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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1월 25일 |
▶ 1519 선비의 화 / 대전시립박물관
대전시립박물관의 2018 특별기획전이 지난해 12월 7일부터 시작됐습니다.
'1519 선비의 화. 김정과 그의 조선' 전시가 3월 31일까지입니다.
1519년(중종 14년)은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들이 숙청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해입니다. 바로 500 년 전 일인데요. 기묘사화의 결과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갔다가 한달만에 사사되고, 김정(金淨) ·기준 ·한충 ·김식 등도 귀양갔다가 훗날 사사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충암 김정 선생을 집중 조명했는데요. 충암선생이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1519 선비의 화 / 대전시립박물관
인물사전에 의하면 김정 선생은 1486년(성종 17년) 충북 보은 출신입니다.
연산군 10년(150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어 홍문관수찬·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에 전임되고, 다시 홍문관교리 · 이조정랑 등을 거쳐 중종 9년(1514)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제수되었는데요.
순창군수로 재직하던 중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일찍이 중종이 왕후신씨(愼氏)를 폐출한 처사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를 복위시키고 아울러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하라고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가 권신들의 반발을 사서 보은(報恩)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먼저 근정전 내외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조선의 통치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과 왕권, 왕조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근정전 외관(위)과 내부
다음에는, 충암 김정선생이 살았던 시기의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삶을 대비해 만든 연보가 전시돼 있습니다.
김정선생은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할머니 황씨부인으로부터 3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해 6살 때 처음으로 시를 짓는 등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왔다고 해요.
"1519 선비의 화. 김정과 그의 조선" 전시는 프롤로그 → 충암 김정과 그의 시대 → 경국대전과 조선 → 기묘사화 이전의 사화 → 중종반정과 김정의 출사 → 교착된 정국과 김정의 '폐비 신씨 복위 주청 상소' → 김정의 화려한 복귀와 조광조와의 만남 → 김정의 좌절된 개혁, 기묘사화의 발생 → 김정의 복권과 그의 흔적들 → 에필로그 순으로 진행됩니다.
전시물들을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 조선왕조의 개국에서부터 김정선생이 살았던 성종, 연산군, 중종 왕조까지 정치적 변화와 함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기묘사화까지의 역사, 김정선생의 역사관과 행적 등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갑자사화와, 연산군을 소재로한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
김정선생은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새롭게 옹립된 중종 2년(1507)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된 후, 홍문관수찬·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에 전임되고, 다시 홍문관교리 · 이조정랑 등을 거쳐 중종 9년(1514년)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제수되었습니다.
순창군수로 재직하던 중,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류옥(柳沃)과 함께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신씨를 왕비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로 하는데요. 이들이 관직을 내려놓을 각오로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을 '삼인대(三印臺)라고 했고, 1744년(영조 20) 4월에 비가 세워집니다.
순창 삼인대비 탁본
하지만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하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상소는, 단순히 폐위된 신씨의 복위 요구에서 나아가 중종반정으로 인한 공신록의 남발, 국왕의 무기력함에 대한 일갈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반정공신들로부터 반발을 사 결국 충북 보은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폐비신씨 복위 상소를 결의한 강천산 삼인대
당시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치죄할 것을 주장했지만,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치죄를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는 이에 더해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기도 했습니다.
개혁의 파트너, 김정과 조광조
얼마 뒤에 조광조 등의 주청으로 박상과 함께 재등용되고 권민수와 이행이 파직됐는데, 이는 곧 중앙정계에서 사림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사예(司藝)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습니다.
1519년 기묘사화의 발발로 극형에 처해질 뻔 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명과 함께 사사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충암 김정 선생의 질풍같은 삶과 죽음인데요. 조선시대 왕과 신하 간 파워게임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연구자 인터뷰 영상
이후 1545년(인종 1)에 복관(復官)되고, 1646년(인조 24)에 영의정이 추증되었습니다.
