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링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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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에 26세의 조지 워싱턴은 한 살 많은 과부 마사 커스티스(Martha Custis)와 결혼을 하는데, 그녀의 전남편은 버지니아 최고의 부자였으나 일찍 급사를 했다.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아내가 낳은 전남편의 아들과 딸을 키웠지만, 딸은 17세에 간질로 사망하고 결혼한 아들도 1781년 요크타운 전투 직후에 4명의 자녀를 남기고 병사한다. 그래서 워싱턴 부부는 그들 중 어린 손녀와 손자를 데려와 직접 키우는데,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관저에서 함께 살았으며, 나중에는 유산을 상속해주기 위해 법적으로 딸과 아들로 입양을 한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케네디 대통령 무덤을 둘러본 후에 좁은 산책로인 Custis Walk를 따라 언덕을 오르니, 꼭대기에 누리끼끼한 색깔의 그리스 신전같은 건물이 나온다. 바로 위에 설명한 워싱턴의 양아들인 조지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가 자신이 물려받은 플랜테이션에, 워싱턴을 기리는 의미로 웅장하게 만든 알링턴 하우스(Arlington House)로 1802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1818년에야 완공되었다.
1789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The Washington Family"라는 이 그림에서 왼쪽의 남자 어린이가 조지 커스티스인데, 어릴 때는 여러모로 워싱턴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한 때는 재혼한 친어머니 집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는 키워주신 할아버지 워싱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잊지 않았기에, 성인이 되어서 땅과 재산을 물려받은 동시에 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뭔가 좀 이상한게, 거대한 기둥이 나무계단 위에 세워져 있고, 그 바닥도 빨간 벽돌이다... 당시 의사당을 설계한 최고의 건축가를 고용해서 야심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는 땅과 노예만 많지 현금은 없었고 1812년 전쟁으로 물자부족까지 겹치면서, 결국은 벽돌로 지은 건물의 기둥과 벽면을 매끈하게 바른 후에 대리석처럼 보이게 칠을 한 것이란다.
뒤돌아 동쪽 아래로 내려다 보면, 국립묘지의 정문에서 이어지는 알링턴 기념교(Arlington Memorial Bridge)로 포토맥 강을 건너서 바로 링컨 기념관이 나오고, 오른편으로는 워싱턴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편 가족실(Family Parlor)의 좌우 벽난로 위에는 이 집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부부의 초상화가 각각 걸려있다. 왼쪽이 조지 커스티스의 유일하게 장성한 자손으로 알링턴 플랜테이션을 물려받은 딸인 메리 커스티스(Mary Anna Randolph Custis)이고, 1831년에 이 집에서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 오른쪽의 남편이 바로...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로 1838년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그의 아버지도 독립전쟁에 참전했었고 1799년의 워싱턴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할만큼 이미 명문가의 자제였는데, 법적으로 치자면 워싱턴 대통령의 손녀 사위가 후에 남북전쟁에서 남군을 이끌었던 리(Lee) 장군인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이라서 결혼 후 대부분 떠돌며 살았지만, 1857년에 장인이 사망하자 유산 집행을 위해 여기로 돌아온다. 결국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버지니아가 연방을 탈퇴하자, Lee는 이 집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남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부부가 함께 리치먼드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식탁이 차려진 다이닝룸(Dining Room)의 벽에는 조지 커스티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그는 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인 워싱턴 대통령의 소지품 보존과 기념사업 등을 위해 노력했고, 역사 희곡과 책을 쓰기도 하는 등 말년까지 활발히 활동했단다.
신전같은 외관과 달리 내부는 거주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침실과 주방 등의 모습도 옛날 생활상 그대로 복원을 해 놓았다.
실내 투어코스의 마지막인 모닝룸(Morning Room)에 꾸며진 스튜디오인데, 조지 커스티스가 직접 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단다. 여기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 통로의 벽에 국립공원청이 관리하는 이 집의 공식 명칭인 알링턴 하우스, 로버트 리 기념관(Arlington House, The Robert E. Lee Memorial) 명칭이 붙어있다. 박물관 전시는 노예들의 숙소를 복원한 별도의 뒷채에 작게 만들어져 있지만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공원 홈페이지에서 사진과 그림만 몇 장 가져와서 설명을 드린다.
