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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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여기는 남부 버지니아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 당일여행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순환 경로에서 벗어나 왕복 2시간 이상을 더 운전해야 했고, 사실상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출생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번째 방문지를 떠나며 여기를 가보기로 한 이유는... 어떤 흑인이길래 태어난 곳이 내셔널모뉴먼트(National Monument)로 지정되었는지 궁금함과 그의 이력에 등장하는 '터스키기(Tuskegee)'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또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은 5월초 봄날의 화창한 날씨도 한 몫을 했다~
2021년 대륙횡단 이사를 하며 방문했던 내츄럴브리지(Natural Bridge)보다도 더 남쪽에, 정말 다시는 와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시골길을 한참 달려서 도착을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크게 잘 지어진 비지터센터며 다른 모든 시설이 아주 깔끔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그는 1896년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고, 사후 1940년 우표에 등장하고, 1942년 이름을 딴 수송선이 건조되고, 1946년 동전에 얼굴이 새겨졌으며, 출생 100주년이던 1956년에 여기 태어난 곳이 부커T워싱턴 내셔널모뉴먼트(Booker T. Washington National Monument)로 지정이 되었는데, 흑인으로서는 모두 최초의 기록이라 한다. 또한 우리가 다 아는 1935년작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그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한국의 농민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국립 공원에서는 월급 받는 레인저보다 자원봉사자들이 수다가 많은데, 저 여성분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아시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남부 버지니아 시골에 위치한, 옛날 흑인노예가 태어난 장소를 불쑥 혼자 찾아온 동양인이 신기할 법도...ㅎㅎ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끊고는 안내영화가 있냐고 물었더니,
위기주부만을 위해서 직접 영화를 틀어주셨다. 다 보고 궁금한 점은 나와서 또 물어보라는 말씀과 함께~ 그 제목이 <Measure of a Man>이라서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 지를 좀 찾아봤더니,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 사람의 척도'라는 뜻으로 엘튼존의 노래, 시드니포이티어 자서전, 프랑스 영화 등의 제목이기도 한 굉장히 심오한 말인 듯 하다.
처음 입구 사진의 배너에도 씌여진 "Born Here, Freed Here"라는 말처럼, 그는 여기서 노예로 태어나 9살이던 1865년에 남북전쟁이 끝나며 자유인이 되었다. 그 후 새아버지와 가족은 웨스트버지니아 몰든(Malden)으로 이주하고, 그는 10살부터 염전과 광산에서 일을 하며 스스로 읽는 법을 깨우친다. (친아버지는 소유주였던 백인으로 추정된다고 함)
영화에도 나오는 장면으로, 연방군 장교가 마을에 와서 노예해방으로 이 시간부터 모든 흑인은 자유인이라는 성명을 낭독하는 모습의 조각이다. (다음 편에 소개할 첫번째 방문지가 바로 그 남북전쟁이 끝난 장소) 시간이 빠듯했지만 그래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담배농장은 한 번 둘러봐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야간학교를 다니며 배움의 열정은 점점 커져만 갔고, 버지니아 햄튼(Hampton)에 흑인들을 위한 고등교육 학교가 있다는 말만 듣고, 15살에 혼자 집을 떠나서 햄튼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모른채 동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500마일(800 km)을 마차를 얻어타거나 걸어서 Hampton Normal and Agricultural Institute에 도착했지만, 최소한의 학비를 낼 돈도 없었기 때문에 학교 청소일을 하며 3년만에 우등으로 졸업한다. (햄튼을 방문했던 여행기는 여기를 클릭) 사진 정면에 보이는 통나무집이 복원한 이 농장의 부엌 건물인데,
흙바닥의 여기서 그가 태어나고, 9살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모습이 영화에 나왔었다. 계속해서 그는 1875년에 웨스트버지니아로 돌아가 자신이 다녔던 야간학교에서 3년간 선생을 한 후, DC의 신학대에 입학하지만 1년만에 그만두고, 다시 햄튼의 모교로 돌아가서 강사와 사감을 맡아서 2년을 더 보내게 된다.