충암 김정 선생은 시문은 물론 그림도 잘 그렸는데, 특히 화조를 잘 그려 조선 중기에 유행한 소경수묵사의 (小景水墨寫意) 화풍의 전통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저서로는 『충암집』·『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등이 있는데요. 제주에 유배돼 있는 동안 조카로부터 제주와 풍토, 물산 등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을 편지로 써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제주풍토록'입니다.
김정선생의 신동의 면모를 보여주는 저서 '십일잠'
2018 한국문화전2 「1519 선비의 화 - 김정과 그의 조선」
전시기간 :2018-12-07 ~ 2019-03-31
관람시간 : 동절기(11~2월) : 10:00~18:00 / 하절기(3~10월) : 10:00~19: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당일, 기타 박물관장이 지정한 날
※ 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박물관 개관 후 익일 휴관
전시장소 :대전시립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2
관 람 료 : 무 료
관람문의 : 042-270-8600
▶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 / 충암 김정선생 생가와 묘소 일원
'1519 선비의 화. 김정과 그의 조선' 전시는 마지막으로, 김정선생 생가와 묘소일원을 보여주는 동영상으로 맺고 있습니다.
김정선생 생가와 묘소 일원은 1991년 7월 10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 인근 (대전시 동구 회남로117)의 '김정의 묘'는 원래 충청남도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 있었는데요. 1978년 대청댐 공사로 그 곳이 수몰되게 되자 이 곳으로 옮겨기면서 그 부속 건조물도 함께 옮겨 왔습니다.
김정선생 생가와 묘소 일원 / '1519 선비의 화' 전시물 중에서
김정선생과 그 부인을 합장한 묘소, 두 분 위패를 모신 사당, 1641년(인조 19)에 세워진 신도비와 김정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별묘, 제향을 올리는 사당인 산해당, 그리고 그의 부인인 은진송씨 정려각 등이 있는데요. 이 건조물들은 조선 후기의 건축기법으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충암김정선생 생가 입구 솟을삼문
김정선생 생가 내삼문
산해당
이곳에는 김정선생의 17대 종손인 김응일선생 가족이 살고 있는데요. '산해당' 현판은 이곳으로 이전할 당시 출토된 김정선생의 관뚜껑을 사용해 만든 것입니다.
저는 지난 여름 이곳을 찾아 김응일선생으로부터 김정선생의 생애와 충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산해당 현판
생가 위쪽으로는 김정선생 부부 뵤소와 그 16대 손까지의 묘역이 조성돼 있습니다.
이곳은 불천위 종가(不遷位 宗家)입니다.
원래 사대부 집안에서는 4대까지 방안제사로 모시고 5대 이상부터는 사당에 모셨던 신주를 무덤 앞으로 옮겨 묻은 후 시제로만 모시게 돼 있었는데요. 불천위는 국가에 큰 공이 있거나 학식과 덕이 있는 분에 한해 임금이 "영원히 방안제사로 모시라"고 승인을 해준 경우를 말합니다.
조선조에 불천위를 받은 문중은 전국적으로 약 300 여 문중이지만, 현재까지도 불천위 제사를 예법대로 모시는 문중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대전에서는 우암송시열 가문이 또다른 불천위 가문입니다. 그만큼 충암선생의 충절을 높이 산 정조대왕이 불천위를 윤허한 것이지요.
충암 김정 선생 묘
김정선생 묘역에서 본 생가
그리고 책으로 출판된 '국역 충암집'도 보았는데요.
충암집은 원래 5권 1책으로 초간본은 명종(明宗) 7년(1552) 김천우(金天宇) 등이 간행하였고, 중간본은 인조(仁祖) 14년(1636)에 간행되었으며, 세 번째의 것은 1972년에 그 후손들이 간행하였다고 합니다. 초간본과 중간본은 현재 대전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일부만 보았는데도, 그림이 정말 예뻤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시·서·화에 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전은 그야말로 충·효·예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절을 지킨 사육신 중의 한 분 박팽년 선생이 회덕 출신이고, 충암 김정선생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선생이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했습니다.
