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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10월 1일 |
그곳에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의 번호는 74번.
버스 안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회덕 쪽을 지나던 버스가 외진 길을 들어서더니 어느새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과거에 미군부대(CAMP AMES)가 있던 장동을 지나서도 한참을 들어갔습니다. 여기가 대전이 맞나 싶은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강원도 산간마을로 향하는 것만 같습니다. 74번 버스에서 내린 승객은, 필자 단 한 명뿐. 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러가야겠습니다.
<장동 산디마을탑제를 알리는 안내표지판>
<1973년에 세운 장동마을 새마을 표지석>
대전 계족산 뒤편 깊은 곳에 ‘장동 산디마을’이라는 산간마을이 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두 개의 돌탑(돌탑은 당숲과 함께 조성되어 조산으로, 경남지방에서는 막돌탑으로 부르기도 함)이 있는데 도로 왼편에 1기, 그 오른편으로 개울을 사이에 두고 1기가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각기 명칭이 있죠. 왼편의 것이 할아버지 탑, 오른편의 것이 할머니 탑. 이 돌탑이, 바로 장동 산디마을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입니다!
<도로 왼편에 위치한 할아버지 탑><도로 오른편 개울건너에 위치한 할머니 탑>
두 개의 돌탑(할아버지, 할머니 탑)에는 볏짚으로 된 금줄이 둘러쳐 있습니다.
오래 전 산디마을에 모인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洞神)을 모시기로 뜻을 모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뒤에 “동신이 안주하는 거목이나 바위, 당집, 선돌, 막돌탑 중에서 선택”(김봉우, 『경남의 막돌탑과 선돌』, 집문당, 2000. 16쪽)했습니다. 이곳 산디마을 사람들은 마음속에 소망을 품은 채 산야와 개울 주변에서 가장 알맞은 돌들을 골랐으리라.
<정면에서 본 할아버지 탑>
그런데 두 개의 돌탑은 왜 마을 초입의 개울가에 놓여있는 걸까요?
“그 옛날 마을이 형성되었을 때 벌집형국의 출입처에 탑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이중으로 비보하여 수구막이”(강성복, 박종익, 『장동산디마을탑제』, 대전광역시, 2012. 65쪽)를 했습니다. 돌탑은 수구막이의 책무를 지녔습니다. 수구(水口)막이란, “흐르는 물이 산속으로 멀리 돌아가 하류가 보이지 아니하게 만든 형세, 나무를 심거나 산을 만들기도 한 것”(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지명의 지리학』, 푸른길, 2008. 201쪽)입니다. 수구의 역할은 물의 흐름처럼, “복락과 번영, 다산, 풍요 등 상서로운 기운이 함께”(이도원, 『전통마을 경관요소들의 생태적 의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49쪽)흐르고, 때로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액을 막아내는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그래서 산디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길과 개울의 시작점에 돌탑을 쌓아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마을과 자신들의 삶을 지키고자 애썼을 겁니다.
돌탑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나뉜 것은 전통적인 음양의 세계관을 따른 것입니다.
돌탑은 물론 돌장승, 선돌에서도 남녀를 구분하는 것은 전국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광경이죠.
산디마을에서는 매년 음력정월 14일 밤이 되면 어김없이 산신제와 탑제를 지내는데, 탑제의 성격을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병마와 재액을 막고 길목을 지키는 거리제(거리는 마을입구를 의미)”(김계연, 박선애, 『한국의 마을신앙 上, 현장조사 보고서』, 국립민속박물관, 2007. 202쪽)로 보기도 합니다. 이날 할아버지 탑(상단에는 남성을 상징하는 꼭지돌이 서 있다)과 할머니 탑 사이에 “오쟁이(짚으로 만든 작은 섬)로 다리를 놓아 서로 왕래하게 한다. (할아버지 신과 할머니 신이) 교접하면 마을이 더 풍요로워진다”(강성복, 박종익, 『장동산디마을탑제』, 대전광역시, 2012. 117쪽에서 인용. 괄호 속 내용은 필자가 추가한 내용)고 믿기 때문이죠.
