠질 수 없는 커플셀카 한 장 찍고는 서둘러 다시 차에 올랐다. 예약해놓은 숙소까지는 2시간반이나 더 달려야 했기 때문에, 도시 남쪽에 월마트(Walmart)에서 운영하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던게 신기한 경험이었다. 길은 오치타 국유림(Ouachita National Forest)을 관통해야 해서, 2번의 대륙횡단을 하면서 유일하게 완전히 깜깜한 산길을 운전해야 했던 날이다. 단풍으로 유명하다는 미국남부 이 숲의 이름은 부근에 살았던 원주민인 워시타(Ouachita) 부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대륙횡단 3일째였던 이 날 9시간45분 동안에 596마일(960 km)을 달려서 최장기록을 세웠고, 3일을 연달아 밤까지 운전을 해서 합계 2,630 km를 이동해 전체 횡단거리의 60% 이상을 벌써 달렸기 때문에, 다음 날은 늦잠도 자고 오전에는 온천도 하면서 좀 쉬어갈 계획이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보디 주립역사공원(Bodie State Historic Park),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남긴 고스트타운(Ghost Town)

보디 주립역사공원(Bodie State Historic Park),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남긴 고스트타운(Ghost Town)

캘리포니아 주민으로서 주립공원재단(California State Parks Foundation)에 기부금을 한 번 낸 적이 있는데, 그 후로 철마다 지도와 브로셔 및 다음해 달력 등을 계속 보내준다. 거기에 소개되는 캘리포니아 주립공원들 중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 있는데, 지난 8월말의 9박10일 자동차여행에서 마침내 직접 가볼 수가 있었다. 보디 주립역사공원(Bodie State Historic Park)은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당시에 금광촌으로 잠깐 번성했다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고스트타운(Ghost Town)이다. 오른편 간판의 공원이름 아래에는 희미하게 "EL. 8375'"라고 씌여있는데, 이 마을의 해발고도가 무려 2553 m라는 뜻이다. 마지막 3마일의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공원입구로 들어가는 영상만 처음에는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요세미티로 넘어가는 Tioga Rd와 갈라지는 리바이닝(Lee Vining) 마을부터 395번 국도를 타고 모노호수(Mono Lake) 옆으로 지나 Bodie Rd로 우회전해 공원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약 50분을 모두 4배속으로 편집을 했다. (여기를 클릭해 8분 정도부터 비포장도로 진입을 보실 수 있음) 이 주차장 환영간판의 뒤쪽에 "Boomtown Bodie"라는 제목으로 이 곳의 역사가 소개되어 있었는데, 둘러보면서 찍은 아래의 사진들과 함께 무법자들이 난무하던 서부시대 금광마을로 여행을 떠나보자~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그 전에 3층 콘크리트탑에 붙어있는 3개의 명판이 보이는데, 제일 위는 이 곳이 1961년에 미국의 국가유적지(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가운데는 1962년에 캘리포니아의 주립공원으로 각각 지정된 내용이고, 제일 아래는 이 곳을 복원하는데 기여한 것 같은 E Clampus Vitus라는 비밀조직(?)의 내용이다. 가운데 명판에 소개된 내용만 아래에 번역해본다. "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W. S. Bodey에 의해서 1859년에 여기서 금이 발견되었다. 한 때 모노카운티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로, 보디의 광산에서 채굴된 금의 가치는 1억불이 넘었다. 총과 칼을 든 냉혈한인 "보디의 악당" 이야기는 미서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아직도 전해 내려온다." 마을의 첫 인상은 서부영화셋트처럼 잘 지어진 건물들이 깔끔하다는 것이었다. 참, 여기서 처음 금을 발견한 보디(Bodey)는 이 건물들이 들어서고 자기 이름을 딴 마을이 생기는 것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바로 그 해 겨울에 눈보라 속에서 얼어죽었다고 한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여기는 해발 2553미터로 한여름에도 밤에는 얼음이 어는 날이 있다고 한다. 종탑이 있는 이 건물은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로 이 주립공원에서도 가장 사진에 많이 등장하는 곳이다. 하늘이 파랬으면 좋았을텐데 많은 구름에 산불연기가 여기까지 날라와서 뿌옇게 나왔다. 교회 내부를 창살 사이로 볼 수 있었는데, 마침 일요일이라서 잠깐 서서 기도도 했다~^^ 그런데, 저 파이프오르간 동작할까? 역시 코로나로 비지터센터와 박물관은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공원직원이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방문객들에게 멀직이 떨어져서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이 주립공원은 성인 1인당 8불의 입장료가 있는데 연간 20만명 이상이 방문을 한다고 한다. "창문에 창살이 있는 이 건물은 교도소인가?" 역사이야기로 돌아가면 금이 발견된 이후 2개 회사가 광산을 팠지만 10여년 동안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875년에 대규모 금맥이 발견되면서, 이 외지고 추운 곳으로 말 그대로 골드러시(Gold Rush)가 밀려들게 된다. 30개의 광산회사가 몰려들어서 1879년까지 2,000채 이상의 건물이 들어섰고, 여름철에는 거주인구가 1만명을 넘어서 당시에 캘리포니아 전체에서 2~3번째로 큰 도시였다는 주장도 있단다. (인구수로 5등 안에 든 것은 확실하다고 함) 멀리 보이는 큰 공장건물이 가장 많은 금을 캐고 또 마지막까지 운영을 했던 스탠다드밀(Standard Mill)이라고 하고, 전성기 당시 2천여채의 건물들 중에서 지금도 170채 정도의 건물이 남아있다고 한다. 공원입구에서 보이던 제일 오른쪽의 벽돌건물을 포함한 여러 개의 호텔과, 무려 65개의 술집(saloon)이 메인스트리트를 따라서 1마일에 걸쳐 영업을 했었단다. 가운데 큰 건물이 지금도 비지터센터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문을 닫은 상태라고 해서 이렇게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1880년대 이후로 금 채굴량이 급격히 감소하자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떠나버렸고, 마지막까지 명맥을 이어오던 광산이 1942년에 운영을 완전히 중단하면서 지금은 유령마을, 고스트타운(Ghost Town)이 된 것이다. 이 주택들은 마당에 나무도 자라고 있고, 지금 당장 누가 들어가 살아도 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신기한 것이 모든 창문의 유리창이 멀쩡하고 안에 하얀색 커튼도 드리워져 있어서, 오히려 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큰 나무 한 그루 없는 여기 척박한 땅에서 100여년 전에 금을 캐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음 번에 날씨가 좀 깨끗할 때, 이왕이면 눈이라도 좀 내린 초겨울 파란 하늘에 다시 와서 메인스트리트와 광산까지 다시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집 앞에는 이렇게 녹슨 자동차같은 것도 많이 버려져 있었는데, 나무와 쇠가 결국은 이렇게 같은 색깔이 되는구나...^^ 주차장이 만들어진 곳도 광산이 있던 자리라서, 이렇게 커다란 각종 장비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운데 연한 갈색으로 보이는 깨끗한 건물은 주립공원에서 새로 지은 화장실이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곳에 막상 와서는 30분 정도만에 구경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올랐다. 다시 비포장도로를 포함한 Bodie Rd를 돌아나가서 395번 국도를 타고 네바다 주경계 직전까지 북쪽으로 올라간 다음, 89번 주도로 산길을 달려 마침내 레이크타호에 도착해 숙박하는 것으로 9박10일 자동차여행의 2일째 여정이 끝났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