'2019 대전방문의 해'를 맞아 우리고장의 인물인 충암 김정 선생의 생애를 따라가 보면서 그의 우국충절을 기려 보세요.
2019 대전광역시소셜미디어기자 조강숙 By
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1월 17일 |
"매서운 눈을 가진 매를 매만져 보니까 아주 매끄러워요."겨울방학을 맞아 평소에는 보기 힘든 매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현장이 있습니다.대전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열리는 겨울방학 무형문화 놀이학교 '매사냥 체험' 시간이에요.
1월 15일 오후 2시부터 대전무형문화재전수회관 공연장에서, 30여 명의 초등학생을 포함한 가족들을 대상으로 첫시간이 진행됐습니다.시작 전 대전무형문화재 제8호 매사냥 보유자 박용순 응사가 4마리의 매와 함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 사냥매인데 크기도 색깔도 다 각각이에요.
요즘 박용순 응사는 주말이면 한국민속촌 겨울축제 '설원의 사냥꾼 - 매사냥' 코너를 통해 방문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근황을 전합니다.
위) 참매 중 보라매(왼쪽)와 수지니. 아래)해리스, 황조롱이
이날 매사냥 체험에 앞서, 대전무형문화재전수회관 강은주 선생님이 대전무형문화재 매사냥에 대해 설명했는데요. 매사냥은 지난 2000년에 대전무형문화재 제8호로, 박용순응사가 보유자로 지정이 됐다고요.
우리나라 매사냥은 고조선 때부터 4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는데요. 2010년에 우리나라와 아랍에미리트, 벨기에, 체코, 프랑스, 모로코, 카타르,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스페인, 몽골 등 11개국 공동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이어서 영국 BBC 채널에 방송된 'SOUTH KOREA EARTH'S HIDDEN WILDERNESS' 중 박용순 응사가 출연한 매사냥 부분과, 국내 방송국에서 상영됐던 또 다른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다음에는 박용순 응사가 나와서 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요.
매의 이름표인 시치미를 보여주며 '시치미를 뗀다'고 하는 말의 유래가 매의 이름표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또 매만지다, 매끄럽다, 매몰차다, 매섭다, 매달리다 등이 모두 매에서부터 파생된 말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됐네요.
이야기를 듣던 어린이들은 시치미에 왜 방울을 달았느냐, 훈련된 매가 날아가 버리지는 않느냐 등의 질문을 하며 호기심을 나타냈습니다.
이어서 기다리던 매의 비행시범이 있었는데요.
이날 프로그램은 전수회관 앞마당에서 하려던 것을 미세먼지가 심해 실내인 공연장으로 옮겼는데, 박용순 응사님의 부름에 객석 뒤에서부터 무대까지 단숨에 날아가거나, 바닥에서부터 수직으로 날아오르는 수지니 매의 모습을 보며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답니다.그리고 하일라이트는 역시, 참가자들의 두꺼운 매장갑을 끼고 팔 위에 매를 앉혀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린이들은 자그마한 황조롱이를, 고학년과 어른들은 몸무게 1Kg 가량의 수지니 참매를 팔 위에 앉혔습니다. 매가 날개를 푸드덕거려 처음에는 다소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곧 흡족한 표정이 되곤 했는데요. 함께 참가한 부모님들이 더 즐거워 했어요.
매사냥 체험을 마치고 참가자들은 교육실로 자리를 옮겨 종이공예로 황조롱이 만들기를 했습니다.
작년까지는 시치미 만들기를 했었는데, 이번 시간부터는 조금 난이도가 있는 페이퍼 크래프트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만, 어린이 혼자 만들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어요.
함께 참가한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만들기는 하는데, 모두 어려워 하네요. 결국은 집에 가지고 가서 마저 완성하기로 합니다.