리 부부가 떠난 후에 이 언덕은 수도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바로 연방군이 점령을 했고, 농장에는 자유 흑인들의 정착촌과 흑인 병사들의 훈련을 위한 군부대가 임의로 설치된다. 결국 위 사진이 찍힌 1864년에 세금체납을 이유로 공식적으로 연방정부가 이 땅을 몰수한 후에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북군 병사들을 여기 매장하기 시작해서, 지금의 알링턴 국립묘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후 1877년에 부부의 장남인 조지 리(George Washington Custis Lee)가 소송을 해서, 몰수가 부당했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내었지만 이미 농장은 묘지로 바뀌어 있었고, 어차피 현금 보상을 원했던 그는 결국 15만불에 다시 모든 건물과 땅을 연방정부에 매각을 했다.
지난 5월초에 직접 방문했던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에서 남군의 항복문서에 서명한 리(Lee)가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Grant)와 악수하는 모습의 "Let Us Have Peace" 그림이다. 부하 장군들 중의 일부가 후퇴가 불가하니 뿔뿔이 흩어져서 게릴라전을 계속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국가가 하나로 회복되는데 수 년이 더 걸리는 무의미한 짓이라며 거부하고 깨끗한 항복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남북의 평화와 재결합을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한 때 미국에 맞서 싸웠던 인물을 기리는 유일한 연방정부 지원의 국가기념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버지니아 렉싱턴(Lexington)의 워싱턴 대학교 총장이 되었고, 위 사진의 1869년에 대통령이 된 그랜트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하고 이듬해 사망해서, 그의 사후에 Wasington and Lee University로 이름이 변경된 대학의 예배당 옆 묘지에 묻혔다. 남부연맹 가담자들은 전후 미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사면선서(Amnesty Oath)를 제출해야만 복권이 되었는데, 리도 당연히 서명해서 우편으로 보냈지만 남부에 반감을 가진 어떤 이가 고의로 누락했단다. 그래서 이 집은 1925년부터 문화재로 관리는 되었지만 그냥 Custis-Lee Mansion으로 불리다가, 1972년에 문서보관소에서 리의 사면선서가 발견된 이후에야 공식적으로 시민권이 회복되고 현재와 같이 그의 이름이 들어간 메모리얼이 될 수 있었단다.
맨션의 남쪽에 있는 정원을 지나면 나오는 남북전쟁 무명용사묘를 잠깐 구경하고는 다시 언덕을 걸어 내려가 알링턴 국립묘지 구경을 마저 했었다. 옛날 한국에서는 청바지 브랜드로, 또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있는 나무 이름으로 '리(Lee)'가 원래 미국에도 있는 성씨라는 것을 알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 동안 남북전쟁 관련 포스팅에 수 없이 등장했던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의 국립 기념관을 마침내 둘러봤고, 이로써 집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 NPS Official Unit들은 빠짐없이 모두 방문한 것이 되었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1759년에 26세의 조지 워싱턴은 한 살 많은 과부 마사 커스티스(Martha Custis)와 결혼을 하는데, 그녀의 전남편은 버지니아 최고의 부자였으나 일찍 급사를 했다.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아내가 낳은 전남편의 아들과 딸을 키웠지만, 딸은 17세에 간질로 사망하고 결혼한 아들도 1781년 요크타운 전투 직후에 4명의 자녀를 남기고 병사한다. 그래서 워싱턴 부부는 그들 중 어린 손녀와 손자를 데려와 직접 키우는데,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관저에서 함께 살았으며, 나중에는 유산을 상속해주기 위해 법적으로 딸과 아들로 입양을 한다.
