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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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볼드 뷰티풀> - 주저하는 이들을 위한 카운슬링 네비게이션

<빅 볼드 뷰티풀> - 주저하는 이들을 위한 카운슬링 네비게이션

(2025/10/30 : 메가박스 송파 파크하비오) '코고나다' 감독의 은 일테면 주인공들의 경로를 이리저리 지시해 주는 극중 내비게이터와 같은 일종의 신식 문명이 몇 등장한다는 점에서 근 미래를 배경으로 삼았던 연출자의 전작 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장편 데뷔작인 와 유사한 구성의 작품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족쇄처럼 가족이 발목에 매달려 있고 그로 인해 감옥과도 같은 공간에 계류되어 있던 두 인물이 만들어낸 감정의 쌍곡선이 주요 소재였던 와 마찬가지로 이.......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 발견의 날인가, 침묵의 날인가

소인배(小人輩).com|2025년 5월 5일

시작은 한 항해에서 비롯되었다 1492년 10월 12일, 이탈리아의 항해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대서양을 건넌다. 목적지는 아시아였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들이었다. 이 항해는 오랜 세월 동안 "신대륙의 발견"이라 불리며, 세계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억되어 왔다. 그리고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다. 처음으로 미국 내에서 이 날을 기념한 것은 1792년, 콜럼버스의 항해 300주년을 맞은 해였다. 이후 이민자 집단, 특히 이탈리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콜럼버스를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상징으로 여겼고, 그를 기념하는 날을 전국적인 공휴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1937년,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콜럼버스 데이를 미국 연방 공휴일로 공식 제정하게 된다. 무엇을 기념하고자 했는가 콜럼버스 데이는 표면적으로는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도달을 기념하는 날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날은 탐험 정신, 용기, 대담한 도전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20세기 초반, 사회적 차별과 편견 속에서 미국에 정착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에게 콜럼버스는 자신들이 이 땅에 속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를 통해 “우리는 이 나라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 기념일은 곧 다문화 사회에서의 소속감과 자긍심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콜럼버스 데이는 단지 역사적 사건의 기념만이 아니라, 특정 커뮤니티의 문화적,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같은 날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날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는 표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오래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에는 수백 개의 원주민 부족과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묻기 시작했다. “이미 사람이 살고 있던 땅을 어떻게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더 큰 문제는,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원주민들에게 닥친 역사였다. 전염병, 강제 노동, 식민 지배, 폭력, 문화 말살… 콜럼버스와 그 뒤를 이은 유럽 제국주의는 원주민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남겼고, 이 날은 원주민 공동체에게 기념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을 상징하게 되었다. 논쟁의 중심에 선 기념일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결국 미국 사회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이들은 콜럼버스를 역사적 인물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의 행동과 그 이후의 결과를 감안할 때 그를 기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콜럼버스 데이는 그렇게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라, 기억과 해석의 충돌 지점이 된다. 이에 따라 많은 도시와 주에서는 콜럼버스 데이를 대체하거나 재정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점점 더 많은 곳에서 이 날을 ‘원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s’ Day)’로 바꾸기 시작했고,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흐름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두 이름이 공존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완전히 대체되기도 한다. 이 변화는 단지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누구의 고통을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오늘날의 콜럼버스 데이 현재 콜럼버스 데이는 미국 연방 정부의 공휴일로 유지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 날을 공식적으로 기념하지 않는 주와 도시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신 원주민의 문화와 역사, 정체성을 조명하는 행사들이 이 날을 채우고 있으며, 교육 현장에서도 콜럼버스를 보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가르치려는 노력이 늘고 있다. 한편으로, 이탈리아계 미국인 공동체는 여전히 콜럼버스를 자신들의 문화적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 기념일의 보존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과거의 인물과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에 대한 미국 사회의 깊은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시 말하는 용기 콜럼버스 데이에 대한 논쟁은 사실 특정 인물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역사를 다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과거를 단순히 미화할 수도,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오늘의 교훈으로 삼느냐에 있다. 콜럼버스 데이는 그래서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 불편함이 진실을 향한 첫걸음이 되기도 한다. 그 날의 진짜 의미는 어쩌면, 우리가 더 나은 기억의 방식을 찾기 위한 대화의 시작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디스커버리 데이 (Columbus Day) –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디스커버리 데이(Columbus Day)는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사건을 기념하는 미국의 공휴일입니다. 이 날은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에서 기념되고 있으며, 그 learningenglish.co.kr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 발견의 날인가, 침묵의 날인가

