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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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근처 구워주는 삼겹살 전문점 대통령

동대문근처 구워주는 삼겹살 전문점 대통령

삼겹살 전문점 대통령 매일 11:40am-11pm 길 찾기가 어려운 느낌이 있긴 하지만 서울의 3대 삼겹살이라고 해서 찾아간 대통령 가다보니 비슷한 삼겹살 전문점이 매우 많음 주의! 자리가 날 때까지 좀 기다려야했지만 나름 괜찮았음 bts컴백날이라 양 옆이 일본인이었고..ㅎㅎ 고기는 구워주는데 맛있게 잘 구워주는 편이었음 주문도 바로바로 받아가고 빠릿빠릿했음 가격도 1인 2만원으로 구워주는거 생각하면 비싸지 않았던거로 기억

50달러 지폐 모델인 제18대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의 묘역인 제너럴그랜트(General Grant) 국립기념관

현재 미국에서 통용되는 지폐는 7종으로, 시중에서 쉽게 보기 어려워 따로 소개한 적도 있는 2달러 지폐를 제외하면, 유통량이 가장 적은게 10달러와 50달러이다. (원래 50달러가 훨씬 적었지만, 코로나 이후 인쇄를 많이 해서 비슷해졌음) 직전에 10달러의 모델인 해밀턴 기념관을 방문했었고, 거기서 불과 차로 5분 거리에 이제 보여드리는 장소가 있다.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가 그려진 50달러 지폐의 모습과 함께 그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는 워싱턴DC의 내셔널몰 동쪽 끝에 있는 그의 기념상을 방문했던 포스팅을 먼저 보시면 된다. 네비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건물의 뒷편이 보여서 길가에 주차를 했는데, 맨하탄의 북쪽에서 허드슨 강변공원(Riverside Park)이 시작되는 위치에 Riverside Dr 도로의 중앙분리대에 해당하는 지역에 기념관을 만든 것이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그런데, 반듯한 화강암 건물의 둘레를 따라서 뭔가 울긋불긋하고 구불구불한 것이 보이는게 신기해서 뒤쪽 계단을 먼저 올라가 봤다. 모자이크 롤링벤치(Mosaic Rolling Bench)는 직접적으로 바르셀로나 구엘 공원에서 영감을 받은 공공예술 작품으로 1972년에 기념관 둘레를 따라 총 길이 약 400피트로 추가되었다. 그러나 묘역의 엄숙한 건축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아서 1990년대에 철거가 결정되었다가 지역 주민과 예술가들의 반발로 겨우 보존이 되었다고 하는데... "공원에 다른 널직한 곳도 많은데, 애초에 왜 굳이 기념관 위에 만들었을까?" (거기에도 다 이유가 있었지만, 혹시 물어보시면 알려드림^^) 국립공원청에서 모퉁이에 세워 놓은 작은 간판에 이 곳의 이름 위쪽에다가 'Manhattan Sites'라 복수형으로 더 커다랗게 써놓은게 의아해서 찾아본 내용은 아래에 별도 지도와 함께 설명을 드린다. 뉴욕시에 위치한 넓은 의미의 국립 공원들 11곳을 보여주는 지도로 ⑥과 ⑪을 제외한 9곳을 '맨하탄 사이트'로 묶어서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⑥번 Tenement Museum은 사설 재단이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방문객이 압도적으로 많은 ⑪번 자유의 여신상과 엘리스 섬은 별도 관리) 이 날 ②와 ③을 차례로 찍었으니, 멀리 브롱스(Bronx)에 떨어져 있는 ①번 St. Paul's Church NHS 하나만 빼고는 모두 방문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위 지도의 남쪽으로 뉴욕항을 감싸는 넓은 유닛이 하나 더 있어 총 12개인데, 그 곳은 바로 다음날에 역시 찾아가게 된다. 잠깐 시선을 돌리니 다른 듯 비슷한 느낌의 높은 건물 둘이 보였는데, 왼편은 41층의 현대식 콘도이고 오른편은 록펠러 가문의 기부금으로 1933년에 완공된 리버사이드 처치(Riverside Church)로 진보적 사회참여로 유명한 교회란다. 그리고 잘 보이지는 않지만 두 건물 너머로 10년전의 아이비리그(Ivy League) 탐방 여행에서 주차할 곳을 못 찾아 정문 사진만 찍고 지나쳤던 컬럼비아 대학교의 본관이 있으며, 그 캠퍼스를 포함한 맨하탄의 이 구역을 인접한 할렘과는 별도로 모닝사이드 하이츠(Morningside Heights)라 부른다. 그랜트는 당시까지는 최연소 기록인 만 46세로 대통령이 되었고, 퇴임 후에는 아내와 함께 2년간 세계일주를 하며 세계적인 영웅으로 환대를 받았다. 그 후 1880년 대선에서 3선에 도전하려 했으나 공화당 내 경선에서 제임스 가필드(James A. Garfield)에게 패했고, 사기 사건에 휘말려 전재산을 잃은 후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에 후두암에 걸려서 1885년에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오하이오(Ohio) 출신 7명의 대통령들중의 하나지만, 퇴임 후 살았던 뉴욕시에 묻히기를 아내가 희망해서 여기 '그랜트의 묘(Grant's Tomb)'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시민들의 성금으로 5년간의 공사끝에 1897년에 성대하게 치러진 봉헌식과 그의 일생 등에 관해서 더 궁금하신 분은 위의 사진을 클릭해서, 국립공원청 홈페이지의 공식 영상을 자막과 함께 보시면 된다. 