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자트의 나비

폭풍의 언덕

By  | 2012년 11월 12일 | 
어제,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발코니 쪽 나무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거기에 빗줄기까지 더해진다면 캐서린의 환청이 들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렛 미 인, 렛 미 인. 웬만해서 한 번 읽은 소설은 다시 읽지 않는데 <폭풍의 언덕>은 예외였다. 게다가 드라마와 영화들까지. 안드레아 아놀드가 연출한 <폭풍의 언덕>에선 히스클리프가 미친놈처럼 묘사되지 않아 좋았다. 히스클리프는 생각했던 만큼 음울했지만 광기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굴곡지고 명암이 뚜렷한 원작에 비해 영화는 다소 단조로웠다. 캐서린의 죽음까지만 영화화한 탓에 원작에서 인상적이었던 도입부도 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놀드의 <폭풍의 언덕>은 이전 버전들과 달리 정념보다는 황량한 풍광에 시선을

사랑 따윈 필요 없어

By  | 2013년 4월 17일 | 
愛なんていらねえよ、夏 last 10 - "사랑 따윈 필요 없어." - 얼음처럼 차가운 그 목소리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그 눈은 어딘가 나와 닮은 느낌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일 듯. 愛なんていらねえよ、夏 last 4~3 마음에 들었던 장면 가운데 하나. 숨 막힐 듯한 여름 공기와 매미 소리. 여름의 축축함 대신 삭막한 기운이 감돈다. 음악이나 카메라 워크도 불안하고 위태롭다. 극 중 캐릭터들처럼. 오프닝에서 눈먼 여자는 늘 환한 빛 속에 있고, 앞이 보이는 남자는 어둠에 잠겼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빛에 물들어간다. 각자의 내면이나 처지를 반영한 것 같으면서 한편으론 각자의 시선에 비친 서로의 모습처럼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팔구 년 전 봄 아니면 여름이었던

나인

By  | 2013년 6월 5일 | 
향이 타는 삼십 분 동안만 이십 년 전 오늘로 돌아갈 수 있다. 향은 죽음과 제사를 상기시킨다. 과거가 바뀌면 현실도 바뀐다. 그렇게 바뀐 여러 번의 생은 한 인물 속에 켜켜이 쌓인다. 그 사실을 각성한 인물들에겐 예전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몇 겹으로 남아 있다.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나인> 속 세상은 거의 마지막까지 운명론적 세계관에 따라 움직인다. 다우주엔 관심이 없다. 인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분화하지 않는다. 반드시 동일 인물로 수렴한다. 여러 개의 우주에서 여러 명의 내가 존재할 가능성은 애초 <나인>에선 다루지 않는 문제다. 과거와 현재가 긴밀히 맞물리며 삶이 수차례 바뀌어도 인물들의 궁극적인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은 단지 몇 시간 뒤로 미뤄졌을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