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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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립박물관 『검이불루(儉而不陋)-전통직물전(展)』개최

2019년 대전방문의 해를 맞아 대전시립박물관에서는 우리옷을 테마로 한 특별전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은 우리옷 : 검이불루(儉而不陋)-전통직물전(展)』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내년 2020년 6월 14일(일)까지 3층 특별 전시실에서 계속된느데요. 대전지역 세거성씨 묘 출토 복식의 직물을 통해 마직, 견직, 면직 등 직조의 역사를 살펴보고 다양한 직물의 복식유물과 길쌈 관련 유물을 통해 우리 의생활 역사의 한 단면을 재조명해 보고자 마련됐습니다. 전시기간 : 2019. 7. 10(수) ~ 2020. 6. 14(일) 개관시간 : 하절기(3월~10월) 10시 ~ 19시, 동절기(11월~2월) 10시 ~ 18시 관람료 : 무료 휴관일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 추석 명절 단체관람, 전시해설 예약이나 자세한 사항은 대전시립박물관 홈페이지( https://www.daejeon.go.kr/his/index.do ) 또는 전화 (042-270-8600~4)로 문의하면 됩니다. 7월 10일(수) 개막식에서 대전시립박물관 서포터즈 어린이 합창단의 축하공연이 있었습니다.처음 선보인 무대였다는데도 아름다운 하모니로 너무 잘해 주었습니다.  '다섯 글자 예쁜 말' 노래를 부르며 율동하는 어린 친구들의 모습이 귀엽고 예뻤어요. 기증, 기탁한 분, 해설사 및 많은 분들이 참석했는데요. 대전지역 전통직물의 역사와 직조방법을 그림, 영상, 유물 등 흥미로운 자료로  알 수 있었습니다. 또 방학을 맞이한 자녀들과 함께 직접 직조 체험도 할 수 있어 오랜 시간 전승된 우리나라 전통 직조의 역사성과 그 가치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덤에서 출토된 충주박씨, 용인이씨, 안정나씨, 여산송씨 등 대전에서 오랫동안 대대로 살아온 성씨 등의 전통복식 유물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전통복식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그동안 가치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대전지역 출토 복식을 재조명하고 우리 전통복식의 역사와 제직방법에 대해서도 쉽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씨실과 날실에서 삶을 엮어내듯 옷감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마치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얽혀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옷감을 짜고 옷을 만드는 일은 인류의 삶과 함께 했습니다. 이 옷감은 복식의 재료라는 기능을 뛰어넘어 교역물, 공납품, 계급 상징 등 경제적, 사회적 기능도 담당했습니다. 특별히 충남 무형문화재 1호인 한산세모시짜기 보유자의 전승품과 충남 무형문화재 25호인 청양춘포짜기 보유자가 실제 사용한 도구와 전승품, 지난해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특선작으로 선정된 춘포 등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럼 옷을 만드는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근대화와 함께 실을 뽑고 직물을 짜는 일이 기계화되면서, 민간에서 전통 방식으로 옷감을 짜고 옷감을 만들어 내는 일은 어느새 명맥이 끊어져 찾아보기 어려워졌죠. 