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The Father (2020)
By 멧가비 | 2021년 8월 1일 |
사실 치매를 질병이로 분류하면 안 되는 거다. 뇌의 내구성이 따라주질 못 할 만큼 늘어난 수명을 가져버린 현대 인류가 감당해야 할, 주름 지고 머리 하얘지는 것처럼 고칠 수 없는 그저 노화의 일종일 뿐일 터. 기억 속 가장 크고 훌륭해 보였던 부모의 잔상, 내 나이가 그 때 쯤의 부모 나이와 비슷해지거나 역전할 때 쯤의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고민이기도 할 것이다. 안소니는 계속해서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호소한다. "시간"이라는 실체가 없는 무언가에 추상적이나마 개념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은 시간의 가늠이라는 행위를 발명하고, 기억과 기억 사이에 경계를 긋고 그 기억들을 보다 체계화해서 머릿 속에 수납하게 된 것이다. 시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기억들을 구분하고 정리할 이정표가 사라짐에 대한 은유일
걸어도 걸어도 歩いても 歩いても (2008)
By 멧가비 | 2021년 11월 8일 |
그 유명한 비트 타케시의 명언, "가족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 저 말은 가족을 다루는 영화를 볼 때 늘 떠오르고, 가족을 다루는 영화를 되새길 때 늘 인용하게 되고, 특히 일본의 가족을 다룬 영화와 관련해서는 결코 거를 수가 없다. 보통의 경우, 가족이란 완전히 해체되지 않는 어떠한 울타리이기에 오히려 영원히 상처를 주는 존재다. 타인에게서 들었더라면 별 거 아니었을 말로도 상처 받고 미워할 수 있게 되는 존재, 그것이 가족. 고레에다의 영화들에 혹간 그런 순간들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가족 모임을, 닥쳤으니까 억지로 해치워야 하는 예비군 소집 따위의 성가신 행사처럼 대하는 절묘한 리얼리티가 있다. 너무 사소하고 너무 일상적이라 내가 느끼는지도 모르는 그러한 감정을 이
인 디 에어 Up In The Air (2009)
By 멧가비 | 2021년 11월 9일 |
삶에도 해체주의라는 게 있다면 주인공 라이언 빙엄은 삶 해체업자 해체예술가 쯤이라 해도 되겠다. 직업은 회사와 직원의 관계를 끊어내는 역할, 자기 자신은 가족과 사실상 관계를 끊고 지낸지 오래다. 늘 좋은 영화니 좋은 책이니 하는 것들은 언제나 가족과 이웃과의 연결, 유대를 강조할 뿐 "필요한 해체" 혹은 "좋은 해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다. 빙엄의 직업은 필요한 해체이며 사생활은 좋은 해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지금은 더 이상 복작대는 가족주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동화같은 세상이 아니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아담의 원죄처럼 이제 현대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익숙해져야 하는 자아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그 외로움이라는 것을, 물리치거나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로 여기지 않으며 그렇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By 멧가비 | 2022년 10월 29일 |
큰 힘에 큰 책임을 지려는 거미 인간도 아니고 모든 멀티버스에서 위험인물로 지목 당한 마법사도 아닌, 에블린, 인생의 모든 선택의 순간에서 실패만을 경험한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또한 누군가의 아내인 자, 바로 에블린. 모두 똑같이 동그란 창문을 달고 있지만 그 안에는 모두 다른 빨래가 돌아가고 있는 빨래방 세탁기들처럼, 에블린은 모두 같은 에블린이지만 모두 다른 인생을 사는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빨래방 주인, 알파버스에서 점프해 온 알파 에드워드가 기대를 건 바로 그 "이쪽 에블린",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이유에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잔을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고 하는 진공묘유 철학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영화는 구태여 불가를 언급하며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