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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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posts조선왕릉_정릉,아리랑시장_'20.8
[정릉貞陵] 1396년(태조 5)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능역을 황화방 북원에 정하고 그 동쪽에 재궁 흥천사를 세워 자주 행차했다. 그러나 태조가 죽은 뒤인 1409년(태종 9) 묘를 사을한 골짜기로 옮겼으며 종묘에 부묘하지 않고 왕비의 제례를 폐했다. 1410년 태종은 정릉의 석물 중 일부인 병풍석을 광교의 돌다리로 사용했으며, 그밖의 석재나 목재들을 태평관 건립시 부속재로 이용했다. 1581년(선조 14) 삼사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은 뒤, 1669년(현종 10) 송시열(宋時烈) 등이 다시 신덕왕후 강씨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를 올림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복구작업과 이에 따른 수호군 및 모든 상설을 구비하게 되었다.
조선왕릉_태강릉_태릉,강릉_'20.8
[태릉泰陵]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의 무덤이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무덤인 강릉(康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 옆에 묻힐 요량으로 장경왕후의 능 옆에 있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풍수지리가 안 좋다 하여 선릉(宣陵)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새로 옮긴 정릉의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자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어 중종 옆에 묻히려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 믿기 힘들만큼 웅장한 능으로,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봉분을 감싼 12
조선왕릉_홍유릉_홍릉,유릉_'20.8
[홍릉洪陵]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의 무덤으로 을좌신향(乙坐辛向)한 동봉이강릉(同封異岡陵)이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67세로 승하하여 같은 해 3월 3일 남양주시 금곡동에 초장봉릉(初葬封陵)되었다. 명성황후 민씨는 1895년(고종 32) 8월 20일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浪人)들에게 시해 당하였다. 1897년(광무 1) 11월 22일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청량리(현 숭인원)에 처음 장사지냈으며, 1919년 1월 16일 현재 위치로 능을 옮겼다. 능 상설(象設)의 두드러진 특징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에 따라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능역 조성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 방식을 따랐다는 점이다
조선왕릉_사릉,광해군묘_'20.8
[사릉思陵]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의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무덤이다. 정순왕후는 1521년(중종 16) 6월 4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소생이 없어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경기도 양주군의 시가(媤家) 묘역에 묘를 만들었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던 단종은 1691년(숙종 7)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었다가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이때 정순왕후도 복위되었으며, 무덤은 사릉(思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사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봉분 앞에 상석 1좌, 상석 양측에 망주석 1쌍을 세웠다. 봉분 주위에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1쌍이 배치되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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