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 버지니아로 이사와서 두 달도 되지 않았던 2021년 12월말에, 많은 미국 위인들 동상이 만들어져 있는 내셔널하버(National Harbor)의 야외 공원에서 링컨 옆에 서있는 그를 처음 봤었다. 그 후 차례로 방문했던 웨스트버지니아 하퍼스페리(Harpers Ferry)와 메사추세츠 뉴베드포드(New Bedford) 국립역사공원에서 그의 이름을 마주쳤고, 올해 봄에 들렀던 아나폴리스(Annapolis)의 메릴랜드 주청사에서 최근에 세워진 그의 동상을 다시 만났었다. 흔히 제목처럼 "the most photographed person of the 19th century"로 알려져 있기도 한 그는, 웅변가이자 저술가로 노예해방론자로 활동한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이다.
워싱턴DC 남쪽의 아나코스티아 지역에 있어서 국립수도공원-동부(National Capital Parks-East) 그룹에 속하고, 1988년에 공식 지정된 국립 공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 국립사적지(Frederick Douglass National Historic Site)를 찾아왔다.
한쪽 언덕을 깍아서 넓은 주차장을 만들고, 바로 연결되는 비지터센터는 이렇게 땅속에 만들어서, 주변 경관을 헤치지 않도록 노력을 한 흔적이 엿보였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벽면과 천장의 거친 질감이 그의 힘들었던 어릴적 시절을 떠올리게 하려는 듯하다. 그는 1818년에 메릴랜드 시골에서 흑백 혼혈의 노예로 태어났는데, 출산 직후 엄마가 다른 곳으로 팔려가 백인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단다. 그 자신도 불과 8살에 혼자 볼티모어 가정집에 팔렸는데, 그 집의 백인 여성이 그에게 읽는 법을 잠깐 가르친 것이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위기주부가 3번째로 만나는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동상으로 앞서 2개에 비해서 가장 나이 든 모습을 묘사했는지, 흑인 특유의 아프로(Afro) 헤어스타일, 소위 '폭탄머리'가 힘이 빠져서 마치 단발처럼 보이는데, 이 포스팅 맨 마지막의 사진을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실거다~^^
레인저가 딱 맞춰 안내영화 <Fighter for Freedom>을 틀어줬는데, 8세때 글을 배우는 모습부터 1895년에 77세의 나이로 이제 방문하는 그의 집 현관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할 때까지의 일생을 배우들이 잘 보여주었다. 앞에 계신 분도 혼자 오셨던데 무료 투어에 참가하지 않는 바람에, 영화가 마치고 진행된 가이드투어는 위기주부 단 1명만을 위한 단독 투어였다! ㅎㅎ
언덕 위로 올라오면 1877년에 그가 지금의 워싱턴DC 경찰서장에 해당하는 U.S. Marshal of the District of Columbia에 취임하면서 구입한 저택이 나오는데, 미국에서 상원의 인준이 필요한 연방정부 고위직에 흑인이 임명된 최초의 사례이다. 그는 청소년기에 플랜테이션에서 채찍을 맞으며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몰래 독학으로 많은 책을 읽었고, 다시 볼티모어의 조선소로 보내진 후에 자유흑인이었던 Anna Murray의 도움으로, 20세때 가짜 신분증으로 뉴욕행 기차를 타고 탈출 후 결혼해서 함께 메사추세츠 뉴베드포드로 도망가게 된다.
그가 시더힐(Cedar Hill)로 불렀다는 저택의 정면 사진을 찍고 다가가니, 현관문을 열고 파크레인저와 투어를 담당하는 자원봉사자가 나왔다. 그리고 젊은 남녀 두 명이 옆길로 다가오길래 다른 참가자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들은 투어를 따라다니며 이 곳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 국립공원청 인턴들이었다. 즉, 직원 4명에 손님 1명...! 파크레인저는 비지터센터로 내려가고, 보조 2명을 대동한 가이드가 위기주부만을 위해 설명을 해주는 '황제투어'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현관 오른편의 응접실(parlor)로 이 집의 가구와 소품들은 대부분이 더글러스가 살던 19세기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이렇게 잘 유지가 될 수 있었던데는 44년간 해로한 Anna가 병으로 죽고, 2년후에 재혼한 두번째 부인 Helen Pitts가 그의 사후에 기념재단을 만들어 집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그녀는 더글러스의 일을 돕던 20살 연하의 백인 여성이라서, 둘의 결혼은 양가에서 모두 심한 반대에 부딪혔었단다.