옆에 있던 다른 작은 통나무집은 당시의 창고 모습으로 복원을 해놓았다. 그러다가 햄튼 학교의 설립자였던 Samuel Armstrong이 당시 흑인들의 환경이 훨씬 더 열악했던 앨라배마(Alabama) 주에도 유사한 교육기관을 세우기로 하고, 그 책임자로 25살의 부커를 보낸 마을의 이름이 바로 '터스키기(Tuskegee)'였다.
농장에서 가장 큰 왼쪽 건물은 마굿간(horse barn)이었다고 하는데, 말은 볼 수가 없었고 대신에...
닭장에 커다란 닭들은 몇 마리가 있었다. (닭 키우는 연방 공무원 이야기를 보시려면 클릭) 1881년 독립기념일에 터스키기 보통학교(Tuskegee Normal School)가 개교하지만 땅도, 건물도, 선생님도, 돈도 없고 오직 부커와 30명의 학생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마를 만들어 벽돌을 직접 구워서 건물을 지으며 첫 해를 보냈지만, 1888년에는 400명의 학생과 여러 건물을 가진 터스키기 기술학교(Tuskegee Institute)로 발전하는데, 흑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술 교육과 함께 백인 사회에 동화될 수 있는 청결과 매너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교육자인 동시에 흑인 문학가로도 인정을 받는데, 자서전 "노예의 굴레를 벗고(Up From Slavery)"는 지금도 읽히며, 1895년 애틀란타에서 열린 목화 박람회에서의 명연설은 그를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이를 이용해 그는 의회와 대통령에게 흑인 정책에 대한 자문을 하고, 북부의 산업가들이 남부 흑인학교를 지원하도록 해서, 20세기 초까지 터스키기 졸업생들이 미국 남부 전역에 흑인 공립학교 5,000개를 설립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던 부커는 1915년 59세의 나이에 뉴욕에서 갑자기 쓰러져 터스키기의 자택에 실려와 숨을 거두고, 자신이 계속 교장을 맡았던 기술학교의 예배당 옆에 묻혔다. 지금은 터스키기 대학교가 된 캠퍼스에 남아있는 그의 묘지와 기념비, 자택과 박물관 등 초기 건물들은 1974년에 국립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이 되었는데, 미국의 수 많은 대학들 중에 캠퍼스 일부가 국립 공원으로 관리되는 유일한 경우라 한다.
또 그의 사후 일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흑인 전투기 조종사들을 일컫는 '터스키기 에어맨(Tuskegee Airmen)'들이 훈련을 받았던 학교 바로 옆의 비행장도 1998년에 별도의 국립사적지가 된다. 1939년 흑백분리 시절에 흑인들만을 위한 조종사 훈련시설이 거기 만들어진 이유도 터스키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군대의 극심한 차별을 극복한 흑인 조종사들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위기주부가 터스키기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 것도 그 때문으로 생각이 된다.
준국립공원을 나가면서 오두막이 함께 그려진 입구 표지판을 찍어봤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aliaferro Washington)은 당시 흑백평등의 즉각 실현은 불가하므로 교육을 통해서 흑인들의 경제적 자립과 사회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백인 우월체재를 받아들이는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흑인 교육자인 동시에 지도자이다. 그래서 나중에 급진적인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태도를 백인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소설 속 '톰 아저씨'같다며 엉클토미즘(Uncle Tomism)이라 비판하게 된다. 그의 사후 100년이 조금 못미쳐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지만, 과연 누구의 생각이 옳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중인 듯하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원래 여기는 남부 버지니아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 당일여행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순환 경로에서 벗어나 왕복 2시간 이상을 더 운전해야 했고, 사실상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출생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번째 방문지를 떠나며 여기를 가보기로 한 이유는... 어떤 흑인이길래 태어난 곳이 내셔널모뉴먼트(National Monument)로 지정되었는지 궁금함과 그의 이력에 등장하는 '터스키기(Tuskegee)'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또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은 5월초 봄날의 화창한 날씨도 한 몫을 했다~
2021년 대륙횡단 이사를 하며 방문했던 내츄럴브리지(Natural Bridge)보다도 더 남쪽에, 정말 다시는 와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시골길을 한참 달려서 도착을 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크게 잘 지어진 비지터센터며 다른 모든 시설이 아주 깔끔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그는 1896년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았고, 사후 1940년 우표에 등장하고, 1942년 이름을 딴 수송선이 건조되고, 1946년 동전에 얼굴이 새겨졌으며, 출생 100주년이던 1956년에 여기 태어난 곳이 부커T워싱턴 내셔널모뉴먼트(Booker T. Washington National Monument)로 지정이 되었는데, 흑인으로서는 모두 최초의 기록이라 한다. 또한 우리가 다 아는 1935년작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그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한국의 농민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
국립 공원에서는 월급 받는 레인저보다 자원봉사자들이 수다가 많은데, 저 여성분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아시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남부 버지니아 시골에 위치한, 옛날 흑인노예가 태어난 장소를 불쑥 혼자 찾아온 동양인이 신기할 법도...ㅎㅎ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끊고는 안내영화가 있냐고 물었더니,
위기주부만을 위해서 직접 영화를 틀어주셨다. 다 보고 궁금한 점은 나와서 또 물어보라는 말씀과 함께~ 그 제목이 <Measure of a Man>이라서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 지를 좀 찾아봤더니,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 사람의 척도'라는 뜻으로 엘튼존의 노래, 시드니포이티어 자서전, 프랑스 영화 등의 제목이기도 한 굉장히 심오한 말인 듯 하다.