돌탑을 감싸고 있는 금줄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금기의 의미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산디마을 돌탑의 금줄은 거리제에서 사용한 그대로 썩어가고 있었는데, 이 모든 근본적인 이유가 “단순히 잡귀, 잡인만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스러운 상징을 부여하는 금줄이기에 인위적으로 제거하지”(이필영, 『마을신앙으로 보는 우리문화 이야기』, 웅진닷컴, 2000. 73쪽)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산디마을 사람들은 정성을 들여 돌들을 하나하나 골라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그 돌들이 모여 돌탑이 된 어느 때부터 신령스러운 기운이 깃들었을 겁니다. 그 신령함을 믿어왔던 이들은 알고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오랜 세월의 바람과 빗물과 눈이 스며들어 검은색이 감도는 돌탑, 그 안에 여전히 탑신이 존재해 왔음을. 마을 어귀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계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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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8월 28일 |
유성온천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오늘날과 같은 명성의 토대는 20세기 일제 강점기부터다. 불행했던 이 시기, 대전은 일제가 식민도시로 건설한 도시 중에 하나로 탄생된다.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유성온천이다. 근대 유성온천을 보여주는 6개의 장면 속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역사의 단면이 날 것 그대로 담겨 있다.
장면 1. 공주갑부 김갑순
유성온천의 개발에는 친일파 ‘공주갑부 김갑순’을 빼놓을 수가 없다. 대전에서 유성온천까지 운행하는 차량 노선이 있었는데 그가 소유한 김갑순 자동차부(金甲淳 自動車部)소속이었다. 1922년 무렵이 되면 유성온천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때 김갑순은 “유성온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주주”(동아일보 1922년 7월 9일자)가 된다. 그 뒤에 전신전화소가 들어서고, 1928년에는 “유성온천도로가 개통”을 했다. 조선시대 왕들이 찾아오던 지방의 한적한 온천에서 식민지 근대 도시의 세례를 받은 휴양지로 변모한 것이다.
장면 2. 일본 군인들의 고급휴양소, 여관 봉명관
여관 봉명관은 현재 계룡스파텔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 봉명관이 조선신문 1928년 1월 3일에 신년맞이 광고를 냈다.
<유성신온천 여관 봉명관> 1928년 1월 3일, 조선신문에 실린 신년맞이 광고
이날 신문을 보면, ‘유성신온천 여관 봉명관’이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봉명관은 1925년 문을 열었는데 주로 일본 고위 군인이 애용하는 고급휴양소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1936년 3월 17일 조선총독부의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 정무총감이 대전역에서 유성온천으로 이동하는 사진이 찍혀, 그때를 증언한다.
장면 3. 겨울의 낙원이라는 유성온천
1928년 11월 15일자 매일신보에는 “겨울의 낙원 온천의 자미(자양분이 많고 좋은 음식-필자)”라는 글이 실린다.
1928년 11월 15일, 매일신보. 기사 하단 중앙에 <유성온천 소개>가 실려 있다.
“유성온천은…위아치가 풍부하고 조용한 보양지로 가족을 동반함에 조코…공동욕장이 설비되여잇서 부근 이삼의 온천숙에서 욕객들이 단이며…신온천의 봉황장은 만철시대에 자금을 투하야 훌륭히 건축한 것으로 내탕도 잇서 항상번창하고 대전으로부터 하차한 여객은 갓흔갑이면 온천이 좃타고…”
당시 신문에서는 조선의 대표적인 온천을 겨울의 낙원으로 소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유성온천이었다. 일본인들에게 각광 받는 곳이었으나 겨울의 낙원을 즐길 수 있는 조선인이 몇이나 되었으랴.
장면 4. 신흥대전의 오아시스 유성온천
1936년 8월 9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유성온천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기사의 제목은“신흥대전의 오아시스 유성온천을 찾어”이다.
<신흥대전의 오아시스 유성온천을 찾어> 1936년 8월 9일, 조선중앙일보. 유성온천호텔 모습이 생생하다.
해당 기사는“대중적이면서도 좀더 근대적인 유성온천호텔이 20여만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지난 4월부터 개업하야 신흥도시대전부민의 유일한 유원지 유성온천은 겨우 그 체면을 유지하게”되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한다.
장면 5. 이박사와 굿펠러의 만남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23일, 유성온천호텔에 이승만 박사가 한 미국인을 만나 회담을 나눈다.
<이박사와 굿펠러씨 회담 충남유성> 1946년 4월 23일, 현대일보
그는 누구일까? 그의 이름은 프레스턴 굿펠러(Preston M. Goodfellow), 그의 직함은 미군사령관의 정치고문. 이때가 미군정시기인 것을 감안하면 두 인물은 밀담을 나누었을 테지만,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내용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장면 6. 자가용, 식당완비, 천하의 영험한 물
1948년 가을 유성호텔에서 손님을 유치하기 위한 광고를 냈다. ‘자가용자동차완비’ ‘각종침실’‘식당완 비’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천하의 영험한 물과 한가하고 고요한 곳’이라는 광고카피를 쓴다. 유성온천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고급휴양지였을 것이다.