자신이 노예였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직접 만들어 달았다는 커텐 고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1841년부터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노예제폐지(abolition) 운동의 연사로 활동을 시작해서 1845년에 자신이 경험한 노예의 삶을 서술한 책을 내면서 유명해진다. 하지만 당시 연방법에 따라서 도망친 노예인 범법자였기 때문에, 노예사냥꾼들을 피해서 유럽으로 건너가야 했다. 그 후 강연료 등을 모아서 자신의 법적인 소유자에게 돈을 지불한 후인 1847년에야 자유인 신분으로 미국에 돌아올 수 있었단다.
1층 안쪽에 위치한 그의 서재(library)로 많은 책과 링컨의 흑백사진이 눈에 띈다. 미국에 돌아온 후에 뉴욕 로체스터(Rochester)에 정착해서 신문을 발행하며 노예제폐지 운동을 계속하는데, 급진주의자 존 브라운(John Brown)과도 인연이 있어서 그가 1859년에 흑인 무장을 위해 하퍼스페리 무기고를 습격했다가 체포된 후에, 더글러스는 잠시 캐나다와 유럽으로 또 도피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북전쟁 발발 후에 백악관에서 링컨을 만나서 흑인 부대 창설을 주도했고, 실제로 그의 아들들도 모두 남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식당(dinning)에 걸린 그림과 사진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계신 자원봉사자 가이드님으로, 항상 저렇게 유일한 손님을 쳐다보며 설명을 해주셔서 사진 몇 장 찍는 것도 아주 힘들었다는...^^ 계속해서 부엌에 있는 오븐과 싱크대까지 모두 사연을 들은 후에야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내부 투어의 마지막 사진은 2층에 있는 그의 침실로, 1889년부터 2년간 주 아이티(Haiti) 공사를 지낸 기간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 투어를 다 마치고 감사 인사를 한 후 집밖으로 나가 시간을 확인했더니 거의 1시간이 흘렀더라는~
뒤뜰에는 그가 '그라울러리(Growlery)'라 불렀다는 작은 돌집이 복원되어 있는데, 본채의 좋은 서재보다도 저 안에 혼자 틀어박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한다.
기분이 언짢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맘껏 '으르렁(growl)' 할 수 있는 개인실이나 아지트, 즉 피난처 또는 안식처의 의미로 그렇게 지었다는데, 혹시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서 도망가는 용도로 주로 사용한 것은 아닐까? ㅎㅎ
경사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돌아가며 올려다본 시더힐 저택으로 원래 방이 14개였는데, 구입 후에 뒤쪽으로 건물을 이어붙여서 방이 모두 21개나 있단다. 60세에 이리로 이사올 당시에 5명의 자녀로부터 손주가 20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많은 방이 필요했다고... 그럼 마지막으로 왜 포스팅의 제목과 같이, 그가 세계에서 가장 사진에 많이 찍힌 19세기 사람이라고 여겨질까?
위 포스터와 같이 그의 사진만 모아서 따로 전시회도 열고, 비지터센터 서점에서는 두꺼운 사진 해설집도 판매하고 있는데, 노예해방 운동을 시작한 1840년대부터 죽기 직전까지 50여년 동안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찍은 독사진이 160장이 넘는다고 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길어야 8년 정도만 유명했던 반면에,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는 50년 이상 계속해 미국과 영국에서 뉴스가 되고 신문에 얼굴이 나왔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자면 틱톡이나 인스타를 주름잡은 인플루언서 또는 셀레브리티로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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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부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관광지를 알리는 갈색 도로표지판에 무슨 'National Heritage Area' 또는 'National Heritage Corridor'라고 적힌 것을 가끔 보게 된다. 현재 미국에 55개가 있는 이러한 "국가유산지역"은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에 대통령이 서명해서 지정되는데, 역사와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 특정 지역을 국립공원청의 자문과 협력을 받아서 여러 기관이나 개인의 보존 및 개발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11월말에 추수감사절 연휴를 집에서 함께 조용히 보낸 딸을 다시 학교에 차로 데려다주고 내려오면서 잠깐 구경한 곳이, 이러한 국가유산지역에 포함되는 뉴욕주의 국립 공원이었다.