처음 입구 사진의 배너에도 씌여진 "Born Here, Freed Here"라는 말처럼, 그는 여기서 노예로 태어나 9살이던 1865년에 남북전쟁이 끝나며 자유인이 되었다. 그 후 새아버지와 가족은 웨스트버지니아 몰든(Malden)으로 이주하고, 그는 10살부터 염전과 광산에서 일을 하며 스스로 읽는 법을 깨우친다. (친아버지는 소유주였던 백인으로 추정된다고 함)
영화에도 나오는 장면으로, 연방군 장교가 마을에 와서 노예해방으로 이 시간부터 모든 흑인은 자유인이라는 성명을 낭독하는 모습의 조각이다. (다음 편에 소개할 첫번째 방문지가 바로 그 남북전쟁이 끝난 장소) 시간이 빠듯했지만 그래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담배농장은 한 번 둘러봐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야간학교를 다니며 배움의 열정은 점점 커져만 갔고, 버지니아 햄튼(Hampton)에 흑인들을 위한 고등교육 학교가 있다는 말만 듣고, 15살에 혼자 집을 떠나서 햄튼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모른채 동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그렇게 500마일(800 km)을 마차를 얻어타거나 걸어서 Hampton Normal and Agricultural Institute에 도착했지만, 최소한의 학비를 낼 돈도 없었기 때문에 학교 청소일을 하며 3년만에 우등으로 졸업한다. (햄튼을 방문했던 여행기는 여기를 클릭) 사진 정면에 보이는 통나무집이 복원한 이 농장의 부엌 건물인데,
흙바닥의 여기서 그가 태어나고, 9살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모습이 영화에 나왔었다. 계속해서 그는 1875년에 웨스트버지니아로 돌아가 자신이 다녔던 야간학교에서 3년간 선생을 한 후, DC의 신학대에 입학하지만 1년만에 그만두고, 다시 햄튼의 모교로 돌아가서 강사와 사감을 맡아서 2년을 더 보내게 된다.
옆에 있던 다른 작은 통나무집은 당시의 창고 모습으로 복원을 해놓았다. 그러다가 햄튼 학교의 설립자였던 Samuel Armstrong이 당시 흑인들의 환경이 훨씬 더 열악했던 앨라배마(Alabama) 주에도 유사한 교육기관을 세우기로 하고, 그 책임자로 25살의 부커를 보낸 마을의 이름이 바로 '터스키기(Tuskegee)'였다.
농장에서 가장 큰 왼쪽 건물은 마굿간(horse barn)이었다고 하는데, 말은 볼 수가 없었고 대신에...