그나마 전통 베틀로 제직되는 방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명의 원료인 '목화'와 명주의 원료인 '누에고치', 모시의 속껍질로 만든 '태모시', 솜을 정리하는 솜타기를 하고 누에고치를 햇볕에 말리거나 끓는 물에 삶아 한 가닥씩 이로 가늘게 쪼개 섬유의 굵기를 일정하게 하는 실잣기 준비과정을 글, 사진, 영상으로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가늘게 쪼개 한 올씩 빼어 양쪽 끝을 모아 무릎 위에서 손바닥으로 비벼 연결하여 만드는 실잣기와 베를 짜기 전 '베매기 솔'을 사용해 날실에 풀을 먹여 날실의 강도를 높이고, 매끄럽게 하는 베매기 과정을 글, 사진, 영상으로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베매기가 끝난 날실을 베틀에 걸고 날실과 씨실을 교차시켜 베를 만드는 '베짜기'와 옷을 짓기 전 천의 구김을 펴고 부드러운 광택과 촉감을 살리기 위해 옷감을 방망이로 두드려 다듬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면(緜)'자는 우리가 흔히 쓰는 '면(綿)'자의 고자(古字)이긴 하지만, 누에고치의 비단솜을 가리키는 경우로도 쓰며, 꼭 면직물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에 면이 다량으로 재배되고 있던 남방 지역과 교류했기때문에 직접 면이 재배되지는 않았다 해도 교역품으로 반입된 면섬유를 이용하여 우리의 섬세한 제직기술로 면직물을 제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16세기 안정나씨묘역 용인이씨묘에서 출토한 명주로 된 솜누비 장의입니다. 겉감은 쪽색명주이고 안감은 소색의 견면교직으로 짜였습니다.또 17세기 여산송씨묘역에서 출토된 솜저고리는 겉감이 아름다운 화문단이 사용됐습니다. (사진왼쪽) 15세기 말로 추정되는 여산송씨묘역과 송효상 묘역에서 출토된, 견면직으로 짜여있는 단령을 볼 수 있습니다. (사진오른쪽)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유물들이 조선전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복식문화를 보여줍니다. 무명, 명주, 모시, 교직 등 다양한 직물로 제작된 우리복식의 소박함과 화려함, 정교한 제직기술 등을 보여줘 학술적, 심미적 가치가 뛰어납니다. 대전에서 발굴된 가락바퀴, 어망추 등 선사시대 유물부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농서인 '농사직설', '증보산림경제'를 볼 수 있습니다.  구멍이 뚫려 있어 누에고치로 부터 뽑아낸 견직물은 매우 가늘고 힘이 있으며 우아한 광택을 띕니다. 땀과 수분을 잘 빨아들여 오늘날까지 생활직물로 널리 사용되는 면직물을 비롯한 각종 출토복식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직물의 길이 방향을 경사(날실)라 하고, 경사에 직각이 되게 파여있는 방향을 위사(씨실)라 한데요. 자세히 설명된 내용을 읽어보고 옷감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준비된 씨실을 세로로 걸린 날실 사이로 이리저리 엮어 아름다운 옷감을 짤 수 있고 짜임을 감상해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색깔과 재료의 시실을 사용하거나 평직, 능직, 수자직 등 실을 엮는 방법을 달리하면서 원하는 문자나 문양도 만들어 볼 수 있어 어른들이나 아이들이 신기하고 재미있게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할 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대전시립박물관은 대전 유성구 도안대로 398(상대동)에 위치하고 있스빈다. 대중교통 버스 이용시 106, 115, 312, 706, 601, 11번을 타면되고, 지하철 이용시 유성온천역에서 106번, 구암역에서 312번으로 각각 환승하면 됩니다..