소인배(小人輩).com|2025년 5월 5일

시작은 한 항해에서 비롯되었다 1492년 10월 12일, 이탈리아의 항해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대서양을 건넌다. 목적지는 아시아였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들이었다. 이 항해는 오랜 세월 동안 "신대륙의 발견"이라 불리며, 세계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억되어 왔다. 그리고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다. 처음으로 미국 내에서 이 날을 기념한 것은 1792년, 콜럼버스의 항해 300주년을 맞은 해였다. 이후 이민자 집단, 특히 이탈리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콜럼버스를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상징으로 여겼고, 그를 기념하는 날을 전국적인 공휴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1937년,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콜럼버스 데이를 미국 연방 공휴일로 공식 제정하게 된다. 무엇을 기념하고자 했는가 콜럼버스 데이는 표면적으로는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도달을 기념하는 날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날은 탐험 정신, 용기, 대담한 도전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특히 20세기 초반, 사회적 차별과 편견 속에서 미국에 정착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에게 콜럼버스는 자신들이 이 땅에 속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를 통해 “우리는 이 나라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 기념일은 곧 다문화 사회에서의 소속감과 자긍심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콜럼버스 데이는 단지 역사적 사건의 기념만이 아니라, 특정 커뮤니티의 문화적,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같은 날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날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는 표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오래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에는 수백 개의 원주민 부족과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묻기 시작했다. “이미 사람이 살고 있던 땅을 어떻게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더 큰 문제는,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원주민들에게 닥친 역사였다. 전염병, 강제 노동, 식민 지배, 폭력, 문화 말살… 콜럼버스와 그 뒤를 이은 유럽 제국주의는 원주민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남겼고, 이 날은 원주민 공동체에게 기념이 아니라 비극의 시작을 상징하게 되었다. 논쟁의 중심에 선 기념일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결국 미국 사회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이들은 콜럼버스를 역사적 인물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의 행동과 그 이후의 결과를 감안할 때 그를 기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콜럼버스 데이는 그렇게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라, 기억과 해석의 충돌 지점이 된다. 이에 따라 많은 도시와 주에서는 콜럼버스 데이를 대체하거나 재정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점점 더 많은 곳에서 이 날을 ‘원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s’ Day)’로 바꾸기 시작했고,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흐름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두 이름이 공존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완전히 대체되기도 한다. 이 변화는 단지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누구의 고통을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오늘날의 콜럼버스 데이 현재 콜럼버스 데이는 미국 연방 정부의 공휴일로 유지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 날을 공식적으로 기념하지 않는 주와 도시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신 원주민의 문화와 역사, 정체성을 조명하는 행사들이 이 날을 채우고 있으며, 교육 현장에서도 콜럼버스를 보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가르치려는 노력이 늘고 있다. 한편으로, 이탈리아계 미국인 공동체는 여전히 콜럼버스를 자신들의 문화적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 기념일의 보존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과거의 인물과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에 대한 미국 사회의 깊은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역사를 다시 말하는 용기 콜럼버스 데이에 대한 논쟁은 사실 특정 인물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역사를 다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과거를 단순히 미화할 수도,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오늘의 교훈으로 삼느냐에 있다. 콜럼버스 데이는 그래서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 불편함이 진실을 향한 첫걸음이 되기도 한다. 그 날의 진짜 의미는 어쩌면, 우리가 더 나은 기억의 방식을 찾기 위한 대화의 시작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디스커버리 데이 (Columbus Day) –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디스커버리 데이(Columbus Day)는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사건을 기념하는 미국의 공휴일입니다. 이 날은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에서 기념되고 있으며, 그 learningenglish.co.kr