닭장에 커다란 닭들은 몇 마리가 있었다. (닭 키우는 연방 공무원 이야기를 보시려면 클릭) 1881년 독립기념일에 터스키기 보통학교(Tuskegee Normal School)가 개교하지만 땅도, 건물도, 선생님도, 돈도 없고 오직 부커와 30명의 학생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마를 만들어 벽돌을 직접 구워서 건물을 지으며 첫 해를 보냈지만, 1888년에는 400명의 학생과 여러 건물을 가진 터스키기 기술학교(Tuskegee Institute)로 발전하는데, 흑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술 교육과 함께 백인 사회에 동화될 수 있는 청결과 매너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교육자인 동시에 흑인 문학가로도 인정을 받는데, 자서전 "노예의 굴레를 벗고(Up From Slavery)"는 지금도 읽히며, 1895년 애틀란타에서 열린 목화 박람회에서의 명연설은 그를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이를 이용해 그는 의회와 대통령에게 흑인 정책에 대한 자문을 하고, 북부의 산업가들이 남부 흑인학교를 지원하도록 해서, 20세기 초까지 터스키기 졸업생들이 미국 남부 전역에 흑인 공립학교 5,000개를 설립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던 부커는 1915년 59세의 나이에 뉴욕에서 갑자기 쓰러져 터스키기의 자택에 실려와 숨을 거두고, 자신이 계속 교장을 맡았던 기술학교의 예배당 옆에 묻혔다. 지금은 터스키기 대학교가 된 캠퍼스에 남아있는 그의 묘지와 기념비, 자택과 박물관 등 초기 건물들은 1974년에 국립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이 되었는데, 미국의 수 많은 대학들 중에 캠퍼스 일부가 국립 공원으로 관리되는 유일한 경우라 한다.
또 그의 사후 일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흑인 전투기 조종사들을 일컫는 '터스키기 에어맨(Tuskegee Airmen)'들이 훈련을 받았던 학교 바로 옆의 비행장도 1998년에 별도의 국립사적지가 된다. 1939년 흑백분리 시절에 흑인들만을 위한 조종사 훈련시설이 거기 만들어진 이유도 터스키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군대의 극심한 차별을 극복한 흑인 조종사들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위기주부가 터스키기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 것도 그 때문으로 생각이 된다.
준국립공원을 나가면서 오두막이 함께 그려진 입구 표지판을 찍어봤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aliaferro Washington)은 당시 흑백평등의 즉각 실현은 불가하므로 교육을 통해서 흑인들의 경제적 자립과 사회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백인 우월체재를 받아들이는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흑인 교육자인 동시에 지도자이다. 그래서 나중에 급진적인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그의 태도를 백인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소설 속 '톰 아저씨'같다며 엉클토미즘(Uncle Tomism)이라 비판하게 된다. 그의 사후 100년이 조금 못미쳐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지만, 과연 누구의 생각이 옳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현재진행중인 듯하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작년 7월부터 딸이 맨하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로 거의 매달 뉴욕시를 찾았었지만, 이번에는 정확히 무려 3개월만의 방문이었다. 대신에 그 전에는 대부분이 당일치기였다면,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 숙박을 해서, 동부로 이사온 후부터 계속 가보고 싶었던 정원도 다음날 구경을 하고 다른 역사공원 한 곳도 잠시 들렀다. 또 첫날 맨하탄에서 잠시 위기주부 혼자 셀프 워킹투어를 하면서, 본 포스팅인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 뉴욕 번외편'도 찍는 등 오래간만에 여러모로 알찬 1박2일 여행이었다.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Sotto 13'이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의 일요일 점심은, 뉴욕으로 프로포즈 여행을 온 아칸소 주에 살고 있는 조카와 약혼녀를 함께 만나서 특별히 더욱 뜻깊었고, 또 이 날은 미국의 마더스데이(Mother's Day)이기도 했다.
그러나 식사만 마치고 우리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 조카 커플은 맨하탄 관광을 위해 첼시로 향했고, 지혜는 급한 업무로 일을 하러 아파트로 돌아가고, 아내는 마침 뉴욕에 와있는 LA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래서 위기주부는 혼자 로워맨하탄(Lower Manhattan) 지역의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근처 커피숍에 바래다 주고 6번가(6th Ave)를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작년 8월에 점심을 먹었던 초록색 Olio e Più 식당이 나왔다. 여기서 오른편 크리스토퍼 길(Christopher St)로 들어가면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 오바마 대통령이 지정한 준국립공원이 하나 나온다.