허드슨리버밸리 내셔널헤리티지에리어(Hudson River Valley National Heritage Area)는 위의 지도와 같이, 뉴욕시(New York City) 북쪽에서 주도인 올버니(Albany)까지 이어지는 허드슨 강의 계곡 지역으로, 그 안에 약 100개에 달하는 역사/문화/자연 관광지가 모여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글자 배경을 노란색으로 칠한 6곳이 국립공원청이 직접 관리하는 장소인데, 지도를 확대하면 가운데 쯤에 위치한 하이드파크(Hyde Park) 마을에 3곳이 모여있는 것을 보실 수 있다. (지도에 Val-Kill로만 표시된 곳도 NPS의 독립적인 유닛인 Eleanor Roosevelt National Historic Site임)
밴더빌트맨션 국가유적지(Vanderbilt Mansion National Historic Site)의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이 건물은 본채가 아니고, 미혼 남성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지어져서 지금은 비지터센터로 사용되는 곳이다.
맨션투어는 목~월요일 하루 4번 정해진 시간에 선착순으로 진행되는데, 1인당 $10의 유료라고 되어있지만... 국립공원 연간회원권을 소지한 경우에는 4명까지는 무료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 2명은 FREE~ ㅎㅎ
작은 전시실 왼편에는 여기서 조금 아래쪽에 살았던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의 이야기와 함께 하이드파크 동네의 역사 등이 소개되어 있다. 제일 오른쪽에 보이는 이 맨션의 역사는 나중에 소개하기로 하고, 그 옆으로 여성분이 보고 계시는 밴더빌트 패밀리(Vanderbilt Family)의 가계도를 확대해서 보도록 하자.
제일 위 흑백사진의 Commodore Cornelius Vanderbilt와 그의 맏손자가 지은 제일 왼쪽 사진에 보이는 집인 '브레이커스(Breakers)'에 대해서는 얼마 전 여행기에서 설명을 드렸다. (CNN의 간판 앵커인 앤더슨 쿠퍼의 어머니로 유명인이었던 Gloria Vanderbilt가 브레이커스를 지은 코넬리우스 2세의 손녀딸) 할아버지에 이이서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아버지의 유산을 골고루 나눠받은 장성한 8명의 자녀들은 미동부에 도합 40채가 넘는 대저택들을 새로 지었는데, 이 곳은 여섯째인 Frederick William Vanderbilt가 1899년에 완공한 곳으로 유일하게 현재 연방정부가 소유해서 국립 공원으로 개방이 된다.
투어시간이 되어 실내에서 이상과 같은 설명을 레인저로부터 들은 후에, 비지터센터의 옆문을 나서서 맨션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월요일 아침 10시의 첫번째 투어에 참가한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포함해 총 7명이었다.
자기 집은 아니지만 이런 대저택의 열쇠를 들고 다니며 정문을 열어주는 레인저의 기분도 괜찮을 듯...^^ 건물의 전체 모습은 내부투어를 마치고 나와서 보여드리기로 하고, 일단 사람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보자~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2층까지 천정이 뚫려있는 Entrance Hall에서 레인저가 기본적인 설명을 한 후에, 사방의 방들을 자유롭게 둘러보는 식으로 투어가 진행되었다. 앞서 가계도를 자세히 다시 보시면 유산을 나눠받은 8명의 형제자매들 중에서 이 부부만 유일하게 자녀가 없었고, 그래서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살던 Frederick은 아내의 조카 Margaret Louise Van Alen에게 이 집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1938년에 죽었다. 원래 왠만큼 부자였던 그녀는 바로 이 집을 시장에 내놓았지만 가격을 낮춰도 팔리지 않았고, 결국 이웃에 살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권유에 따라 국립공원청에 그냥 기증을 했던 것이다.
입구 왼편부터 차례로 돌아보면, 제일 작은 이 방은 프레더릭이 업무를 보는 서재(Office)였다고 한다.