취임 4개월만에 암살당한 대통령의 집이었던 클리블랜드 외곽의 가필드(James A. Garfield) 국립사적지

취임 4개월만에 암살당한 대통령의 집이었던 클리블랜드 외곽의 가필드(James A. Garfield) 국립사적지

올해 트럼프가 제47대로 다시 취임하며 미국 역사상 두번째의 '징검다리 임기' 대통령이 되었다. 그 첫번째는 1885~1897년의 가운데 4년을 뺀 제22·24대를 역임한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였다. 비록 그는 뉴저지 출생에 뉴욕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되어 오하이오(Ohio) 주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1796년에 이리 호(Lake Erie) 연안을 탐험하다 쿠야호가 강(Cuyahoga River)이 호수로 흘러드는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을 처음 만들었던 모세스 클리블랜드(Moses Cleaveland) 장군의 먼 후손이다. 그 마을이 20세기 전반에 인구 1백만의 돈이 넘쳐나는 '철강도시' 클리블랜드(Cleveland)로 발전했지만, 중반 이후 오대호 지역의 제조업 쇠퇴와 함께 현재는 인구 40만명으로 쇠락한 대표적 '러스트 벨트' 도시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는 세계적 명성의 종합병원으로 다시 알려지며 '의료도시'로 탈바꿈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케스트라와 미술관이 유명하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대표적 관광지라지만, 위기주부는 그 모두를 제쳐두고 북동쪽의 멘토(Mentor)라는 위성도시로 향했다. 제임스 가필드 국립사적지(James A. Garfield National Historic Site)는 미국 제20대 대통령이 1880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4년전에 구입한 농장과 저택을 보존하기 위해 1980년에 지정되었다. 그는 남북전쟁 중인 1862년에 처음 하원에 당선되어 대선때가 18년째로,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현직 연방 하원의원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경우이다. 농장의 말과 마차를 보관하던 커다란 캐리지 하우스(Carriage House)를 개조한 비지터센터의 입구로, 계속 내리던 진눈깨비는 그쳤지만 꾸물꾸물한 날씨가 이제 소개할 그의 슬픈 죽음과 맞물려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입구를 장식하는 제임스 A.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대통령의 옆모습으로, 워싱턴DC 내셔널몰에 있는 그의 동상을 찾아봤던 여행기에서 이력을 짧게 소개한 것을 클릭해서 보실 수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힘들게 공부해서 윌리엄스 대학을 졸업하고 고대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를 거쳐 모교의 학장이 되었고, 변호사와 군장교를 거쳐 정치에 입문해 대통령까지 된 정말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마굿간을 개조해서 그런지 비지터센터 내부구조가 좀 특이했는데, 취임선서를 하는 모습의 하얀 동상이 있는 곳에서 오른편 안쪽으로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도서관(Presidential Library)이라면 그냥 특정 대통령의 기념관을 좀 우아하게(?) 부르는 표현으로 인식되지만, 여기는 그가 암살되고 4년후인 1885년에 계속 여기에 거주하던 미망인이 집의 일부를 그가 문학교수와 변호사로 일하며 소유했던 책들을 모아서 따로 공개하는 공간으로 만들었기에, 공식적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 도서관으로 인정되는 유적지이다. 인문학자답게 남북전쟁을 노예제에 대항하는 성전으로 인식해서, 스스로 의용군을 조직해서 북군에 합류해 서부전선의 최대 격전이었던 치카모가 전투(Battle of Chickamauga) 등에서 활약해 명성을 얻기도 했다. (다른 오하이오 출신의 미래 대통령이 두 명이나 참전했던 동부전선 버지니아 지역의 전투에 대한 포스팅을 보시려면 클릭) 다음으로 대통령 선거와 취임식 등을 보여주는데, 제일 왼쪽에 빨간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당시 선거운동원 모습이란다. 공화당 내 급진파였던 가필드는 선거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최대파벌의 지원을 받는 대신에 부통령 후보로 그쪽 계파 사람을 골랐고, 당선되면 상대 파벌에도 요직을 준다는 조건에 합의해야만 했다. 