도로 가운데 좁고 긴 삼각형의 녹지에 성조기와 함께 무지개 깃발이 걸려있고, 그 오른편으로 이제 찾아가는 '술집'이 나온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스톤월인(Stonewall Inn)이란 가게 이름 네온사인이 양복을 입은 두 남자에 살짝 가렸는데, 1969년 6월 28일 새벽 1시경에 뉴욕경찰이 주류 판매허가 없이 술을 판다고 단속을 나왔던 게이바(gay bar)로, 사건 후 오랫동안 폐업했다가 2007년부터 다시 운영하고 있다. (주점과 별도의 오른쪽 하얀 문을 입구로 하는 비지터센터가 올해 6월말에 오픈 예정)
맞은 편 공원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뜬금없이... 남북전쟁과 인디언전쟁에서 활약한 5성 장군 필립 셰리든(Philip Sheridan)의 동상인데, 그래서 여기 교차로는 셰리든 광장(Sheridan Square)으로 불린다. (여기를 클릭해서 셰리든 원수를 소개했던 여행기를 보실 수 있음)
그 공원의 입구쪽으로 돌아가니까 마침내 스톤월 내셔널모뉴먼트(Stonewall National Monument)라는 간판을 찾을 수 있었다.
여러 안내판들 외에 기념물이라 할 만한 것은 약간 어설프게 조각한 것 같았던 두 커플의 하얀 동상이다. 이 곳이 준국립공원으로 지정되던 그 해에, 위기주부가 방문했던 준국립공원들 리스트를 정리하는 포스팅을 작성하면서, 지정에 논란이 많은 장소라는 언급을 했었지만...
실제 방문을 하고 포스팅을 쓰면서 나무위키의 '스톤월 항쟁(Stonewall Uprising)' 문서 등을 읽어보니까, 그 이듬해인 1970년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전세계에서 매년 6월에 열리는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가 시작된 장소로서 충분히 국가적으로 기념할만 한 곳이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수집하는 까만 줄의 브로셔를 구해야 하는데... 밖의 공원에는 비치된 것이 없어,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물어보니 아마 가게에 있을 거란다~ 그렇다고 저 까만 문을 열고 위기주부 혼자 안에 들어가기는 좀 거시기 해서... 그냥 생략하고 남쪽으로 워킹투어를 계속했다.
7번가(7th Ave)를 따라 제법 걸으니까, 맨하탄과 뉴저지를 연결하는 홀랜드 터널(Holland Tunnel)의 입구가 나왔다. 1927년에 개통되어 거의 백년이 다 되어가는데, 개통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 터널이었단다. (지나갈 때마다 물에 잠길까봐 조마조마^^) 그리고 뉴욕시에 처음 정착한 네덜란드 사람들을 기려서 이름을 붙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터널의 설계 책임자였다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급사한 Clifford Holland의 성을 딴 것이란다.
그 남쪽 지역은 트리베카(Tribeca)라 불리는데 "Triangle Below Canal street"라는 뜻으로, 소방차 한 대 겨우 들어갈 것 같은 저 소방서 건물을 보러왔다. 어디서 보신 듯한 저 건물의 힌트는 빨간 차고문 위에 매달린 하얀 간판인데,
바로 1984년 <고스트버스터즈> Ghostbusters 영화에서 유령잡는 회사의 본부로 나왔던 건물로, 영화에서는 폐소방서라고 하지만 지금도 실제 소방서로 이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을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 젱가타워(Jenga Tower)인데 높이 250 m의 57층 콘도 빌딩으로 2017년에 완공되었다. 이제 워킹투어는 맨하탄을 동쪽으로 가로질러야 해서, 이왕 여기까지 온거 저 건물 바로 밑으로 지나가 보기로 했다.
거기에는 시카고의 클라우드게이트(Cloud Gate), 소위 "콩(The Bean)"과 비슷한 둥근 스테인레스 덩어리를 볼 수 있는데, 역시 시카고의 콩을 만든 인도계 영국인 Anish Kapoor 작품이라고 한다.