1948년 9월 8일, 평화일보에 실린 <유성호텔안내> 광고
낙원, 신흥대전의 상징, 천하의 영험한 온천…. 6개의 장면에 등장하는 일제강점기 근대 유성온천은 현재보다 더 화려하고 멋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식민지 지배의 그림자와 친일파의 흔적이 그늘져 있기도 하다. 6개의 기록은 유성온천의 빛과 그림자를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대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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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5월 2일 |
1930년대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대전시내 본정통.
밤이 되자 화려한 불빛들이 새로 들어선 도심의 건물을 일제히 밝혔다.
그곳은 미나카이 백화점과 대전극장이었다.
그 백화점과 극장 안팎으로 신식 남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단발과 짙은 화장, 스커트나 치마 차림의 모던걸(moderngirl)이었고,
양복과 맥고모자, 한 손에는 지팡이를 잡은 모던뽀이(modernboy)였다.
모던걸과 모던뽀이가 대전의 백화점과 극장을 거닐고, 즐기고 있었다.
대전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의 모습을 발굴하다
1930년 대 중반 무렵, 조선의 경성에는 일본 유수의 백화점들이 화려한 외형을 뽐내며 장안의 명소로 각광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소유한 백화점으로는 미쓰코시(三越), 조지아(丁子屋), 히리타(平田), 미나카이(三中井)가 있었죠.
비슷한 시기 대전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1932년 9월에 문을 연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대전점.
미나카이 백화점 대전점은 어디에 있었을까?
미나카이 백화점 대전점은 대전 본정통(本町通)의 일정목(一町目)이나 춘일정일정목(春日町一町目) 중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정통은 혼마치 거리라 했으며 일정목은 거리의 구역표시죠.
미나카이는 현재 대전역 중앙시장 인근에 있었을 겁니다. 현재 서울의 충무로가 바로 혼마치 거리였죠.
2019년 4월의 대전중앙시장 전경
미나카이 백화점 대전점의 모습은 어땠을까?
지금껏 그 실체를 본 적이 없었지만 필자가 최초로 발굴한 미나카이 백화점의 모습을 확인하기 바랍니다.
당시 ‘조선신문’의 기사는, 1934년 6월 21일 미나카이 백화점이 3층 건물로 확장 이전해서 개점했는데 사람들로 밤낮 만원이라고 전합니다.
미나카이 백화점 대전점 확장 개점을 알리다! (출처: 조선신문 1934년 6월 21일)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그렇다면 백화점의 실내는 어땠을지,
하야시 히로시게의 역사서 『미나카이 백화점』을 토대로 재구성해 해보겠습니다.
미나카이 백화점 대전점은 부산점과 마찬가지로 건물 외벽에 설치된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 조명장식)’이 백화점 건물과 혼마치 일대를 눈부시게 밝혔습니다.
미나카이 백화점 대전점의 신문 광고 (출처: 조선신문 1934년 1월 7일)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백화점 1층에는 화장품, 장신구, 식료품, 문구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2,3층에는 포목, 신사복, 가구, 전기용품 등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각 층에는 일본인 매니저들과 조선인 점원들이 일을 했습니다.
여성점원들은 기모노를 입었으며 남성점원들은 와이셔츠에 양복을 입었고 머리에는 포마드를 발라 단정함을 유지했습니다. 백화점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주로 일본어였지만, 한국인들에게도 상당한 인기였습니다. 때로는 백화점 안에서 철도화물전람회처럼 다양한 기획전이 열리곤 했습니다.
대전극장이 세워지던 날
1932년 대전에는 경심관(警心管)이라는 극장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 1936년 2월입니다. 대전극장의 상동식(上棟式)이 열립니다. 상동식은 일본식 표기인데, 우리는 상량식(上梁式)이라 부르는 행사입니다. 집과 건물의 골조가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고사를 지내며 축원을 기원하는 의식이죠. 그렇게 해서 대전극장이 문을 열고 대전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모읍니다.
대전극장 상동식(상량식의 일본식 표기)이 있던 날 (출처: 매일신보 1936년 12월 30일)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1949년 신문에는 대전극장에서 '마음의 고향'이라는 한국영화의 상영을 알리는 광고가 등장합니다.
대전극장에서 영화 '마음의 고향' 상영을 홍보하는 신문광고. (출처: 1949년 4월 8일 연합신문)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대전극장보다 먼저 생긴 경심관에서 발생한 화재를 다룬 기사가 인상적입니다. 경심관의 주인이 그 유명한 공주 갑부 김갑순입니다.
대전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 미나카이 백화점. 대전 초장기의 영화관, 대전극장.