알링턴 국립묘지의 케네디 대통령 무덤을 둘러본 후에 좁은 산책로인 Custis Walk를 따라 언덕을 오르니, 꼭대기에 누리끼끼한 색깔의 그리스 신전같은 건물이 나온다. 바로 위에 설명한 워싱턴의 양아들인 조지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가 자신이 물려받은 플랜테이션에, 워싱턴을 기리는 의미로 웅장하게 만든 알링턴 하우스(Arlington House)로 1802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1818년에야 완공되었다.
1789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The Washington Family"라는 이 그림에서 왼쪽의 남자 어린이가 조지 커스티스인데, 어릴 때는 여러모로 워싱턴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한 때는 재혼한 친어머니 집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는 키워주신 할아버지 워싱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잊지 않았기에, 성인이 되어서 땅과 재산을 물려받은 동시에 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뭔가 좀 이상한게, 거대한 기둥이 나무계단 위에 세워져 있고, 그 바닥도 빨간 벽돌이다... 당시 의사당을 설계한 최고의 건축가를 고용해서 야심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는 땅과 노예만 많지 현금은 없었고 1812년 전쟁으로 물자부족까지 겹치면서, 결국은 벽돌로 지은 건물의 기둥과 벽면을 매끈하게 바른 후에 대리석처럼 보이게 칠을 한 것이란다.
뒤돌아 동쪽 아래로 내려다 보면, 국립묘지의 정문에서 이어지는 알링턴 기념교(Arlington Memorial Bridge)로 포토맥 강을 건너서 바로 링컨 기념관이 나오고, 오른편으로는 워싱턴 기념탑이 우뚝 솟아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편 가족실(Family Parlor)의 좌우 벽난로 위에는 이 집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부부의 초상화가 각각 걸려있다. 왼쪽이 조지 커스티스의 유일하게 장성한 자손으로 알링턴 플랜테이션을 물려받은 딸인 메리 커스티스(Mary Anna Randolph Custis)이고, 1831년에 이 집에서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 오른쪽의 남편이 바로...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로 1838년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그의 아버지도 독립전쟁에 참전했었고 1799년의 워싱턴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할만큼 이미 명문가의 자제였는데, 법적으로 치자면 워싱턴 대통령의 손녀 사위가 후에 남북전쟁에서 남군을 이끌었던 리(Lee) 장군인 것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이라서 결혼 후 대부분 떠돌며 살았지만, 1857년에 장인이 사망하자 유산 집행을 위해 여기로 돌아온다. 결국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버지니아가 연방을 탈퇴하자, Lee는 이 집에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남군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부부가 함께 리치먼드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식탁이 차려진 다이닝룸(Dining Room)의 벽에는 조지 커스티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그는 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인 워싱턴 대통령의 소지품 보존과 기념사업 등을 위해 노력했고, 역사 희곡과 책을 쓰기도 하는 등 말년까지 활발히 활동했단다.
신전같은 외관과 달리 내부는 거주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침실과 주방 등의 모습도 옛날 생활상 그대로 복원을 해 놓았다.
실내 투어코스의 마지막인 모닝룸(Morning Room)에 꾸며진 스튜디오인데, 조지 커스티스가 직접 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단다. 여기서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 통로의 벽에 국립공원청이 관리하는 이 집의 공식 명칭인 알링턴 하우스, 로버트 리 기념관(Arlington House, The Robert E. Lee Memorial) 명칭이 붙어있다. 박물관 전시는 노예들의 숙소를 복원한 별도의 뒷채에 작게 만들어져 있지만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공원 홈페이지에서 사진과 그림만 몇 장 가져와서 설명을 드린다.
리 부부가 떠난 후에 이 언덕은 수도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바로 연방군이 점령을 했고, 농장에는 자유 흑인들의 정착촌과 흑인 병사들의 훈련을 위한 군부대가 임의로 설치된다. 결국 위 사진이 찍힌 1864년에 세금체납을 이유로 공식적으로 연방정부가 이 땅을 몰수한 후에 남북전쟁에서 사망한 북군 병사들을 여기 매장하기 시작해서, 지금의 알링턴 국립묘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전후 1877년에 부부의 장남인 조지 리(George Washington Custis Lee)가 소송을 해서, 몰수가 부당했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내었지만 이미 농장은 묘지로 바뀌어 있었고, 어차피 현금 보상을 원했던 그는 결국 15만불에 다시 모든 건물과 땅을 연방정부에 매각을 했다.
