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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posts연합교양대학 대전의 재발견, 김호연재의 삶과 문학
목련꽃이 피어날 때 쯤이면 대전평생교육진흥원에서도 꿈꽃이 피어난답니다. 연합교양대학을 통하여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꿀 수 있는 강의가 이루어집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주는 인문학의 향기와 대전지역을 알아가는 대전의 재발견 두 과목을 개설하는 연합교양대학은 대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열려있는 열린강좌입니다. 과목별로 280명을 모집하여 15주간 수업이 진행됩니다. 단순하게 시험을 위한 수업이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미래를 꿈꾸어 보는 봄꽃과 함께 찾오는 행복한 강의입니다. pass 아니면 fail 과목으로 시험 대신 워크북을 제출하고 조별과제를 수행하는 등 포인트 가감제로 평가하며 학점교류제도를 통하여 참여하는 대학생들에게 과목당 2학점을 줍니다. 연합교양대학은 2012년부터 현재까지 약 8,500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이 참여했습니다. 대전시에 있는 대학생이면 한 쯤 들어보면 좋을 것 같지요? 3월 27일에는 '여성문인 김호연재의 삶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문학박사 문희순 선생님이 대전의 재발결 과목을 강의했습니다. 김호연재의 삶과 문학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 날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문희순 박사는 충남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에서 지역문화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과 문학을 연구과제로 공부하고 있는데요. SKY대학생들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지역문화연구이므로 지역만이 가진 특색을 연구하면 직업을 창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심어줬습니다. 강의를 위해 서울에서 무용단이 내려왔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멋진 공연을 펼쳐 주었습니다. 문희순 박사는 '나는 누구인가? 김호연재의 꿈과 좌절'을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대전의 여성을 꼽으라고 하면 김호연재를 꼽을 수 있는데요. 김호연재는 대전의 시인으로, 신사임당과 어깨를 나란히 한 조선의 여류시인입니다. 김호연재는 충남 홍성 길산의 한적한 어촌이었던 오두리에서 고성군수를 지낸 아버지 김성달과 어머니 이옥재 사이에서 5남 4녀의 여덟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온 가족이 시를 썼던 문학 가정으로, 부모님은 부부시집인 안동세고를 남겼습니다. 김호연재의 친정 가문과 시댁 가문은 선대부터 밀접하게 교류했습니다. 김호연재는 은진 송씨 집안의 소대헌과 19세에 결혼했습니다. 대전의 동쪽 해돋이가 시작되는 곳인 대전 대덕구 법천에서 혼인생활을 시작한 호연재는 글쓰기를 통해 언제나 당당하고 의연하게 삶을 살았는데요. 그녀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줍니다. 김호연재는 30여명이 넘는 노비와 가족들을 거느리며 홀로 살림살이를 했습니다. 종가를 경영해야했던 그녀는 시를 통하여 젊은 여성으로서의 시름을 이겨냈던 것 같습니다. 아까워라, 이 내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 겉과 속 숨김없으니 밝은 달이 흉금을 비추도다. 맑고 맑음은 흐르는 물과 같고 깨끗하고 깨끗함은 흰 구름 같아라. 화려한 사물 즐겨하지 않고 뜻은 구름과 물의 자취에 있도다. 속된 무리와 하나 되지 못하니 도리어 세상 사람들 그르다 하네. 규방 여인의 몸 됨에 마음상한 것 창천은 가히 알지 못하리라. 아, 할 수 있는 일 그 무엇이랴! 다만 각각의 뜻 지킬 뿐이지. 호연지기의 실현을 꿈꾼 여성군자 호연재의 '자상'이라는 시입니다. 넓고 광대한 군자의 기상을 지녔던 호연재였지만 자신의 역량과 욕망을 펼칠 사회적 여건이 아닌 시대적 상황을 아파하면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자신의 운명 앞에 통곡을 하였으나 그녀의 정신 세계는 높고 고결했습니다. 열심히 할 뿐…. 아무생각 않고 할 뿐…. 어느 날 떨어지는 물방울에 바위가 깨질 수도 있듯이 무언가를 꾸준히 하다보면 인생의 목표를 찾고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강의였습니다. 대전시민대학교 연합교양대학은 5월 말까지 계속 됩니다. 관심을 가지고 도전해 보세요!