지금은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게다가 기록조차 찾기 힘들게 된 공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모던걸과 모던뽀이들이 멋을 부리며 거닐고 즐기던 화려한 공간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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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3월 5일 |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나온 수많은 신문들을 보면, 당시 대전의 풍경,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920년부터 1949년까지 발행된 신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전의 근대문화를 엿볼 수 있을 겁니다. 화려함과 아픈 풍경이 동시에 스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우리의 과거겠죠.
<조선신문, 동아일보> 자유헌, 대전 최초의 호텔 그리고 양식당
1912년 부산 철도호텔을 기점으로 일본 호텔들이 하나둘 개업을 합니다.
이때 생긴 호텔들은 대부분 열차역 앞에 있어, 역전 호텔이라 불렀습니다.
1920년대 중반 일본인이 세운 호텔이 대전에도 들어섰습니다.
위치는 대전역 앞, 호텔의 명칭은 ‘자유헌(自由軒, 지유켄)’.
자유헌은 3층으로 된 벽돌건물로, 호텔이자 서양요리를 제공하는 경양식과 일본인들의 지역 행사가 열리는 연회장, 사교장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필자가 최초로 발굴한 자유헌 신문 광고입니다.
(아래 오른쪽, 자유헌 신문광고. '대전역전' '양식'이라는 인쇄가 선명하다. 출처: 1927년 6월 28일 조선신문)
1932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대전역 근처 코트에서 제6회 전조선개인정구 대회 결승전이 개최되었습니다. 경기 후에 선수들과 대회 주최자들은 자유헌으로 가서 다화회(茶話會)를 열었습니다. 다화회는 차와 화과자를 비롯해 간단한 요리를 즐기는 자리였는데 일본인들에게는 인간관계를 잇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유헌에는 양식당이 있었는데 “나이프, 스푼들이 신기해서 자주 고객들이 호주머니에 넣어가”(출처: 경향신문 1974년 12월 28일)는 해프닝이 벌어지곤 했답니다.
대전에 최초로 생긴 호텔이자 양식당 자유헌은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음식을 구경할 수 있던 진기한 곳이었습니다.
(대전역 앞에 있는 3층 건물들 자리에 자유헌 건물이 있었다. 2019년 2월의 풍경)
<매일신보> 보문산에 풀장이 생기다
1934년 3월 28일 보문산에 풀장이 준공식을 합니다.
1928년에 이미 보문산공원이 생긴 걸 보면, 보문산은 이미 개발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보문산 등산로의 안내석. 1962년 4월 5일에 세워졌다.)
3월 28일 풀장 준공에 앞서 개장을 하여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사에는 보문산 풀장의 개발에 대전읍 조선인 유지들이 조합을 조직해서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시절에 풀장을 이용하는 조선인들이 얼마나 됐을지는 의문이 듭니다.
이듬해 1935년 8월에 대전읍 수영대회가 보문산 풀장에서 성황리에 열렸다는 기사가 보도 됩니다.
초중고생, 회사원, 일반청년 70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을 했는데 입상자 명단에는 일본인 이름뿐입니다.
그때가 식민지 시대였음을 말해주는 풍경입니다.
(보문산 풀장이 문을 열다. 출처: 1934년 3월 28일 매일신보)
(보문산 풀장에서 열린 수영대회. 출처: 1935년 8월 27일 매일신보)
<충청매일> 보명수, 대전에서 만든 국민 소화제
지금도 유명한 동화제약의 활명수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소화제입니다.
당시 활명수가 큰 인기를 끌자 엇비슷한 상표를 단 소화제들이 쏟아집니다.
통명수, 회생수, 소생수, 낙천약수, 민생수, 위활수, 보명수… 등등.
해방이 끝난 1949년 충청매일신문에는 보명수 광고가 등장합니다.
“명성이 놉고 정평 있는 보명수의 효능 새삼스렇이 말슴 안켔음니다
총판매 대전부 원동 충청남도제약주식회사”
(보명수 신문광고. 대전시가 되기 직전 대전부 시절이다. 출처: 1949년 8월 6일 충청매일)
보명수(保命水)는 서울을 비롯해서 몇 곳에서 제조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대전 대흥동(현재 뾰족집 인근)에 있던 공민제약에서 제조를 한 것입니다.
공민제약은 자매회사격으로 충청남도약품주식회사를 따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보명수가 비록 활명수의 인기에 편승하긴 했지만, 대전에서는 인기가 많은 제품이었다고 합니다.
대전 사람들에게만은 활명수에 못지않은 소화제가 보명수였던 모양입니다.
대전 최초의 호텔이자 양식당 자유헌, 보문산의 풀장, 그리고 보명수….
이제는 모두 사라져 기록으로 만 존재하지만, 대전의 삶과 역사가 된 소중한 흔적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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