지난 5월초에 직접 방문했던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에서 남군의 항복문서에 서명한 리(Lee)가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Grant)와 악수하는 모습의 "Let Us Have Peace" 그림이다. 부하 장군들 중의 일부가 후퇴가 불가하니 뿔뿔이 흩어져서 게릴라전을 계속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국가가 하나로 회복되는데 수 년이 더 걸리는 무의미한 짓이라며 거부하고 깨끗한 항복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남북의 평화와 재결합을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한 때 미국에 맞서 싸웠던 인물을 기리는 유일한 연방정부 지원의 국가기념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버지니아 렉싱턴(Lexington)의 워싱턴 대학교 총장이 되었고, 위 사진의 1869년에 대통령이 된 그랜트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하고 이듬해 사망해서, 그의 사후에 Wasington and Lee University로 이름이 변경된 대학의 예배당 옆 묘지에 묻혔다. 남부연맹 가담자들은 전후 미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사면선서(Amnesty Oath)를 제출해야만 복권이 되었는데, 리도 당연히 서명해서 우편으로 보냈지만 남부에 반감을 가진 어떤 이가 고의로 누락했단다. 그래서 이 집은 1925년부터 문화재로 관리는 되었지만 그냥 Custis-Lee Mansion으로 불리다가, 1972년에 문서보관소에서 리의 사면선서가 발견된 이후에야 공식적으로 시민권이 회복되고 현재와 같이 그의 이름이 들어간 메모리얼이 될 수 있었단다.
맨션의 남쪽에 있는 정원을 지나면 나오는 남북전쟁 무명용사묘를 잠깐 구경하고는 다시 언덕을 걸어 내려가 알링턴 국립묘지 구경을 마저 했었다. 옛날 한국에서는 청바지 브랜드로, 또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있는 나무 이름으로 '리(Lee)'가 원래 미국에도 있는 성씨라는 것을 알았던 기억이 나는데, 그 동안 남북전쟁 관련 포스팅에 수 없이 등장했던 로버트 E.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의 국립 기념관을 마침내 둘러봤고, 이로써 집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에 있는 NPS Official Unit들은 빠짐없이 모두 방문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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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울의 동작동 국립묘지, 정확한 명칭으로는 국립서울현충원과 비교되는 미국의 알링턴 내셔널 세메터리(Arlington National Cemetery)를, 여기 현충일에 해당하는 메모리얼데이(Memorial Day) 다음 일요일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국립묘지는 정치인들이 사진 찍히러 가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박혀서인지, 수도권에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해보니... 나의 선입견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한국과 미국의 국립묘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다르거나, 둘 중의 하나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전 일찍부터 환영소(Welcome Center)를 통해 입장하기 위해 보안검색을 기다리는 많은 방문객인데, 빨간 셔츠를 맞춰입은 사람들은 수학여행을 온 학생과 인솔자들이다. 또 유럽에서 온 단체 여행객들도 많아서 이미 버스 주차장은 만차였고, 입구 도로변까지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웰컴센터 내부에는 이 곳의 설립역사와 규모 등에 대한 안내판들이 있는데 차차 설명을 드릴 예정이고, 중앙에 의장대 '나팔수'가 밀랍인형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세워진 모습이 작년에 방문했던 미육군 국립박물관의 전시를 떠올리게 했다.