무형문화 놀이학교는 지난 2011년 '여름방학 전수체험학교'라는 제목으로 처음 시작됐는데요. 2014년부터는 무형문화 놀이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특히 매사냥 체험은 어린이 뿐 아니라 부모님도 함께 참여하는 인기 프로그램입니다.
매는 1982년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 천연기념물 제323-7호로 지정된 귀한 새입니다.
박용순 응사는 함부로 사냥을 해서는 안 되지만 귀중한 무형문화재로 보존해야 할 매사냥을 위해서만 야생매를 포획해 길들이고 있고, 사냥매로서의 역할이 끝나면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낸다고 합니다.
2019 대전광역시 소셜미디어기자 조강숙 By
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1월 15일 |
"쳐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40 여 년간 전국각지, 아니 전세계를 돌며 수집한 장구를 전시하는 고당 한기복 선생이 말합니다.
'전통타악그룹 굿'의 대표인 한기복 선생은 평생 모아온 장구와 북 등의 악기를 한 곳에 모은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요. 지난 1월 2일 중구 대흥동 고당마당에서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를 거슬러 만나는 - 장구이야기展'이 개막했습니다.
개막이라고 말하기에 전시실은 다소 협소하고, 일반적인 전시회에서 흔히 보는 유리장 하나 없지만 전시품들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귀한 것들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한기복선생이 40년 전부터 사용하거나 수집한 작품, 기증 받은 작품, 재현 작품 150 여 점을 선보이고요. 장구와 북, 기타 전통악기와 국악용품 300여 점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저는 전시 이틀 째인 3일 오후에 관람했는데요.
마침 대학에서 판소리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과 같이 하게 됐어요. 이 학생들은 즉석에서 합창으로 '풍구타령'을 들려줬는데요. 한기복 선생은 즉석에서 장구로 장단을 맞춰줬습니다. 짧지만 공연을 보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전시에서 만난 악기들은 저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아주 귀한 것들이었습니다.
평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잘 보관하고 있던 악기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한 곳에 모아 놓으니 그 양이 방대합니다. 전시실이 협소한 것이 아쉽습니다.
울림통이 도자기인 장구들
장구는 원래 울림통의 가운데가 잘록하게 생겼죠. 1500년 전인 삼국시대에 '허리가 잘록해'라는 의미로 요고라고 불렸던 것도 있습니다. 고려시대 도자기 장구, 조선 숙종 때 쯤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구의 모양은 저마다 크기와 색깔이 다 다릅니다.
삼국시대 요고 (복원품)
전시품 중 특히 요고는, 지난 2000년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장구를 실측한 것인데요. 몸통 길이 42㎝에 지름 16㎝, 길이 58㎝로 재현한 장구라고 합니다. 요즘 사용하는 장구보다는 조금 작습니다.
전시된 북에서 세월의 풍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각종 북
장구 중에는 '악학궤범 장구'라고 이름 붙인 것이 있었는데요.
우연한 기회에 손에 넣은 장구로서, 악학궤범에 기록된 장구와 모양과 크기가 일치해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장구와 북 외에도 징과 운라, 꽹과리, 바라 등 전통 타악기와, 아쟁, 거문고 등 현악기, 외국에서 수집한 젬베, 퍼쿠션 등의 악기도 있습니다.
징과 운라
아쟁 가야금 거문고
또 전통농악에 사용하던 상모와, 짚으로 엮은 장구 등 모든 것이 신기했어요.
인도, 네팔 등 외국의 타악기도 모양과 크기가 조금식 다르기는 하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수집한 악기들
전시된 악기가 대부분 타악기인데, 악기만큼이나 다양한 연주용 채들도 신기했습니다.
장구채나 북채, 꽹과리 채 외에도 모양만으로는 어떤 악기를 연주하는 채인지 잘 모르겠는 것도 있었어요.