대전옛건축여행 동춘당(同春堂) 공원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요
동춘당 공원 (대덕구 송촌동) 2019년 새해 타종식을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입춘(2월 4일)도 지나고 우수(2월 19일)도 지났어요. 이제 며칠 후 경칩(3월 6일)이 지나면 그야말로 봄인데요. 우수 겸 정월 대보름을 지난 동춘당 공원을,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책을 했습니다. 동춘당 공원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송준길(1606-1672)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 이름에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동춘당 송준길선생은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는데요. 모든 관직을 물러난 후 거처하던 종택과 더불어, 늘 봄과 같다는 뜻인 선생의 호 동춘당(同春堂)을 따서 지은 별당 건물입니다. 동춘당은 1963년에 보물 제 209호로 지정될 정도로 건축학적 의미가 크다고 해요. 보물 제209호 회덕동춘당 동춘당은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유형을 잘 보여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는 앞면 3칸·옆면 2칸 총 6칸인데요.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 왼쪽 2칸은 온돌방입니다. 대청의 앞면·오른쪽·뒷면 등 3면에 쪽마루를 냈고, 들어서 여는 열개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이 모두 열리는데요.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 문을 열어놓지 않았네요. 여름에는 열개문이 모두 열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돼 있는데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활용해 무대가 있는 정자 같은 느낌을 줍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건물 전체를 4각형의 키가 높은 돌로 받쳐놓은 것인데요. 이런 양식은 조선 후기의 주택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건물 전체를 돌로 맏쳐놓아 대청 아래 공간이 높은 동춘당 동춘당이라고 쓰인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라고 합니다. 동춘당 뒤쪽으로는 종택이 있어요. 이곳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서, 지난 2016년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289호로도 지정됐습니다. 동춘당 왼쪽 담장을 끼고 진입로를 지나 대문을 들어서면 一자 모양의 사랑채와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고요. 그 오른쪽에는 사당인 가묘와 별묘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춘당 종택에 대한 안내판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아직도 동춘당에 대한 불천위 제사와 기타 졔례가 행해진다고 합니다. 또 건축학적으로는, 사랑채와 안채, 부엌, 마루 등이 한 채에 달려 있는 양통집이라고 합니다. 동춘당 종택 대문 사랑채는 앞면 6칸·옆면 6칸입니다. 부엌 위는 다락으로 꾸몄고, 앞에는 1칸 살림집을 달았는데, 여기에서는 집안의 여러가지 일을 맡아보던 청지기가 살았다고 합니다. 또 대청마루와 큰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가, 작은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보다 2배 정도 높은 누마루가 있고요. 그 아래로는 아궁이가 있습니다. 참 독특한 구조이지요. ㅡ자 모양의 동춘당 종택 사랑채 안채에는 현재 송준길선생의 후손이 살고 있어요. 동춘당가의 가양주로 오래 내려오고 있는 '국화주'가 대전무형문화재 제9-나호로 지정돼 있는데요. 이 곳에서 살고 있는 동춘당의 13대 종부 김정순 보유자가 아드님, 따님과 함께 보존 전승을 하고 있습니다.