포토맥 강을 사이에 두고 워싱턴DC의 링컨 기념관과 마주보고 있는 버지니아 주의 알링턴 국립묘지 전체 지도로, 북쪽 끝에 표시된 유명한 미해병대 전쟁기념비(Marine Corps War Memorial)부터 동남쪽의 펜타곤 메모리얼과 함께 소개했던 제일 아래 미공군 기념물(Air Force Memorial)까지의 거리가 약 3km나 된다. 묘지 왼편을 Joint Base Myer–Henderson Hall 군기지가 감싸고 있는데, 현재 미국 전역의 164개 국립묘지들 중에서 최대인 알링턴은 군대가 직접 관리하는 딱 2곳중의 하나이다. (다른 1곳은 워싱턴DC 안에 있고, 게티스버그 등 국립 공원에 포함된 14곳은 국립공원청이, 나머지 148곳은 보훈부가 관리함)
당연히 국립묘지 입장료는 없지만, 사진의 셔틀과 트램을 번갈아 타며 전체를 설명과 함께 둘러보는 투어는 유료로 운영이 되고 있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이용객이 제법 있었다. 당연히 우리 부부는 단체 관람객들 무리에 슬쩍 휩쓸려 여기저기 설명을 주워들으며 그냥 걸었다~
원래 국립묘지의 정문으로 1932년에 반원형으로 건설된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서, 1997년에 여군 기념관(Military Women's Memorial)으로 별도 지정이 되었다. 내부에는 미군에서 여성의 활약과 그 역사 등이 소개되어 있다는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둘러보셔도 좋을 듯 하다.
그리고 등장하는 끝없이 세워진 묘비들... 현재 400,000구 넘게 여기에 매장 또는 봉안되어 있고, 지금도 매년 평균 6,500건의 장례가 진행된단다. 멀리 언덕 위쪽의 묘비들이 크고 좋아 보이는 것은 옛날에는 계급별로 매장 구역이 달랐기 때문으로, 초기에는 흑인과 남부군도 별도로 나눴지만, 지금은 그런 모든 구별은 당연히 없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묘지가 있어도 사람의 동상은 딱 2개밖에 없다는데, 그 중의 하나인 Sir John Dill 5성 장군의 기마상이다. 그는 영국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 지휘를 위해 워싱턴에서 근무하다가 사망해서, 국립성당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에 알링턴에 묻혔다고 한다.
최근에 여기 묻힌 사람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2020년에 사망한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의 묘비로, 육군에 복무했던 남편과 합장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RBG'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일생이 다큐멘터리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특히 참배객이 많은 것은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가장 유명한 묘지의 가까이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바로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빠지지 않고 들리는, 1963년 11월 22일에 텍사스에서 암살당한 제35대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대통령 묘소이다. 참고로 여기 매장된 역대 미국 대통령은 JFK를 포함해 딱 2명 뿐인데, 다른 한 명은 제27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로 여군 기념관 북쪽에 묘소가 있다. (언덕 위에 보이는 그리스 신전 스타일의 건물은 '알링턴 하우스'로 이 곳의 역사와 함께 별도 포스팅으로 소개할 예정)
중앙의 큰 석판 두 개에 JFK와 1994년에 합장된 그의 아내였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edy Onassis)의 이름이 적혀있고, 좌우의 작은 석판들은 1956년에 사산한 딸 Arabella와 1963년 8월에 태어나 이틀만에 죽은 아들 Patrick의 두 자녀를 함께 기리는 것이란다.
재클린의 아이디어로 급히 만들어져 암살 3일 후에 진행되었던 국장에서 그녀가 불을 붙였다는 '영원의 불꽃(Eternal Flame)'은 위치를 옮겨서 지금도 활활 타오르며 알링턴 국립묘지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 무덤은 약간 위쪽의 언덕에 작게 만들어졌었는데, 전세계에 생중계가 되었던 그의 장례식 이후에 매일 수 만명의 참배객들이 다녀가는 바람에, 4년 후인 1967년에 현재의 넓은 장소로 이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60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옛날에 알링턴을 포함한 미국의 국립묘지들은, 유족들이 고향에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고 묘소를 관리할 수 없는 경우에, 국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선택하는 장소로 여겨졌단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여기 묻힌 이후로는 명예로운 장지로 인식이 바뀌었고, 매장이나 이장을 원하는 신청자가 폭증을 해서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 알링턴하우스를 구경한 후에 찾아온 곳은 추모극장(Momorial Amphitheater)인데, 여기 바로 서쪽에 있는 우주왕복선 챌린저와 컬럼비아 사고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를 예습을 해놓고는 까먹어서 방문하지 못했던게 아쉽다~
1920년에 만들어진 이 야외 원형극장은 알링턴 국립묘지의 주요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특히 동쪽 무대의 뒷편에 있는 '무명용사의 묘(Tomb of the Unknown Soldier)'에서 여름철에는 30분마다 보초병 교대식이 열리는 것을 보기 위해서 왔는데, 시계가 11시반이 넘어가고 있어서 급하게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가장 대표적인 장면인 장총을 든 두 명의 보초병을 좌우에 세워두고 지휘관이 가운데 서있는 모습을 계단과 난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 어깨 너머로 잠깐 볼 수 있었다.