각종 타악기를 연주하는 채. 모양도 크기도 다양하다.
또 하나 눈길을 끈 악기는 고생창연한 풍금이었습니다.
딱 봐도 일제시대의 것으로 보였는데요. 한기복선생은 풍금 케이스에 새겨진 문양이나 글씨 등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때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대청호오백리길 황새바위에서 연주하는 한기복선생
장구와 북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고당국악사), 언젠가 우리나라 최초의 '장구박물관'을 세우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고당 한기복 선생. 평생의 '장구사랑 이야기'는 조만간 다시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당마당은 주소를 알아도 찾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중구 대흥동 우리들공원 인근 골목에 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전에 전화로 문의를 하고 기왕이면 한기복선생으로부터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에 꼭 한번 관람을 권합니다.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를 거슬러 만나는 - 장구이야기展
전시일시 : 2019. 1. 2 ∼23(수)
전시장소 : 고당마당(고당국악사)
대전광역시 중구 중앙로122번길 17 (대림 BD 7층)
관 람 료 : 무 료
관람문의 : 042-226-5658
2019 대전광역시 소셜미디어기자 조강숙 By
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8년 12월 28일 |
12월 27일. 옛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테미오래' 개관행사가 있었습니다. 영하 10℃ 안팎의 한파에도 많은 시민들이 참여를 했는데요. 특히 관사촌 인근 대흥동 주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석을 했습니다.
개관식 행사는 허태정 대전시장과 문화예술인, 지역주민 등이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테미오래 개관 테이프 커팅
이어서 도지사 공간 대문 안 마당에 박을 엎어놓고 발로 밟아 깨는 '박깨기'를 했습니다. 박을 힘차게 밟아 깨면, 그 소리에 귀신이 도망을 간다고 하는데요. 보통 새집으로 이사를 할 때 많이 행하던 풍습입니다. 테미오래가 앞으로 잘 운영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겠지요.
박깨기
그리고 참석자들은 옛 충남도지사공관을 둘러보았는데요. 외관은 예전에 비해 창틀을 새로 교체하고, 내부 안내판 등이 정비가 되었을 뿐 대부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옛 도지사공관을 둘러보는 개관식 참석자들
옛 충남 도지사공관
옛 충남도지사공관 내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옛 충남도지사공관 2층 회의실. 앞으로 회의 및 세미나실로 쓰인다
'테미오래'는 지역의 옛명칭인 테미로 '오라'는 뜻과, 테미와 관사촌의 오랜 역사라는 두가지 의미를 담은 명칭입니다.
전국에서 유일한 관사촌으로 1932년도에 조성됐는데요. 충청남도가 홍성으로 이전한 후 대전시에서 매입해 시민을 위한 문화예술 힐링공간으로 조성한 겁니다.
개관식에서는 테미오래를 맡아 운영할 (사)대전마을기업연합회로부터 운영에 대한 계획 등 브리핑을 받았는데요.
앞으로 옛 충남도지사 공관은 전시실과 세미나실, 아카이브실, 문화정원 등으로 쓰인다고 해요. 그리고 2, 4, 5, 6호 관사는 근대건축전시관과 도서관, 시민 및 작가의 공방으로, 3호관사는 지원센터와 아트숍, 마을 사랑방으로, 7~10호 관사는 지역 및 해외작가 레지던스와 청년 공유공간 등으로 활용된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개관행사가 끝나고, 공관 바로 앞에 있는 1호관사에 들러 봤어요.
'테미오래 관사촌 아트빌리지 계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1호관사
이 전시회를 통해 테미오래가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 지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1호관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테미오래가 어떻게 조성될지를 보여주는 전시자료
내년 1월부터는 도지사공관과 1호관사를 중심으로 일반시민에게 개방하고, 4월에는 벚꽃축제와 연계한 '개관 축하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2018 대전광역시소셜미디어기자 조강숙 zoomtr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