길 건너서 광각으로 찍어보면, 이렇게 젱가의 제일 아래쪽 모퉁이를 은색 조약돌로 받쳐놓은 것 같이 보였다. 또 이 건물은 2022년 게임스탑 주식과 함께 급등락을 하다가 파산했던 Bed Bath & Beyond 회사의 CFO가 18층 자택 발코니에서 투신자살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두번째 준국립공원은 사진 가운데 보이는 브로드웨이(Broadway) 대로변의 연방정부 건물 안에 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1990년대에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저 빌딩을 짓기 위해 땅을 파는 과정에서 400여구의 매장된 시신이 새로 발견되었다. 건물 왼편 뒤로 꼭대기가 살짝 보이는 뉴욕시청을 포함해 이 지역은 18세기말까지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만을 위한 묘지로 사용되어 15,000개 정도의 무덤이 있었지만, 19세기에는 아무런 보호도 없이 갈아엎고 건물들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사를 중단하고 지역을 모두 발굴해서 유해와 유물들을 수습한 후에, 건물 내부에 이 장소의 역사를 소개하는 비지터센터와 함께 외부에 별도의 추모공간을 만들어서 2006년에 흑인매장지 준국립공원(African Burial Ground National Monument)으로 지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일요일에는 연방 공무원들이 일을 안하기 때문에 비지터센터도 문을 닫는다는 사실... 흑흑~
비지터센터를 통과해서 나오게 된다는 메모리얼 광장도 못 들어가게 막아 놓았다.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오른쪽 잔디밭으로 여러 개의 봉분들이 있는데, 발굴된 유해들의 분석을 마친 후에 아프리카 전통의 이장 의식을 행해서 다시 단체로 여기 매장을 했다고 한다.
그런 역사도 있는 맨하탄의 지금 모습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듯 해서...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노란 신호등과, 대피용 외부 계단이 붙어있는 붉은 벽돌 건물의 모습을 찍어 봤는데,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은 19세기 이후 맨하탄에서 살았던 평범한 소시민들의 모습을 보존하고 전시한 곳이다.
철조망 사이로 핸폰 렌즈를 넣고 찍은 사진인데, 허름한 '공동주택(tenement)'의 반지하에서 여러 사람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연말에 방문했던 맨하탄 차이나타운(Chinatown)과 가까이 있는 이 건물은, 전세계에서 뉴욕으로 온 이민자 가족들이 힘들게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너무 낡아서 수리도 못하고 50년 가까이 비워졌던 아파트를 통째로 1988년에 박물관으로 만든 것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거주박물관(Tenement Museum)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National Historic Site로, 국립공원청의 협력을 받는 연계 장소(affiliated unit)에 포함된다. 1층 비지터센터의 유리벽에 여기에서 살았던 이민자 가족들의 흑백사진이 차례로 붙어있는데, 뮤지엄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공원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가 있다.
곧 유료투어가 시작된다는 방송에 사람들이 싹 이동해서 썰렁해 보이는 것이고,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어찌보면 앞서 위기주부말고는 일부러 찾는 사람이 없던 두 곳의 준국립공원들보다도 훨씬 '장사'가 잘 되는 역사유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쪽에 이 곳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화를 공짜로 틀어줘서, 이게 왠 떡이냐 하며 워킹투어로 지친 발걸음을 쉬며 감상하려고 했는데, 아내로부터 친구와 헤어지고 이제 지혜 아파트로 돌아간다는 카톡이 와서 앉자마자 일어서여 했다... 이렇게 워킹투어를 정리해보니 1993년에 출간된 소설가 황석영의 방북기 제목인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떠오른다. 인권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성소수자들, 노예로 잡혀와 죽은 흑인들, 그리고 전세계에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뉴욕으로 왔던 이민자들까지, 여기 맨하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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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부터 딸이 맨하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로 거의 매달 뉴욕시를 찾았었지만, 이번에는 정확히 무려 3개월만의 방문이었다. 대신에 그 전에는 대부분이 당일치기였다면,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 숙박을 해서, 동부로 이사온 후부터 계속 가보고 싶었던 정원도 다음날 구경을 하고 다른 역사공원 한 곳도 잠시 들렀다. 또 첫날 맨하탄에서 잠시 위기주부 혼자 셀프 워킹투어를 하면서, 본 포스팅인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 뉴욕 번외편'도 찍는 등 오래간만에 여러모로 알찬 1박2일 여행이었다.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Sotto 13'이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의 일요일 점심은, 뉴욕으로 프로포즈 여행을 온 아칸소 주에 살고 있는 조카와 약혼녀를 함께 만나서 특별히 더욱 뜻깊었고, 또 이 날은 미국의 마더스데이(Mother's Day)이기도 했다.