이 군인들은 국립묘지를 관리하는 포트마이어(Fort Myer)에 주둔한 3rd U.S. Infantry Regiment 소속으로, 그 부대는 흔히 '올드가드(Old Guard)'로 불린다. 그들 중에서도 여기 보초병으로 선발되는 것은 최고의 명예로 여겨지는데, 신체 조건이나 동작 테스트는 당연하고 보초를 서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듯한 국립묘지의 역사와 수 많은 묘소의 위치를 묻는 필기시험도 통과를 해야 한단다.
교대식이 다 끝나고 저렇게 혼자 남은 병사가 무명용사묘를 지키는데, 국립묘지가 방문객들을 받는 동안에는 한쪽에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좌우로 왔다갔다 한다. (문을 닫은 후에는 2시간마다 교대를 한다는데, 아마도 왼편에 만들어 놓은 초소 안에 그냥 서있을 것 같음)
모자 위에 가득찬 물컵을 올려놓아도 물 한방울 안 떨어질 듯이 부드러우면서도 절도있게 걷는 것을 좀 구경했다. 찾아보니까 21초간 정면을 응시한 후에 이동방향으로 틀어서 또 21초간 정지, 그리고 정확히 21걸음으로 반대방향으로 이동 후에 다시 정면으로 방향 전환을 계속 반복한다고 한다. 아마도 바지 주머니에 진동 타이머를 넣어둔 것이 아닐까? ㅎㅎ
유럽의 여러 왕궁 등에서 행해지는 화려한 근위병 교대식에 비해서는 아주 단촐한 볼거리였지만,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했다면 반드시 직접 봐야할 의미있고 엄숙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24시간 지키는 석관 아래에는 실제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의 유해 3구가 잠들어 있단다. (1984년에 베트남전 미확인 유해도 추가했었는데, 나중에 DNA 분석으로 신원이 밝혀져서 고향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고 함)
이 정도로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수 많은 묘비들 너머로 강건너 DC의 워싱턴 기념비가 뾰족하게 솟아있는 것이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가끔 외국 정상이 알링턴 국립묘지를 공식방문해서 무명용사묘 등에 헌화하는 사진은 본 듯 한데, 미국 정치인이 새해를 맞거나 새로 어떤 자리에 뽑혔다고 여기를 오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나중에 혹시 한국에 오래 머무를 기회가 오게 된다면 동작동 국립묘지, 국립서울현충원도 한 번 방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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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울의 동작동 국립묘지, 정확한 명칭으로는 국립서울현충원과 비교되는 미국의 알링턴 내셔널 세메터리(Arlington National Cemetery)를, 여기 현충일에 해당하는 메모리얼데이(Memorial Day) 다음 일요일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국립묘지는 정치인들이 사진 찍히러 가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박혀서인지, 수도권에 20년 가까이 살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해보니... 나의 선입견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한국과 미국의 국립묘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다르거나, 둘 중의 하나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전 일찍부터 환영소(Welcome Center)를 통해 입장하기 위해 보안검색을 기다리는 많은 방문객인데, 빨간 셔츠를 맞춰입은 사람들은 수학여행을 온 학생과 인솔자들이다. 또 유럽에서 온 단체 여행객들도 많아서 이미 버스 주차장은 만차였고, 입구 도로변까지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웰컴센터 내부에는 이 곳의 설립역사와 규모 등에 대한 안내판들이 있는데 차차 설명을 드릴 예정이고, 중앙에 의장대 '나팔수'가 밀랍인형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세워진 모습이 작년에 방문했던 미육군 국립박물관의 전시를 떠올리게 했다.