영묘(靈廟, Mausoleum)의 지붕을 둥근 돔이 아니라 계단식 원뿔 형태로 만든게 상당히 특이한 모습인데, 건축가가 고대의 기념비적 무덤들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서 마침내 공원 간판을 찾았는데, 그랜트가 제7대 잭슨 이후로 무려 40년만에 8년 연임을 하며 남부 재건과 민권 보호 등의 업적이 상당한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북군 총사령관으로 남북전쟁을 끝낸 '장군'으로만 기억되어서 그런지... 이 곳의 공식 명칭도 제너럴그랜트 내셔널메모리얼(General Grant National Memorial)이다. 이제 정면을 향해서 다가가는데 드르륵 우당탕 소리가 들려서 뭔가 했더니... 정면 광장에는 'No Skateboarding' 표지판 아래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형씨들이 모여 있었고, 셧다운으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어서 더 가까이 가서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표사진도 당시 분위기를 잘 남기려고 일부러 스케이트보더가 지나가는 순간으로 잡았다.^^ 높이 45미터인 북미 최대 규모의 영묘로 지하층에 부부의 석관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 실내는 수~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자유롭게 개방이 되며, 겨울철에는 방문객이 적어서 시간 단위로 입장이 제한될 수 있단다. 입구 위에는 위기주부가 재작년에 직접 방문했던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Appomattox Court House)에서 항복하는 남군의 리(Lee) 장군에게 그랜트가 했다는 유명한 말인 "Let Us Have Peace"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문구는 그의 1868년 대선에서 캠페인 표어로도 사용되었다. 왼편의 두 명은 전문적인 장비까지 갖추고 스케이트보딩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기념관을 돌아보는 척하며 형씨들을 찍는 위기주부를 모두 노려보는 느낌이 들어서 서둘러 자리를 떴다.ㅎㅎ 비지터센터가 강변도로 건너 만들어져 있었지만 당연히 굳게 잠겨 있어서 바로 차를 몰고 맨하탄 남쪽 딸의 아파트로 향했다. 신호대기를 받았을 때 왼편으로 허드슨 야드(Hudson Yard)의 고층 빌딩들이 보여서 사진을 찍었다. 2019년초에 화려하게 개장했으나 4건의 자살 사고로 무기한 폐쇄되었다가, 결국은 2024년말에 추락을 방지하는 가느다란 철망으로 완전히 둘러싸서 재개장을 한 '베슬(Vessel)'도 신호등 아래로 살짝 보인다. 딸과 만나서 집열쇠를 받고 한국에 가있던 아내에게 둘이 만난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토요일 밤의 외출을 앞둔 따님은 블링블링하고 이틀째 쓸데없는 곳들 돌아다니느라 강행군을 한 위기주부는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다~^^ 저녁이 되니까 북쪽 베란다 너머로 멀리 크라이슬러 빌딩 등의 미드타운 고층건물들에 조명이 들어온 것이 보여서 줌으로 당겨봤고, 히터를 켜는 것을 깜박하고 잠들어서 밤새 오들오들 떨었던, 그러면서도 일어나서 찾아보고 켜기는 귀찮았던 기억이 나는 밤이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제32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각각 기념하는 두 곳의 국립사적지

미국은 1951년 2월에 수정헌법 제22조를 비준해서 한 개인이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있는 최대 횟수를 2회로 제한하게 된다. 이와 같은 개헌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1932년부터 1944년까지 4번의 대선에 연달아 출마해 모두 당선되었던 제32대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FDR) 때문이다. 그의 미완성 4번의 대통령 임기에 대해서는 워싱턴DC에 있는 기념물 방문기에서 간단히 설명드렸었고, 이번에는 지난 가을의 북부 뉴욕주 2박3일 여행에서 그가 태어나고 또 죽어서 묻혀있는 'FDR의 집'을 찾아간 이야기이다. 허드슨 강을 따라 올버니와 뉴욕시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하이드파크(Hyde Park) 지역의 9번 국도변에 있는 커다란 간판이다. 국립공원청 로고 옆에 써진 것을 보면 공식명칭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집 국립사적지(Home of Franklin D. Roosevelt National Historic Site)로 왠지 '집(home)'이란 단어를 제일 앞에 써서 특히 강조한 느낌이다. 