'별급문기' 조선시대 상속문서, 대전시립박물관 5월의 문화재

대전시립미술관이 5월 이달의 문화재 전시를 개최합니다. 가정의 달인 5월에는 '별급문기'라는 조선시대 재산상속의 문서를 전시하고 있어 찾아가봤습니다. 재산상속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여 사회의 이슈를 만들기도 하죠.  날이 좋아서 나들이의 시간이 좋은 하루입니다. 내일부터는 또 일상으로 돌아가봐야 하겠네요.  헌법과 현대에서의 법률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법적인 것에 대해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요.  조선시대의 재산상속은 바로 별급문기를 통해서 진행되었습니다. 특별한 사유로 재산(토지·노비)을 줄 때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부동산으로 토지가 중요했지만 노비는 동산으로서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재산이다라는 의미는 어떻게 보면 말 그대로 객체로서의 재산이었습니다.  상설전시실은 여러 번 와보았기에 매우 익숙한 전시공간입니다. 별급 문서에서 표기된 별급 된 재산을 둘러싸고 자손 간에 분쟁이 생길 소지가 있으므로 재주와 증인·필집(筆執)의 착함(着銜)·수결(手決)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명문가의 별급에는 고관·명사들이 증인으로 동원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별급 문서에서 명시된 별급 된 재산은 분깃(分衿)·화회 등 분재할 때 분집(分執) 이외에 별도의 재산으로 인정됐는데요. 내용을 보면 문기의 작성 연월일, 별급 대상자의 성명, 별급의 사유, 별급 재산(토지·노비)의 표시(토지소재·결수, 노비수),  당부의 말,  재주·증인·필집의 성명·수결 등이 기재됐습니다. 현대상속과 관련된 유언 문서도 같이 놓여 있어서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별급문기와 관련된 내용은 경국대전에서도 나와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상속과 관련된 내용은 민법에서 다뤄지고 있지만 대부분 재산상속만을 규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제사의 적장자 단독 승계의 규정부터 제자녀 윤회 봉사 및 집안의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여성의 활동이 제약이 따랐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대전시립박물관에는 대전에서 활동했던 여인들의 활동과 그 작품들도 볼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 도시 대전에는 다양한 시설이 자리하고 있고 이렇게 매월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날이 좋아서 좋은 것인지 좋은 분위기의 풍경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대전시립박물관에서 전시되는 별급문기는 1705년(肅宗'숙종' 31) 3월 15일, 재주인 송병익이 여러 형과 부인을 잃고 슬픔 속에 있을 때, 둘째 아들인 송요좌(1678~1723)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면서 노비와 전답을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사후 법률관계에 대한 조선시대와 현재의 문서를 한 공간에서 동시에 비교하며 살펴볼 수 있는 전시전입니다.

대전시립박물관과 논산에서 만나는 파평윤씨 이야기

파평윤씨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인물은 조선후기의 학자 윤증과 조선시대 문정왕후, 일제강점기 윤봉길 의사입니다.  2월 10일까지 대전시립박물관에서 열린 '교목세가(喬木世家) 파평윤씨, 시대의 부름에 답하다’가 전시를 방문해 파평윤씨 가문의 흔적들을 따라가봤습니다. '교목 세가'는 여러 대를 거쳐 중요한 벼슬을 지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평윤씨가 바로 그런 집안이죠. 파평윤문(坡平尹門)은 은진송씨와 함께 호서(湖西) 삼대족(三大族)으로, 고려에 시작되어 조선을 거쳐 대한민국에 이르는 천년의 시간을 나라의 명운과 함께했죠. 고려말 조선초에 시대가 변화하고 있을 때 파평윤문(坡平尹門)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동참했다고 합니다. 당시 판도판서 윤승례는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하여 파주에 은거했다고 합니다. 파평윤씨는 조선왕조와 상당히 많은 연관이 있습니다.  파평윤씨의 다양한 흔적들이 대전시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고 그 쓰임새도 모두 다릅니다. 만들어진 사람은 멀리서 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서 대해 보면 부드럽고, 그의 말을 들어보면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파평윤문의 기록이 담긴 유물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사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문과 무를 함께 겸비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요. 내면과 외면을 모두 같이 닦는 일,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무예 연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파평윤씨의 중시조인 윤관은 여진족을 정벌하고 고려의 재상인 문하시중으로 올랐습니다. 숙종대 후반에서 예종대 초반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개척한 사람으로 역사책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나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 하나이다."  -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파평윤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윤봉길 의사의 말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과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홍구의거를 일으켜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렸죠. 전주이씨, 안동권씨의 뒤를 이어 파평윤씨는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추한 가문입니다. 파평윤씨 가문은 문정왕후대에 비극을 맞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그려진 대윤과 소윤은 당시 조선의 가문을 좌지우지하며 친족 간의 골육상쟁을 일으켰죠. 파평윤씨에 대한 이야기를 대전시립박물관에서 보았다면, 가까이에 있는 파평윤씨 종가를 가보는 것도 추천해드려요. 파평윤문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시대에 부응하여 조선왕조의 개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파평윤씨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곳은 바로 논산에도 있습니다. 윤증고택을 비롯하여 파평 윤씨의 재실이 있습니다.  대전과 연관이 많은 파평윤씨의 흔적을 따라가는 역사여행, 여러분도 떠나보시길 바랍니다.