그러나 식사만 마치고 우리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 조카 커플은 맨하탄 관광을 위해 첼시로 향했고, 지혜는 급한 업무로 일을 하러 아파트로 돌아가고, 아내는 마침 뉴욕에 와있는 LA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래서 위기주부는 혼자 로워맨하탄(Lower Manhattan) 지역의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근처 커피숍에 바래다 주고 6번가(6th Ave)를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작년 8월에 점심을 먹었던 초록색 Olio e Più 식당이 나왔다. 여기서 오른편 크리스토퍼 길(Christopher St)로 들어가면 비교적 최근인 2016년에 오바마 대통령이 지정한 준국립공원이 하나 나온다.
도로 가운데 좁고 긴 삼각형의 녹지에 성조기와 함께 무지개 깃발이 걸려있고, 그 오른편으로 이제 찾아가는 '술집'이 나온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스톤월인(Stonewall Inn)이란 가게 이름 네온사인이 양복을 입은 두 남자에 살짝 가렸는데, 1969년 6월 28일 새벽 1시경에 뉴욕경찰이 주류 판매허가 없이 술을 판다고 단속을 나왔던 게이바(gay bar)로, 사건 후 오랫동안 폐업했다가 2007년부터 다시 운영하고 있다. (주점과 별도의 오른쪽 하얀 문을 입구로 하는 비지터센터가 올해 6월말에 오픈 예정)
맞은 편 공원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뜬금없이... 남북전쟁과 인디언전쟁에서 활약한 5성 장군 필립 셰리든(Philip Sheridan)의 동상인데, 그래서 여기 교차로는 셰리든 광장(Sheridan Square)으로 불린다. (여기를 클릭해서 셰리든 원수를 소개했던 여행기를 보실 수 있음)
그 공원의 입구쪽으로 돌아가니까 마침내 스톤월 내셔널모뉴먼트(Stonewall National Monument)라는 간판을 찾을 수 있었다.
여러 안내판들 외에 기념물이라 할 만한 것은 약간 어설프게 조각한 것 같았던 두 커플의 하얀 동상이다. 이 곳이 준국립공원으로 지정되던 그 해에, 위기주부가 방문했던 준국립공원들 리스트를 정리하는 포스팅을 작성하면서, 지정에 논란이 많은 장소라는 언급을 했었지만...
실제 방문을 하고 포스팅을 쓰면서 나무위키의 '스톤월 항쟁(Stonewall Uprising)' 문서 등을 읽어보니까, 그 이듬해인 1970년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전세계에서 매년 6월에 열리는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가 시작된 장소로서 충분히 국가적으로 기념할만 한 곳이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수집하는 까만 줄의 브로셔를 구해야 하는데... 밖의 공원에는 비치된 것이 없어,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물어보니 아마 가게에 있을 거란다~ 그렇다고 저 까만 문을 열고 위기주부 혼자 안에 들어가기는 좀 거시기 해서... 그냥 생략하고 남쪽으로 워킹투어를 계속했다.
7번가(7th Ave)를 따라 제법 걸으니까, 맨하탄과 뉴저지를 연결하는 홀랜드 터널(Holland Tunnel)의 입구가 나왔다. 1927년에 개통되어 거의 백년이 다 되어가는데, 개통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 터널이었단다. (지나갈 때마다 물에 잠길까봐 조마조마^^) 그리고 뉴욕시에 처음 정착한 네덜란드 사람들을 기려서 이름을 붙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터널의 설계 책임자였다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급사한 Clifford Holland의 성을 딴 것이란다.
그 남쪽 지역은 트리베카(Tribeca)라 불리는데 "Triangle Below Canal street"라는 뜻으로, 소방차 한 대 겨우 들어갈 것 같은 저 소방서 건물을 보러왔다. 어디서 보신 듯한 저 건물의 힌트는 빨간 차고문 위에 매달린 하얀 간판인데,
바로 1984년 <고스트버스터즈> Ghostbusters 영화에서 유령잡는 회사의 본부로 나왔던 건물로, 영화에서는 폐소방서라고 하지만 지금도 실제 소방서로 이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을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 젱가타워(Jenga Tower)인데 높이 250 m의 57층 콘도 빌딩으로 2017년에 완공되었다. 이제 워킹투어는 맨하탄을 동쪽으로 가로질러야 해서, 이왕 여기까지 온거 저 건물 바로 밑으로 지나가 보기로 했다.