방문했을 때처럼 단풍이 든 국립 공원의 전체 조감도와 함께 하이드파크 부근 지도를 우측에 작게 보여주고 있는데, 3년전에 아내와 함께 보스턴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내부 투어까지 했던 밴더빌트 맨션(Vanderbilt Mansion) 국립사적지가 마을 위쪽에 표시되어 있고, 이 공원의 영역도 9번 국도를 건너 동쪽으로 길게 뻗어있음을 볼 수 있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두 연방기관의 로고가 함께 그려진 공동 비지터센터는 2003년에 새로 만들어졌는데, FDR의 처음 8년 동안은 농무부 장관을, 그리고 3번째 임기에서 4년간 부통령을 역임했던 헨리 월리스(Henry A. Wallace)를 기려 명명되었다. 그러나 4번째 대선에서 월리스를 버리고 대신에 트루먼을 러닝메이트로 바꿨는데, 월리스가 너무 급진적인 진보주의자였기 때문이란다. 그래 놓고는 1945년 1월에 4번째 임기를 시작하고 불과 82일만에... 당시 셧다운으로 모든 건물은 잠겨 있었기 때문에 바로 발길을 옮기니 꾸준히 관리를 해온 흔적이 보이는 텃밭이 나왔다. FDR의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가 1867년에 여기 110에이커의 대지에 농장과 목장이 딸린 목조 저택을 구매해 '스프링우드(Springwood)'라 이름 붙였고, 1882년 1월 30일에 그 집 남동쪽의 2층방에서 늦둥이 프랭클린이 태어났다. 텃밭 맞은편의 커다란 건물은 집이 아니고 Franklin D. Roosevelt Presidential Library & Museum으로 1941년 6월에 개관한 미국 최초의 대통령 도서관이다. 그는 두번째 임기 말미에 고향 땅에 직접 이 시설을 짓기 시작했는데, 3선에 성공하면서 현직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되기도 한 특별한 이력을 가지게 되었단다. 국가기록원(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역시 문을 닫아 뒷마당의 조각정원만 잠깐 구경했는데, FDR과 마주보고 있는 흉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방세계를 함께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 영국총리이다. 베를린 장벽을 남녀의 모양으로 잘라낸 조각은 처칠 손녀의 작품으로, 이 부분이 잘려나간 장벽은 미주리주 풀턴(Fulton)에 있는 미국 국립 처칠 박물관(America's National Churchill Museum)에 전시되어서 두 사람의 우애를 상징한다. 1946년 3월에 처칠이 미국을 방문해서 그 도시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을 한 것을 기념해 박물관이 거기 만들어졌단다. FDR은 1945년 4월 12일, 조지아주 웜스프링스(Warm Springs)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뇌출혈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그는 소아마비가 재발한 하반신의 온천치료를 위해 1920년대부터 거기를 찾다가 아예 리조트를 사들여서 재단을 만들고 별장을 지어서 '리틀 화이트하우스(Little White House)'로 부르며 휴식을 위해 자주 방문했었다. 안내판 제일 오른쪽 아래 사진은 이듬해에 처칠이 여기 묘역을 방문해서 조화를 놓는 장면이다. 장미정원 안에 묘지가 만들어져 있는데, 당시에는 셧다운 때문에 관리자가 없어서 그런지 철조망으로 막혀 있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커다란 흰 대리석은 1962년에 사망한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이름도 추가되어 공동묘비 역할을 하고, 오른편으로 보이는 작은 기둥 아래에는 애완견 팔라(Fala)도 묻혀있다. 이렇게 부부가 애완견과 함께 영원히 같은 자리에 잠들어 있으나, FDR의 임종을 지켰던 팔라와 다른 한 명은 영부인이 아니라 그가 불륜을 저질렀던 상대인 오랜 연인 루시 머서(Lucy Mercer)였단다... 스프링우드 저택은 원래는 가운데 부분만 있는 평범한 2층집이었지만, FDR의 어머니 사라(Sara)의 주도로 대대적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웅장한 모습이 되었다. 시간을 되돌려 부부사를 좀 더 짚어보면... 둘은 1905년에 현직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조카딸을 소개해줘서 결혼했는데, 즉 부부가 따지자면 13촌의 아주 먼 친척이었다. 앞서 등장한 루시는 엘리너의 개인 비서로 FDR을 1914년에 처음 만났고, 1918년에 불륜을 알게된 엘리너는 이혼을 결심했지만 당시 해군성 차관으로 승승장구하던 FDR의 정치생명을 고려해, 결국 둘은 정치적 동반자의 관계만 유지하는 쪽으로 합의하고 불륜을 비밀로 지킨다~ 그러나 스프링우드 대저택의 실질적인 주인은 FDR의 어머니 사라였고, 그런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 엘리너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것을 알았기에, 1924년에 FDR은 집에서 3km 떨어진 자신의 사유지에 엘리너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땅을 내어주게 된다. 