그 옆으로 덴(Den)이라고 된 이 방은 남자 손님들을 맞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 곳 답게, 동물 머리의 박제와 그 아래에 엽총 등이 전시가 되어 있다.
주 응접실인 리빙룸(Living Room)에는 예쁜 크리스마스 트리가 불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가장 놀라운 사실을 알려드리면... 이 맨션은 부부가 함께 봄과 가을철에만 짧게 머물렀던 별장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이 이 집에 거주할 때는 한 번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적이 없고, 늦가을에 주인이 뉴욕 맨하탄 5번가의 저택으로 돌아가면 겨울내내 굳게 잠겨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화려한 길디드에이지(Gilded Age), 즉 '도금시대(鍍金時代)'라는 이름에 걸맞게 벽과 천장에 진짜 금박을 입혀서 사치스럽게 장식한 리셉션룸(Reception Room)의 모습이다.
홀을 건너서 다이닝룸(Dining Room)의 식탁 위에는 "Vanderbilt Holiday"라는 이름으로, 실제 밴더빌트 가문이 맨하탄에서 연말파티를 할 때 준비했던 뷔페 음식의 모형이 차려져 있었다.
Grand Staircase의 레드카펫을 밟으며 아내가 1등으로 올라가는데, 저 계단을 두 바퀴를 돌아야 2층이 나왔다.
안주인의 침실인 Mrs. Vanderbilt's Room으로 침대 주위를 대리석 난간과 기둥으로 둘러싼 이유는, 프랑스 왕실의 궁전에서 여왕의 침실을 저런 식으로 만든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한 것이라고 한다. 모든 방은 이렇게 입구에서만 볼 수 있고,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할 수는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침실과 연결된 옷을 갈아입는 용도로 사용하는 방인 듯 한데, 이런 내실을 부드와(Boudoir)라 부르는 모양이다. 그리고 남편의 침실은 당연히 별도로 있는데, 내부 보수중이라 가구를 다 빼놓아서 따로 사진은 찍지 않았다.
맞은편에 있는 가장 넓은 손님방인 블루룸(Blue Room)의 모습 등을 구경하고는 하인들이 이용하는 별도로 만들어진 좁은 나무계단을 이용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물품을 보관하는 곳과 함께 하인들의 방이 만들어져 있는데, 주인 부부 두 명이 여기에 머물 때 보통 약 20명의 하인이 함께 살면서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지하와 연결된 주방을 잠깐 구경하고는 하인들이 다니던 반지하의 옆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밴더빌트 맨션(Vanderbilt Mansion)의 전체 모습인데, 올라가보지 않은 3층까지 포함해서 54개의 방과 21개의 벽난로가 있고, 당시로는 최신의 전기 시설과 중앙 난방장치를 갖추었단다. 특히 철도회사를 운영했던 가문답게 이 곳에 맨션을 지으면서, 하이드파크 마을에 철로와 기차역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허드슨 강을 따라 좀 걸어서 이 저택의 정원인 Formal Gardens를 찾아 와봤다. 입구에 세워진 4개의 흉상은 19세기 미국의 풍경을 묘사한 Hudson River School 운동의 대표적 화가들인 Thomas Cole, Thomas Moran, Albert Bierstadt, 그리고 Sanford Gifford로 최근에 만들어 세운 것이다.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관의 까만 커튼이 쳐진 독실에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걸려있는 Albert Bierstadt (그림을 보시려면 클릭!) 흉상 뒤로 보이는 이층집은 정원사의 오두막이란다.
꽃이 다 떨어진 늦가을이라서 그런지 투어를 한 사람들 중에서도 정원까지 걸어 온 것은 우리 부부 뿐이었다. 저 아래쪽으로도 다른 정원과 함께 조각이 있는 연못도 만들어져 있다고 하지만, 더 걸어가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우리도 그만 돌아섰다.