이곳에서는 동춘당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음식과 국화주 등을 테마로 하는 여러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어요. '동춘당가 500년 여름 생신상' 행사가 대표적이죠. 동춘당 종택 별묘(왼쪽)와 가묘(오른쪽) 동춘당과 종택의 오른쪽 뒤로는 또 하나 전통 가옥이 보입니다. 건물 앞에는 빗과 비녀 모양의 조형물과 함께 소나무 아래로 시비가 있습니다. 바로 호연재 김씨의 시비입니다. 이곳에 소대헌·호연재 고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짓고 살기 시작해서,송병하의 아들 소대헌 송요화가 1714년 이곳으로 이전해 지었습니다. 그 이후 현재 11대손 까지 살아오고 있는 집으로, 송요화의 부인인 호연재 김씨는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많은 시를 남겼습니다. 조선시대 여류 문장가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꼽지만, 호연재는 이들을 뛰어넘을 만큼의 문재를 보여 134 수의 한시를 남김으로써, 여류문학사의 공백을 메꾸어 줄만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소대헌·호연재 고택이라고 합니다. 안채와 큰사랑채(소대헌)·작은사랑채(오숙재), 가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대헌 호연재 고택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사랑채인 소대헌이 있고 오른쪽에 작은사랑채인 오숙재가 있습니다.큰 사랑채 소대헌 한 집안에 이렇게 사랑채가 두개나 있는데, 이런 양식은 충청지역에서는 아주 드물다고 해요. 사랑채의 처마가 좀 길면서도 전체적으로 그 모양이 아주 단아합니다.작은사랑채 오숙재 ㄱ자 모양의 안채는 작은사랑채의 왼쪽에 나있는 중문을 지나서 출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호연재 김씨가 기거하면서, 여성이라서 펼치지 못한 꿈에 대한 울분을 삭히면서 시를 지었을 안채. 지금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이곳에 호연재 김씨가 지은 시가 모두 보관돼 있다고 합니다.소대헌 호연재 고택의 안채 안채 뒤로는 약간 높은 위치에 가묘가 있어요. 宋氏家廟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소대헌 호연재 고택 앞에는 자그마한 바위에 '금암(琴巖)'이라고 암각이 선명히 남아 있는데요, 금암 송몽인이 여기에 걸터앉아 거문고를 탔다고 합니다. 참 운치가 있지요? 또 동춘당 공원 한가운데는 '송씨 3세 효자정려 구허비'가 세워져 있는데요. 뜬금없이 비석이 이곳에 서있는 이유가 있어요. 원래의 효자 정려는 1861년에 후손들이 이사하면서 정문이 대화동으로 옮겨 가게 되자, 이곳에 그 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라고 하는데요. 송씨삼세 효자는 선교랑 송경창과 그의 손자인 지평 송시승, 그리고 시승의 아들인 도사 송유관을 지칭한 것이라고 해요. 이들은 모두 쌍청당 송유의 후손이며 3세가 모두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고요. 그 사적이 국가가 반포한 '삼강행실록'에 기록되었다고 설명이 돼 있네요. 조선시대에는 효행을 굉장히 중요시 한 것 같아요. 동춘당 공원에 세우진 이정표를 보니,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시직 공정려각, 송애당, 은진송씨 정려각이 있네요. 조만간 이곳들도 둘러볼 생각입니다. 이처럼 동춘당 공원은 동춘당과 동춘당 종택, 소대헌 호연재 고택 등을 통해 조선시대 양반가의 집이 어떻게 건축되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대덕구에서 조성한 '200리 로하스길' 중 약 5km 구간에 이르는 '동춘당 생애길' 중에 속해 있는 동춘당공원에서, 2019년 새봄을 맞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2019 대전광역시 소셜미디어기자 조강숙
2018 청년선비포럼 여성문인 김호연재와 신사임당의 생애와 작품을 돌아보다