거기에 엘리너는 친구들과 함께 집을 짓고 지역 농민들에게 가구 제작과 금속 공예를 가르치는 공장도 만들게 되는데, 그 곳이 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발킬(Val-Kill)이다. 집의 뒤쪽에 있는 차고와 마굿간 건물 등을 포함해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데, 이는 FDR이 죽기 전에 미리 스프링우드 전체를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생전인 1944년에 일찌감치 국립사적지로 지정이 되었고, FDR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 엘리너는 바로 짐을 싸서 스프링우드를 떠났기 때문에, 서거 1주기에 맞춰서 일반에게 FDR이 사망한 날의 모습과 똑같이 공개될 수 있었단다. 온실과 농장 창고 건물을 스쳐지나 주차장으로 돌아가서, 이제 별도의 국립사적지로 지정이 된 엘리너 루스벨트의 거주지 '발킬'을 찾아간다. 공식명칭은 엘리너 루스벨트 국립사적지(Eleanor Roosevelt National Historic Site)이지만, 그녀가 생전에 이 곳을 부른 이름을 더 큼지막하게 적어 놓았다. 얼핏 섬뜩한 느낌의 발킬(Val-Kill)은 작년에 사망한 영화배우 발 킬머(Val Kilmer)와는 당연히 아무 관련이 없고...^^ 네덜란드어로 '계곡의 시냇물(Valley Stream)'이란 이쁜 뜻이란다. 같은 연유로 뉴욕주에는 '-kill'로 끝나는 지명이 많은데, 전설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렸던 뉴요커의 대표적 산악 휴양지인 캐츠킬(Catskill) 등이 그 예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그런데 여기는 진입로가 아예 잠겨있었다! 흑흑~ 사실 열려있었다고 해도 아래와 같은 시냇가의 '돌담집(Stone Cottage)' 사진만 후다닥 찍고 나와야만 했을 것이기는 하다. 그래서 짜투리로 소개하며 방문한 국립 공원 리스트에 추가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공원 간판만 직접 찍어놓고 방문했다고 우기는 경우는 글의 마지막에 역시 간판 사진만 등장하는 15년전 여행기의 이 곳 이후로 두번째이다.^^ 폴킬(Fall Kill) 개울에 비친 그녀의 돌답집에 살면서, 엘리너 루스벨트는 미국 최초의 유엔(UN) 대사로 임명되어 인권위원회 의장을 맡아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직접 작성했고, 미국내 시민권 운동과 여성지위 향상 등을 위해 적극 활동했다. 이러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77년에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별도의 국립사적지로 지정이 되었는데, 현재까지도 미국의 대통령 영부인 개인을 기리는 국립 공원으로는 유일한 장소이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날 '오케이(Okay, OK)'란 말을 쓰이게 만든 미국 대통령!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 국립사적지

영어권을 넘어 전세계에서 통용되며 한국에서는 'ㅇㅋ'로 쓰기도 하는 이 말은 1839년 3월 23일자 보스턴 지역신문에 최초로 등장했다. 당시 미국 식자층들 사이에서 표현을 발음대로 적은 다음에 이니셜로 약어를 만들어 자기들끼리만 아는 은어(隱語)를 쓰는게 유행이어서 '모두 맞다(all correct)'는 것을 Oll Korrect → O.K.로 표시했던 것이다. 이런 원리로 많은 약어가 등장해서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오케이(O.K.)'만 지금까지 살아 남아서 만국공통어가 된 것은 바로 이 사람 때문이다. 뉴욕 주도 올버니(Albany)에서 허드슨 강을 건너 남쪽으로 9번 국도를 따라 조금 내려오면 킨더훅(Kinderhook)이란 마을이 나오고, 거기서 옛날 샛길로 빠지면 바로 등장하는 마틴밴뷰런 국립사적지(Martin Van Buren National Historic Site)의 간판을 주차장에 내려서 돌아보고 찍었다. 그는 20달러 지폐의 모델인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의 부통령으로 재임하며 1836년 대선에서 승리해 미국의 제8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와 같이 선거를 통해 현직 부통령에서 차기 대통령이 바로 된 경우는 제41대 '아버지 부시(Father Bush)'와 함께 지금까지도 유이(有二)한 케이스란다. 