나중에 꽃 피는 봄이나 단풍이 든 가을에, 우리도 밴더빌트 부부처럼 뉴욕에서 출발해 이 곳을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처음 달려보는 고속도로로 펜실베니아 주를 가로질러 버지니아의 집으로 돌아갔었다. 미래의 그 때에는 허드슨 강변을 따라 계속 걸어서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의 생가와 도서관도 방문해보고, 또 하이드파크(Hyde Park)에 본교가 있는 세계적인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요리학교의 학생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다는 카페에서 식사도 꼭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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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년전에 버지니아(Virginia) 주로 이사를 온 후부터, 미동부를 돌아다닌 여행기를 쓰고 있으면... 본인이 미국사를 전공하는 역사학도가 된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열심히 찾아보고 정리해서 재미있게 블로그에 올려봐야 알아주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왜 계속 이 짓을 하고있을까?"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지난 9월에 집에서 남쪽으로 다녀온 1박2일 여행도 거의 '역사투어'에 가까웠는데, 지금의 미국땅에 영국인들이 최초로 식민지를 건설했던 두 곳이 목적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본편은 자료조사와 정리를 다 마쳤으니 평소처럼 논문...이 아니라 여행기를 완성하고, 앞으로도 역사공부를 계속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전편에서 소개한 미국에서 가장 높은 등대를 구경하고 (여행기를 보시려면 클릭),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의 해안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섬들을 이어주는 다리를 달려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사진 정면에 나지막히 건물들이 보이는 땅이 그 평행사도(Barrier Island) 안쪽에 있는 로어노크 섬(Roanoke Island)으로, 이제 찾아가는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Whalebone Junction 삼거리에서 시작되는 64번 국도로 좌회전 후에 또 다리를 건너면 로어노크 섬이다. 마땅히 점심을 먹을만한 곳이 없어서 만테오(Manteo) 마을의 맥도널드에서 투고를 해서 국립공원의 피크닉 장소에서 먹기로 했다.
섬의 제일 북쪽에 포트롤리 국립사적지(Fort Raleigh National Historic Site)가 있는데, 그 밑에 별도로 적혀있는 두 곳은 아래의 공원지도를 보며 설명을 드리기로 한다. 참고로 노스캐롤라이나 주도(state capital)도 같은 사람의 이름을 딴 롤리(Raleigh)인데, 실제 영어발음은 '랄리'에 가깝지만 대부분의 한글 사이트에서 '롤리'로 표기를 해서 그에 따르기로 한다.
먼저 다른 색으로 표시된 엘리자베스 가든(The Elizabethan Gardens)은 1950년대에 조성된 영국식 정원인데, 시간도 없었고 별도의 입장료가 있어서 들리지 않았다. 또 수변무대(Waterside Theatre)는 1937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여름마다, 이제 소개할 '잃어버린 식민지'를 소재로 한 로스트 콜로니(The Lost Colony) 야외공연을 하는 장소이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과 코로나 팬데믹이 정점이던 2020년의 두 시즌만 건너뛰고 지금까지 계속 같은 내용의 공연을 한 장소에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케스트라가 동원되는 공연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어지는 기록이라고 한다.
그 두 곳을 빼고나면 사실 여기서 남는 것은 거의 이 비지터센터 밖에는 없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여기 나무 그늘의 피크닉테이블에서 늦은 점심으로 '1+1버거'를 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다.
비지터센터에 붙어있는 이름인 린제이 워런(Lindsay Warren)은 1941년에 이 곳이 국립사적지로 지정되는데 기여한 연방 하원의원이다.
안내영화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먼저 제일 안쪽에 보이는 전시실을 구경했다. "그럼 역사공부를 또 시작해볼까?"
1584년에 영국인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이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후원으로 신대륙을 탐험해, 여기 로어노크 섬에 도착해서 최초로 잉글랜드 깃발을 꼽고 '처녀여왕'을 기리는 의미로 버지니아(Virginia)라 명명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탐험대 수준이라서 오래 머물 수 없었고, 다음 해에 병력을 끌고 다시 와서 주둔지를 만들기는 했지만 역시 또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
마침내 1587년 여름에 친구인 존 화이트(John White)를 책임자로 여성과 어린이가 포함된 약 120명의 이주민이 도착해서 여기에 최초의 잉글랜드 식민지를 건설한다. 하지만 원주민과의 분쟁 및 식량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연말에 존 화이트가 보급품과 추가인력을 데리고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는 존 화이트의 딸과 사위, 그리고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영국계(English) 사람으로 기록된 그의 손녀인 버지니아 데어(Virginia Dare)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영국은 바로 구호선단을 보낼 여력이 없었고... 결국 화이트는 손녀의 3번째 생일인 1590년 8월 18일에야 로어노크 섬에 돌아왔지만, 마을은 전투가 벌어진 흔적도 없이 버려진 상태로 120명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유일한 단서는 울타리 기둥에 새겨진 '크로아토안(Croatoan)'이라는 남쪽 원주민 부족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화이트는 바로 40마일 떨어진 그 곳에 가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폭풍우도 몰아치고 그의 선원들은 스페인 무역선의 해적질이 항해의 주목적이라서 탐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사라진 사람들의 행방은 결국 미궁으로 남았다.