500년전 기묘사화 충절의 상징 충암 김정 선생의 생애를 따라서

▶ 1519 선비의 화 / 대전시립박물관 대전시립박물관의 2018 특별기획전이 지난해 12월 7일부터 시작됐습니다. '1519 선비의 화. 김정과 그의 조선' 전시가 3월 31일까지입니다. 1519년(중종 14년)은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들이 숙청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해입니다. 바로 500 년 전 일인데요. 기묘사화의 결과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갔다가 한달만에 사사되고, 김정(金淨) ·기준 ·한충 ·김식 등도 귀양갔다가 훗날 사사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충암 김정 선생을 집중 조명했는데요. 충암선생이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1519 선비의 화 / 대전시립박물관 인물사전에 의하면 김정 선생은 1486년(성종 17년) 충북 보은 출신입니다. 연산군 10년(150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어 홍문관수찬·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에 전임되고, 다시 홍문관교리 · 이조정랑 등을 거쳐 중종 9년(1514)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제수되었는데요. 순창군수로 재직하던 중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함께 일찍이 중종이 왕후신씨(愼氏)를 폐출한 처사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를 복위시키고 아울러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하라고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가 권신들의 반발을 사서 보은(報恩)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먼저 근정전 내외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조선의 통치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왕과 왕권, 왕조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근정전 외관(위)과 내부 다음에는, 충암 김정선생이 살았던 시기의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삶을 대비해 만든 연보가 전시돼 있습니다.  김정선생은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할머니 황씨부인으로부터 3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해 6살 때 처음으로 시를 짓는 등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왔다고 해요. "1519 선비의 화. 김정과 그의 조선" 전시는 프롤로그 → 충암 김정과 그의 시대 → 경국대전과 조선 → 기묘사화 이전의 사화 → 중종반정과 김정의 출사 → 교착된 정국과 김정의 '폐비 신씨 복위 주청 상소' → 김정의 화려한 복귀와 조광조와의 만남 → 김정의 좌절된 개혁, 기묘사화의 발생 → 김정의 복권과 그의 흔적들 → 에필로그 순으로 진행됩니다. 전시물들을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 조선왕조의 개국에서부터 김정선생이 살았던 성종, 연산군, 중종 왕조까지 정치적 변화와 함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기묘사화까지의 역사, 김정선생의 역사관과 행적 등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갑자사화와, 연산군을 소재로한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 김정선생은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새롭게 옹립된 중종 2년(1507)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된 후, 홍문관수찬·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에 전임되고, 다시 홍문관교리 · 이조정랑 등을 거쳐 중종 9년(1514년)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제수되었습니다.  순창군수로 재직하던 중,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류옥(柳沃)과 함께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신씨를 왕비로 복위시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로 하는데요.  이들이 관직을 내려놓을 각오로 소나무 가지에 관인을 걸어놓고 맹세한 곳을 '삼인대(三印臺)라고 했고, 1744년(영조 20) 4월에 비가 세워집니다.   