1782년생인 마틴 밴뷰런(Martin Van Buren)은 미국 시민권자로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인 동시에 지금까지 유일하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술집을 운영한 네덜란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네덜란드어만 쓰며 자라다가, 독학으로 영어를 익혀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뉴욕주 상원의원과 검찰총장을 거쳐 주지사에 당선되고, 국무장관과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까지 거머쥔 말 그대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당시 연방정부 셧다운에 늦가을 낙엽까지 뒹굴어서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던 길을 따라서 비지터센터까지 일단 먼저 걸어가본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공원 브로셔라도 하나 챙기고 싶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고, 이제는 집의 바깥만 한바퀴 돌며 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할게 없었다. 빈약한 방문기를 보충하기 위해 홈페이지 내용을 살펴보다가, 첫 페이지에 레인저가 직접 만든 소개 영상이 올라와 있어서 아래 유튜브 링크를 띄운다. 의욕이 넘치는 젊은 국립공원청 직원이 그랜드캐년, 옐로스톤, 그레이트스모키같은 인기있는 국립공원이 아니라... 여기같은 썰렁한 국립사적지로 발령을 받으면 이런 영상을 직접 만들게 된다. "But we all know that the jewel in the crown of the National Park Service is..." 셧다운이 아니었으면 정해진 시간에 무료로 내부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었겠지만, 이 날의 빠듯했던 일정을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었을 수도...^^ 그는 대통령 재임 중이던 1839년에 이 집과 농장을 구입해서 독일어 '린덴발트(Lindenwald)'로 이름지었는데, 이듬해 재선에 실패하고 1841년에 이사와서 1862년에 79세로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특히 아깝게 탈락한 1844년의 민주당 경선과 직접 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을 만들어 출마했던 1848년 대선의 선거본부로 사용되기도 해서, 미국 정치사의 중요한 장소였던 이 집 거실의 사진이 안내판에 보인다. 특이한 타워를 포함한 집의 뒤쪽 부분은 1849-50년 동안에 증축된 것으로, 그 결과 모두 36개나 되는 방을 가진 대저택이 되어서, 4명의 아들 부부와 손주들 및 다수의 하인들이 모두 함께 거주하기도 했단다. 이 집도 그의 사후에 아들들이 매각해서 다른 소유자들을 거쳤지만 전체적인 골격은 유지되었고, 1974년에 국립사적지로 지정되며 연방정부가 인수해서 옛모습으로 내외부를 완전히 복원을 한 것이란다. 마틴 밴 뷰런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앤드루 잭슨과 함께 현재의 미국 민주당(Democratic Party)을 1828년에 창설했고, 오늘날 사용되는 현대적인 선거 캠페인의 기초를 닦은 정치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전략 덕분에 아군들은 '작은 마법사(The Little Magician)', 적군들은 '킨더후크의 붉은 여우(The Red Fox of Kinderhook)'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올드 킨더후크(Old Kinderhook)'라 불렀기에 1840년 재선 캠페인에서 지지자들이 지역마다 'OK 클럽'을 조직하고 슬로건으로 "Vote for OK"를 사용하며 그 단어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흐지부지 잊혀질 수도 있는 약어를 상대편이 네거티브 공세에 적극 활용하며 그 뜻을 모두에게 각인시켰는데, 잭슨과 밴뷰런이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스펠링을 'Oll Korrect'로 틀리게 쓴다거나, 위의 1840년 신문에 실린 휘그당이 만든 풍자 만화처럼 양쪽 진영이 모두 'OK'란 표기를 적극 활용했기에 오늘날 공용어로 살아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국 대통령사에서 또 하나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퇴임 후 21년 동안에 제16대 링컨까지 무려 8명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그 기간에 2명이 재임중 병사했고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아무도 없었기에 가능했다. (2024년말에 100세로 사망한 지미 카터는 퇴임 후 44년이나 생존한 기록을 가지지만 7명의 후임을 지켜봤는데, 그 중 4명이 재선했고 임기 중 사망자도 없었기 때문) 이제 계속해서 허드슨 강을 따라 남쪽으로 달려서 또 다른 뉴욕주 출신의, 이번에는 아주 유명한 대통령의 집을 또 찾아간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