이상의 내용을 모두 보여주는 안내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다른 전시실로 들어갔더니, 그 곳에는 왼쪽의 월터 롤리 경과 오른쪽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신대륙 탐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창문 너머 실루엣으로 보이는 두 명이 움직이면서 실제 대화를 하는 영상이 나오는데, 아내가 조종판 앞에서 꼼꼼히 내용을 읽어보고 있는 모습이다. 롤리는 영국의 정치인, 탐험가, 작가, 시인이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으로, 진흙길 위에 자신의 값진 망토를 펼쳐 엘리자베스 1세를 지나가게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며, 일설에는 그가 엘리자베스 1세의 숨겨진 애인이라는 주장도 있단다.
특히 그는 신대륙에서 들여온 담배를 영국에 최초로 전파한 인물로 유명한데, 그가 담배연기를 내뿜자 하인이 불이 붙은 줄 알고 롤리에게 물을 퍼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렇게 엘리자베스 시절에는 잘 나가던 그였지만... 1603년에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정쟁에 휘말려 런던탑에 갇혀 12년을 보내야 했으며, 65세에 특별사면을 받아서 다시 신대륙으로 탐험을 떠나지만, 항해중에 스페인과 싸우지 말라는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다시 송환되어서, 결국 웨스트민스터에서 참수형으로 최후를 맞이한 한마디로 '풍운아'라 할 수 있다.
비지터센터 앞마당에 세워진 Freedmen's Colony Monument라는 까만 기념비에 우리 부부가 비친 모습이 살짝 보인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흘러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이 로어노크 섬을 점령해서 롤리 요새(Fort Raligh)를 만들고, 남부 여러 주에서 탈출한 흑인 노예들을 여기에 받아들여 그들의 목숨을 살린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볼거 다 본거 같았지만 그래도 국립공원에 왔으니 조금은 걸어주는 것이 예의일거 같아서, 비지터센터 옆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공원지도에 1896 Monument라 되어있는 비석인데, 이 장소의 역사적 가치를 최초로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협회에서 1896년에 만들어서 세운 것으로, 앞서 언급한 영국인들의 탐험 기록들과 함께 이 땅에서 태어난 Virginia Dare가 세례받은 이야기 등이 자세히 적혀있다.
20세기 들어서 여기 '로어노크의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 of Roanoke)'의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대장간의 쇳덩이나 도자기 조각 등이 약간 나온 것 말고 큰 성과는 없는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무슨 건물의 흔적같이 보이는 이것도, 1585년에 영국 탐험대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으로, 1950년대에 일부러 다시 만든 토성(Earthen Fort)의 잔해일 뿐이다.
전시실에 작게 붙어있던 삽화로, 존 화이트가 사람들은 사라지고 'CROATOAN' 글자만 남아있는 로어노크 식민지(Roanoke Colony)에 돌아온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드린다. 이 잃어버린 식민지와 흔적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상상력이 더해져서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으며, 지금도 DNA 분석기법 등을 이용해서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추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이렇게 월터 롤리(Walter Raleigh)가 주도했던 영국인들의 첫번째 아메리카 식민지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후 런던 주식회사(London Company)에서 다시 3척의 배로 100여명의 남성을 1607년에 북쪽의 체사피크 만 안쪽에 상륙을 시켜서 성공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는데... 그 곳도 다음날 오후에 직접 찾아갔으므로, 이어지는 1박2일 여행기에서 역사공부는 계속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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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들마다 평가가 다를 수는 있지만,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국가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과 관련된 곳을 '넓은 의미의 국립공원'으로 지정을 해서 관리하는 미국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의 기준으로 본다면, 최후를 맞이한 이 곳을 포함해서 출생과 성장과정 등에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장소가 5곳이나 각각 국가의 유적지나 기념물로 연방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라고 할 수 있다.