포토맥 강을 사이에 두고 워싱턴DC의 링컨 기념관과 마주보고 있는 버지니아 주의 알링턴 국립묘지 전체 지도로, 북쪽 끝에 표시된 유명한 미해병대 전쟁기념비(Marine Corps War Memorial)부터 동남쪽의 펜타곤 메모리얼과 함께 소개했던 제일 아래 미공군 기념물(Air Force Memorial)까지의 거리가 약 3km나 된다. 묘지 왼편을 Joint Base Myer–Henderson Hall 군기지가 감싸고 있는데, 현재 미국 전역의 164개 국립묘지들 중에서 최대인 알링턴은 군대가 직접 관리하는 딱 2곳중의 하나이다. (다른 1곳은 워싱턴DC 안에 있고, 게티스버그 등 국립 공원에 포함된 14곳은 국립공원청이, 나머지 148곳은 보훈부가 관리함)
당연히 국립묘지 입장료는 없지만, 사진의 셔틀과 트램을 번갈아 타며 전체를 설명과 함께 둘러보는 투어는 유료로 운영이 되고 있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이용객이 제법 있었다. 당연히 우리 부부는 단체 관람객들 무리에 슬쩍 휩쓸려 여기저기 설명을 주워들으며 그냥 걸었다~
원래 국립묘지의 정문으로 1932년에 반원형으로 건설된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서, 1997년에 여군 기념관(Military Women's Memorial)으로 별도 지정이 되었다. 내부에는 미군에서 여성의 활약과 그 역사 등이 소개되어 있다는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둘러보셔도 좋을 듯 하다.
그리고 등장하는 끝없이 세워진 묘비들... 현재 400,000구 넘게 여기에 매장 또는 봉안되어 있고, 지금도 매년 평균 6,500건의 장례가 진행된단다. 멀리 언덕 위쪽의 묘비들이 크고 좋아 보이는 것은 옛날에는 계급별로 매장 구역이 달랐기 때문으로, 초기에는 흑인과 남부군도 별도로 나눴지만, 지금은 그런 모든 구별은 당연히 없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묘지가 있어도 사람의 동상은 딱 2개밖에 없다는데, 그 중의 하나인 Sir John Dill 5성 장군의 기마상이다. 그는 영국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 지휘를 위해 워싱턴에서 근무하다가 사망해서, 국립성당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에 알링턴에 묻혔다고 한다.
최근에 여기 묻힌 사람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2020년에 사망한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의 묘비로, 육군에 복무했던 남편과 합장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RBG'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일생이 다큐멘터리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특히 참배객이 많은 것은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가장 유명한 묘지의 가까이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바로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빠지지 않고 들리는, 1963년 11월 22일에 텍사스에서 암살당한 제35대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대통령 묘소이다. 참고로 여기 매장된 역대 미국 대통령은 JFK를 포함해 딱 2명 뿐인데, 다른 한 명은 제27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로 여군 기념관 북쪽에 묘소가 있다. (언덕 위에 보이는 그리스 신전 스타일의 건물은 '알링턴 하우스'로 이 곳의 역사와 함께 별도 포스팅으로 소개할 예정)
중앙의 큰 석판 두 개에 JFK와 1994년에 합장된 그의 아내였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edy Onassis)의 이름이 적혀있고, 좌우의 작은 석판들은 1956년에 사산한 딸 Arabella와 1963년 8월에 태어나 이틀만에 죽은 아들 Patrick의 두 자녀를 함께 기리는 것이란다.