그 결과로 아주 근소한 차이로 대선에서 승리해서 1881년 3월에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대통령이 된 가필드는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엽관제가 만연한 당시의 부패한 공직사회를 일소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 파벌에 행정부 요직을 준다는 약속도 지킬 수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Charles J. Guiteau가 불과 취임 4개월만에 기차역에서 그의 등 뒤에 두 발의 총격을 가했다. 문제는 자신이 가필드 대통령 당선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믿었던 암살범은 정치판 주변을 기웃거리는 과대망상증 환자였고,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 자신은 사면될거라 주장했지만, 약 1년 후에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총알 하나가 몸에 박힌 상태로 가필드는 2개월 이상을 병석에 누워 있다가 패혈증이 겹치면서 결국 사망했는데, 안타깝게도 의사들이 무리하게 총알을 찾으려다가 병세가 오히려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단다. 마지막에는 병상에 누운 상태로 백악관을 떠나 기차를 타고 뉴저지 바닷가 휴양지로 향했다가 거기서 사망하는데, 당시 덜컹거리는 기차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철망으로 특수 제작되었던 매트리스 실물이란다. 이외에도 사망 후에 제작한 데드마스크와 손의 모형 등도 유리함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앞서 링크로 소개한 그의 동상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학자, 군인, 정치가로서 모두 역량을 보여준 훌륭한 인물이었기에, 만약 암살되지 않았다면 대통령으로 어떤 업적을 이루고 또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가, 짧은 안내영화를 보면서 계속 궁금했다~ 저택의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 이 날의 마지막 무료 가이드투어에 20분 정도 기다리면 참여가 가능했지만, 예약해 놓은 숙소까지 또 2시간을 더 운전해서 가야했기 때문에, 그냥 혼자 집 주위만 둘러보고는 떠나기로 했다. 가필드 사망 후에도 많은 확장과 시설 추가를 거친 후에, 자녀들에 의해서 1936년에 클리블랜드 역사학회에 기증되었다가, 국립사적지로 지정된 후에 대대적인 보수를 거치면서, 19세기 미국 대통령 유적지들 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복원되고 세부묘사가 뛰어난 실내로 여겨진단다. 본채 옆으로는 대선 때 선거운동 본부로 사용되었던 작은 별채인 캠페인오피스(Campaign Office)가 있어서,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짝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상당히 독특한 외관의 1895년에 추가된 풍차(Windmill)는 곡식을 빻는 용도가 아니라, 창문이 보이는 2~3층의 안에 있는 커다란 저수조의 물을 지하로 매설된 파이프를 통해 저택 꼭대기의 작은 물탱크로 보내는 역할을 했단다. 이외에 마굿간 옆으로는 지하 가스전에서 나오는 연료를 보관해서 집의 난방과 취사에 사용하기 위해 1885년에 설치된 가스홀더(Gasholder) 건물도 있었다. 이상으로 또 한 명의 미국 대통령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는 대각선으로 오하이오의 중심을 향하는 71번 고속도로를 따라 주도인 콜럼버스(Columbus)로 향했다. 시간이 있었으면 사진 가운데 빌딩의 뒤에 위치한 주청사라도 잠깐 구경하고 싶었지만, 도심으로 향하는 표지판이 나왔을 때는 사진보다 더 어두워진 저녁에 겨울비까지 내리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바로 외곽순환 270번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도시 북서쪽의 예약한 모텔로 향했다. 따로 저녁 먹을 곳을 찾기도 귀찮을 것 같아 미리 준비해간 즉석밥에 팝콘과 맥주를 후식으로 먹고는 바로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도 방에서 간단히 해결하고는 이미 블로그에 소개한 1시간 거리의 미공군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