워싱턴DC의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서 1800년대의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포드 극장(Ford's Theatre)이 있다. 남북전쟁이 끝난지 5일 후인 1865년 4월 14일 금요일 저녁에 여기서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 대통령이,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가 쏜 총을 맞고 다음 날 아침에 사망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옆 건물에 만들어진 입구로 들어가면, 커다란 링컨의 사진과 함께 이 극장을 옛날 모습으로 복원해서 박물관으로 운영하는데 도움을 준 기부자들의 명단이 보이는데, 가운데 줄에 'SAMSUNG'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눈에 띈다. 구경은 무료지만 30분 간격으로 입장 인원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박스오피스에서 표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포드시어터 국가유적지(Ford's Theatre National Historic Site)라 적힌 문을 통해 극장 건물로 들어가는데, 현재 건물은 연방정부의 소유지만 운영은 Ford's Theatre Society라는 독립적인 재단이 맡고 있으며, 실제로 연극 공연을 하는 극장으로도 계속 운영이 되고 있다.
안내를 따라 걸어가면 계단을 내려가서 먼저 극장 지하에 만들어진 박물관을 구경하게 되는데,
돔을 건설 중인 국회의사당의 모형을 비롯해서, 링컨이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의 워싱턴 상황과 남북전쟁으로 인한 미국 사회의 분열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역사공부를 너무 많이 했더니 대부분 본 듯한 내용이라서, 대충 흘겨보고는 빨리 공연장으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큰 실수였다!
왜냐하면 이 올라가는 계단 옆의 공간에 암살범이 실제 링컨을 저격할 때 사용했던 데린저(Deringer) 단발권총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놓쳤기 때문이다. (암살에 사용된 무기를 전시해놓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도 있다고 하며, 여기를 클릭해서 극장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보실 수 있음)
다시 지상층으로 올라오면 약간의 경사가 있는 긴 복도를 지나게 되는데, 양쪽 벽면에 링컨과 부스의 당일 행적이 시간별로 각각 그려져 있고, 두 명의 타임라인은 이제 들어갈 극장에서 밤 10시 15분경에 겹치게 된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극장이 예상보다 훨씬 커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국립공원청 직원이 무대에 올라가서 암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2층에도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여서 우리도 바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레인저가 가리키고 있는 무대 옆 위쪽의 Presidential Box에서 링컨은 아내 및 뉴욕주 상원의원의 딸과 약혼자인 육군 소령과 함께 <Our American Cousin>이라는 희극을 관람하고 있었는데, 당시 남부 출신의 유명한 연극배우로 극장 주인과도 잘 알고 지냈던 존 부스가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박스석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입구에 경찰관 한 명만 배치가 되었는데, 그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고 함)
부스는 제일 오른쪽 의자에 앉아있던 링컨의 뒷통수에 총을 발사해 치명상을 입히고, 육군 소령은 칼로 찌른 후에 무대로 뛰어내려서 "Sic semper tyrannis"를 외치고는 미리 극장 밖에 준비해 둔 말을 타고 도주했다 한다. 그가 외친 말은 위기주부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Virginia) 주의 모토로 아래의 예전 소개 포스팅을 클릭해서 보시면, 그 뜻과 함께 존 부스의 사진과 암살 순간을 그린 삽화 등을 보실 수 있다.
포드 극장 2층 객석의 뒤에 놓여진 커다란 링컨의 두상 조각의 설명을 아내가 자세히 보고 있다. 이게 국가유적지 관람의 끝이 아니고, 링컨이 총을 맞은 이후의 이야기는 이제 극장을 나가서 바로 길 건너편으로 이동해서 계속 이어진다.
극장 안에 있던 의사와 군인들에 의해서 들려져 나온 링컨의 상태는 도저히 백악관까지 갈 수 없는 중상이었기 때문에, 바로 맞은편에 당시 하숙집으로 운영되던 저 살구색의 피터슨하우스(Petersen House)로 운반이 되었다.