재클린의 아이디어로 급히 만들어져 암살 3일 후에 진행되었던 국장에서 그녀가 불을 붙였다는 '영원의 불꽃(Eternal Flame)'은 위치를 옮겨서 지금도 활활 타오르며 알링턴 국립묘지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 무덤은 약간 위쪽의 언덕에 작게 만들어졌었는데, 전세계에 생중계가 되었던 그의 장례식 이후에 매일 수 만명의 참배객들이 다녀가는 바람에, 4년 후인 1967년에 현재의 넓은 장소로 이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60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옛날에 알링턴을 포함한 미국의 국립묘지들은, 유족들이 고향에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고 묘소를 관리할 수 없는 경우에, 국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선택하는 장소로 여겨졌단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여기 묻힌 이후로는 명예로운 장지로 인식이 바뀌었고, 매장이나 이장을 원하는 신청자가 폭증을 해서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 알링턴하우스를 구경한 후에 찾아온 곳은 추모극장(Momorial Amphitheater)인데, 여기 바로 서쪽에 있는 우주왕복선 챌린저와 컬럼비아 사고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를 예습을 해놓고는 까먹어서 방문하지 못했던게 아쉽다~
1920년에 만들어진 이 야외 원형극장은 알링턴 국립묘지의 주요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특히 동쪽 무대의 뒷편에 있는 '무명용사의 묘(Tomb of the Unknown Soldier)'에서 여름철에는 30분마다 보초병 교대식이 열리는 것을 보기 위해서 왔는데, 시계가 11시반이 넘어가고 있어서 급하게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가장 대표적인 장면인 장총을 든 두 명의 보초병을 좌우에 세워두고 지휘관이 가운데 서있는 모습을 계단과 난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 어깨 너머로 잠깐 볼 수 있었다.
이 군인들은 국립묘지를 관리하는 포트마이어(Fort Myer)에 주둔한 3rd U.S. Infantry Regiment 소속으로, 그 부대는 흔히 '올드가드(Old Guard)'로 불린다. 그들 중에서도 여기 보초병으로 선발되는 것은 최고의 명예로 여겨지는데, 신체 조건이나 동작 테스트는 당연하고 보초를 서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듯한 국립묘지의 역사와 수 많은 묘소의 위치를 묻는 필기시험도 통과를 해야 한단다.
교대식이 다 끝나고 저렇게 혼자 남은 병사가 무명용사묘를 지키는데, 국립묘지가 방문객들을 받는 동안에는 한쪽에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좌우로 왔다갔다 한다. (문을 닫은 후에는 2시간마다 교대를 한다는데, 아마도 왼편에 만들어 놓은 초소 안에 그냥 서있을 것 같음)
모자 위에 가득찬 물컵을 올려놓아도 물 한방울 안 떨어질 듯이 부드러우면서도 절도있게 걷는 것을 좀 구경했다. 찾아보니까 21초간 정면을 응시한 후에 이동방향으로 틀어서 또 21초간 정지, 그리고 정확히 21걸음으로 반대방향으로 이동 후에 다시 정면으로 방향 전환을 계속 반복한다고 한다. 아마도 바지 주머니에 진동 타이머를 넣어둔 것이 아닐까? ㅎㅎ
유럽의 여러 왕궁 등에서 행해지는 화려한 근위병 교대식에 비해서는 아주 단촐한 볼거리였지만,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했다면 반드시 직접 봐야할 의미있고 엄숙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24시간 지키는 석관 아래에는 실제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의 유해 3구가 잠들어 있단다. (1984년에 베트남전 미확인 유해도 추가했었는데, 나중에 DNA 분석으로 신원이 밝혀져서 고향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고 함)
이 정도로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수 많은 묘비들 너머로 강건너 DC의 워싱턴 기념비가 뾰족하게 솟아있는 것이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가끔 외국 정상이 알링턴 국립묘지를 공식방문해서 무명용사묘 등에 헌화하는 사진은 본 듯 한데, 미국 정치인이 새해를 맞거나 새로 어떤 자리에 뽑혔다고 여기를 오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나중에 혹시 한국에 오래 머무를 기회가 오게 된다면 동작동 국립묘지, 국립서울현충원도 한 번 방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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