거기에는 시카고의 클라우드게이트(Cloud Gate), 소위 "콩(The Bean)"과 비슷한 둥근 스테인레스 덩어리를 볼 수 있는데, 역시 시카고의 콩을 만든 인도계 영국인 Anish Kapoor 작품이라고 한다.
길 건너서 광각으로 찍어보면, 이렇게 젱가의 제일 아래쪽 모퉁이를 은색 조약돌로 받쳐놓은 것 같이 보였다. 또 이 건물은 2022년 게임스탑 주식과 함께 급등락을 하다가 파산했던 Bed Bath & Beyond 회사의 CFO가 18층 자택 발코니에서 투신자살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두번째 준국립공원은 사진 가운데 보이는 브로드웨이(Broadway) 대로변의 연방정부 건물 안에 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1990년대에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저 빌딩을 짓기 위해 땅을 파는 과정에서 400여구의 매장된 시신이 새로 발견되었다. 건물 왼편 뒤로 꼭대기가 살짝 보이는 뉴욕시청을 포함해 이 지역은 18세기말까지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만을 위한 묘지로 사용되어 15,000개 정도의 무덤이 있었지만, 19세기에는 아무런 보호도 없이 갈아엎고 건물들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사를 중단하고 지역을 모두 발굴해서 유해와 유물들을 수습한 후에, 건물 내부에 이 장소의 역사를 소개하는 비지터센터와 함께 외부에 별도의 추모공간을 만들어서 2006년에 흑인매장지 준국립공원(African Burial Ground National Monument)으로 지정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일요일에는 연방 공무원들이 일을 안하기 때문에 비지터센터도 문을 닫는다는 사실... 흑흑~
비지터센터를 통과해서 나오게 된다는 메모리얼 광장도 못 들어가게 막아 놓았다.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오른쪽 잔디밭으로 여러 개의 봉분들이 있는데, 발굴된 유해들의 분석을 마친 후에 아프리카 전통의 이장 의식을 행해서 다시 단체로 여기 매장을 했다고 한다.
그런 역사도 있는 맨하탄의 지금 모습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듯 해서...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노란 신호등과, 대피용 외부 계단이 붙어있는 붉은 벽돌 건물의 모습을 찍어 봤는데,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은 19세기 이후 맨하탄에서 살았던 평범한 소시민들의 모습을 보존하고 전시한 곳이다.
철조망 사이로 핸폰 렌즈를 넣고 찍은 사진인데, 허름한 '공동주택(tenement)'의 반지하에서 여러 사람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연말에 방문했던 맨하탄 차이나타운(Chinatown)과 가까이 있는 이 건물은, 전세계에서 뉴욕으로 온 이민자 가족들이 힘들게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데, 너무 낡아서 수리도 못하고 50년 가까이 비워졌던 아파트를 통째로 1988년에 박물관으로 만든 것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거주박물관(Tenement Museum)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National Historic Site로, 국립공원청의 협력을 받는 연계 장소(affiliated unit)에 포함된다. 1층 비지터센터의 유리벽에 여기에서 살았던 이민자 가족들의 흑백사진이 차례로 붙어있는데, 뮤지엄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공원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가 있다.
곧 유료투어가 시작된다는 방송에 사람들이 싹 이동해서 썰렁해 보이는 것이고,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어찌보면 앞서 위기주부말고는 일부러 찾는 사람이 없던 두 곳의 준국립공원들보다도 훨씬 '장사'가 잘 되는 역사유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쪽에 이 곳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화를 공짜로 틀어줘서, 이게 왠 떡이냐 하며 워킹투어로 지친 발걸음을 쉬며 감상하려고 했는데, 아내로부터 친구와 헤어지고 이제 지혜 아파트로 돌아간다는 카톡이 와서 앉자마자 일어서여 했다... 이렇게 워킹투어를 정리해보니 1993년에 출간된 소설가 황석영의 방북기 제목인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떠오른다. 인권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성소수자들, 노예로 잡혀와 죽은 흑인들, 그리고 전세계에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뉴욕으로 왔던 이민자들까지, 여기 맨하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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