정면 벽에는 대통령 문양과 함께 에이브러햄 링컨이 총을 맞은 다음날 아침에 이 집에서 사망했다는 것과 1896년에 연방정부가 여기를 사들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미국이 역사적 장소의 보존을 위해 최초로 개인 소유의 주택을 구매한 것이라고 한다.
입구에 서있던 레인저에게 표를 보여주고 들어가면 먼저 거실이 나오는데, 지혜가 벽난로 위에 놓여진 링컨이 들것에 실려서 이 집으로 운반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 있다. 그리고 연결된 다른 방을 거쳐서 계단 아래의 제일 안쪽 방으로 들어가면,
바로 이 방에서 링컨 대통령은 1865년 4월 14일 아침 7시 22분에 56세로 숨을 거두었다 한다. 실제 링컨이 누웠던 침대는 현재 시카고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여기는 같은 디자인과 크기의 침대를 가져다 놓았는데, 침대가 너무 작아서 키가 큰 링컨을 대각선으로 눞여야만 했다고 한다.
임종 순간을 묘사한 그림과 직후의 방 사진, 그리고 링컨의 마지막 공식 사진이 함께 있는 설명판이다. 여기서 옆 건물과 연결된 통로를 지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사망 이후의 이야기가 또 계속된다.
4층 애프터매스(Aftermath) 전시실에는 경로를 그린 두 개의 큰 지도가 차례로 나오는데, 첫번째는 링컨의 장례 운구 열차가 수도 워싱턴을 떠나서 고향인 일리노이(Illinois) 주의 스프링필드까지 이동했던 것을 보여주고,
두번째는 암살범 존 부스가 DC를 빠져 나와서 12일 후에 버지니아 주의 담배농장 창고에서 체포에 저항하다가 사살될 때까지의 도주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그 후 공범 8명이 군법재판소에 회부되어서, 그 중 4명이 암살사건 발생 약 3개월이 안되는 7월 7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랫층으로 내려가는 원형계단의 가운데 기둥 주위를 1층 바닥부터 여기 4층까지 모두 링컨과 관련된 15,000권의 서적으로 빼곡히 쌓아놓은 타워오브북스(Tower of Books)가 참 멋있었다. (갑자기 디즈니월드의 타워오브테러 놀이기구가 떠오름^^) 책으로 만든 '공든탑'을 밀어서 무너뜨리려는 아내의 위치에서 자세히 봤더니, 책의 앞뒤 표지만 진짜이고 가운데 부분은 모두 책두께에 맞춘 빈 플라스틱으로 만든 후에 접착제로 튼튼하게 서로 붙여놓은 것이었다.
3층 레거시(Legacy) 전시실은 미국과 전세계에서 그의 유산과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왼편의 만화처럼 마블코믹스 멀티버스에서 캡틴아메리카, 스파이더맨과 함께 히어로로 등장한 것도 재미있었지만, 사진 가운데 벽면에 아주 관심을 끄는 전시물이 있었다.
한국 대표단이 포드 극장에 선물했다는 노무현 대통령이 쓴 링컨의 평전 <노무현이 만난 링컨> 책과 그 뒤의 호랑이가 그려진 접시를 설명과 함께 전시해 놓았다. 혹시 한자에 조예가 있으신 분은 호랑이 위에 씌여진 글이 무슨 뜻인지 댓글로 알려주시기를 바란다. 계속해서 원형계단을 따라 내려가는데 2층의 교육실은 문을 열지 않았고, 1층에는 기념품 가게가 자리잡고 있다.
그 벽면에는 이 가게가 특별히 삼성의 지원을 받은 사실에 감사한다는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는 것도 특이해서, 마지막 사진으로 남기고는 링컨이 암살된 장소인 포드극장 국가유적지(Ford's Theatre National Historic Site) 구경을 마쳤다. 글의 맨 처음에 NPS에서 관리하는 링컨과 직접 관련된 장소가 5곳이라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지금 연재하고 있는 2차 대륙횡단 여행기에서 링컨이 출생한 장소가 역사공원으로 지정된 곳도 조만간 블로그에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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