2018 청년선비포럼 가 9월 14일 오후 2시 '선비를 키워낸 요람! 여성선비'를 주제로 충남대학교 인문대학교 문원강당에서 열렸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국학진흥원 주관하고 충남대학교 기초교양원이 후원하는 행사입니다. 강연을 듣고자하는 내빈과 학생들로 행사장이 꽉 찼네요. 인사말과 내빈소개에 이어 오프닝 공연으로 김재락 시창 퓨전 국악 공연이 있었습니다. 1부 강연에서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병주 교수가 '조선의 여성 선비, 신사임당'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습니다. 이 자리에서 신병주 교수는 신사임당, 매창(신사임당의 딸), 황진이, 허난설헌(허균의 누이), 송덕봉(‘마암일기’의 저자 유희춘의 부인), 호연재 안동 김씨(동춘당 송준길의 증손), 의유당 의령 남씨(‘동명일기’ 저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조선의 여성 선비로는 독립운동가 남지현(1872~19330, 윤희순(1860~1935), 박지혜(1895~1943) 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난 신사임당(1504~1551)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효녀, 어머니, 아내, 예술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신사임당의 생애를 살펴봤습니다.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연만은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 정가에는 외로이 뜬 갈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모이락 고깃배들 바다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사암당의 호는 ‘사임’이며, 예술가로서 산수도, 목포도도, 초충도수병 8폭 병풍, 초서 병풍, 초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오죽헌과 몽룡실, 묘소 등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곧이어 문희순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이 '나는 누구인가? 김호연재의 꿈과 좌절'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습니다. 아까워라, 이내 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 겉과 속 숨김없으니 밝은 달이 흉금을 비추도다. 맑고 맑음을 흐르는 물과 같고 깨끗하고 깨끗함은 흰 구름 같아라. 화려한 사물 즐겨하지 않고 뜻은 구름과 물의 자취에 있도다. 속된 무리와 하나 되지 못하니 도리어 세상 사람들 그르다 하네. 스스로 규방 여인의 몸 된 것 슬퍼하노니 창천은 가히 알지 못하리라. 아, 할 수 있는 일 그 무엇이랴! 다만 각각의 뜻 지킬 뿐이지. 김호연재는 가족시집인 ‘안동세고’(부부시집,249수)와 ‘연주록’(자녀9인과 서모, 172수)를 남겼죠. 김호연재는 신문집 ‘자경편’을 쓰기도 했습니다. 자경편은 한시 작품에서 다 말 할 수 없는 정심, 부부, 효친, 자수, 신언, 계투의 문제를 산문으로 개진한 작품입니다. 김호연재는 ‘자경편’에서 음양, 남녀, 성현의 유풍 등 유교적 함의를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는데요. 후대 여성 성리학자들의 출현과 발전에 크게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김호연재는 가난과 근심, 궁통과 영육, 질병과 죽음 앞에서도 온 마음과 몸으로 성현의 도를 실천하고자 하였던 조선의 참 선비요 군자였습니다. 두번째는 청년들의 발표시간이었는데요. 이주연 충남대학교 학생이 '김호연재의 한시를 통해 본 자아인식'을 주제로 발표했는데요. 김호연재는 부친 김성달 (1642~1696)과 모친 이옥재(1643~1696전후)에서 태어나 9세까지는 서울 북촌에서 지냈으며, 15세 까지는 해곡(갈뫼로 추정), 42세까지는 회덕에서 지냈습니다. 이주연 학생은 김호연재의 생애를 돌아보며 시의 문학사적 의의를 발표했습니다. 이병관 충남대학교 학생은 '김호연재의 여성관 고찰과 그 영향’을 주제로 발표했는데요. ‘김호연재는 누구인가?’, ‘김호연재의 여성관’, ‘김호연재 사상의 영향’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홍 윤 경북대학교 졸업생은 '김호연재 수양론'을 주제로 발표했는데요. 전통사회 속 여성의 한계 속에서도 여성에게도 수양이 필요하다며 김호연재가 제시한 수양론의 방향, 오상론 바탕의 수양론을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은두기 안동대학교 학생은 '김호연재, 능동적 여성의 길을 걷다'을 주제로 김호연재의 외로운 삶을 이야기하며 김호연재 삶을 돌아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