순창 삼인대비 탁본 하지만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하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상소는, 단순히 폐위된 신씨의 복위 요구에서 나아가 중종반정으로 인한 공신록의 남발, 국왕의 무기력함에 대한 일갈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반정공신들로부터 반발을 사 결국 충북 보은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폐비신씨 복위 상소를 결의한 강천산 삼인대 당시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치죄할 것을 주장했지만,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치죄를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는 이에 더해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기도 했습니다.   개혁의 파트너, 김정과 조광조 얼마 뒤에 조광조 등의 주청으로 박상과 함께 재등용되고 권민수와 이행이 파직됐는데, 이는 곧 중앙정계에서 사림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사예(司藝)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습니다.  1519년 기묘사화의 발발로 극형에 처해질 뻔 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명과 함께 사사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충암 김정 선생의 질풍같은 삶과 죽음인데요. 조선시대 왕과 신하 간 파워게임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연구자 인터뷰 영상 이후 1545년(인종 1)에 복관(復官)되고, 1646년(인조 24)에 영의정이 추증되었습니다. 충암 김정 선생은 시문은 물론 그림도 잘 그렸는데, 특히 화조를 잘 그려 조선 중기에 유행한 소경수묵사의  (小景水墨寫意) 화풍의 전통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저서로는 『충암집』·『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등이 있는데요. 제주에 유배돼 있는 동안 조카로부터 제주와 풍토, 물산 등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을 편지로 써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제주풍토록'입니다. 김정선생의 신동의 면모를 보여주는 저서 '십일잠' 2018 한국문화전2 「1519 선비의 화 - 김정과 그의 조선」 전시기간 :2018-12-07 ~ 2019-03-31 관람시간 : 동절기(11~2월) : 10:00~18:00 / 하절기(3~10월) : 10:00~19: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당일, 기타 박물관장이 지정한 날 ※ 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박물관 개관 후 익일 휴관 전시장소 :대전시립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2 관 람 료 : 무  료 관람문의 : 042-270-8600 ▶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 / 충암 김정선생 생가와 묘소 일원 '1519 선비의 화. 김정과 그의 조선' 전시는 마지막으로, 김정선생 생가와 묘소일원을 보여주는 동영상으로 맺고 있습니다. 김정선생 생가와 묘소 일원은 1991년 7월 10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 인근 (대전시 동구 회남로117)의 '김정의 묘'는 원래 충청남도 대덕군 동면 내탑리에 있었는데요. 1978년 대청댐 공사로 그 곳이 수몰되게 되자 이 곳으로 옮겨기면서 그 부속 건조물도 함께 옮겨 왔습니다.  김정선생 생가와 묘소 일원 / '1519 선비의 화' 전시물 중에서 김정선생과 그 부인을 합장한 묘소, 두 분 위패를 모신 사당, 1641년(인조 19)에 세워진 신도비와 김정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별묘, 제향을 올리는 사당인 산해당, 그리고 그의 부인인 은진송씨 정려각 등이 있는데요. 이 건조물들은 조선 후기의 건축기법으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충암김정선생 생가 입구 솟을삼문 김정선생 생가 내삼문 산해당 이곳에는 김정선생의 17대 종손인 김응일선생 가족이 살고 있는데요. '산해당' 현판은 이곳으로 이전할 당시 출토된 김정선생의 관뚜껑을 사용해 만든 것입니다.  저는 지난 여름 이곳을 찾아 김응일선생으로부터 김정선생의 생애와 충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산해당 현판 생가 위쪽으로는 김정선생 부부 뵤소와 그 16대 손까지의 묘역이 조성돼 있습니다. 이곳은 불천위 종가(不遷位 宗家)입니다.  원래 사대부 집안에서는 4대까지 방안제사로 모시고 5대 이상부터는 사당에 모셨던 신주를 무덤 앞으로 옮겨 묻은 후 시제로만 모시게 돼 있었는데요. 불천위는 국가에 큰 공이 있거나 학식과 덕이 있는 분에 한해 임금이 "영원히 방안제사로 모시라"고 승인을 해준 경우를 말합니다.  조선조에 불천위를 받은 문중은 전국적으로 약 300 여 문중이지만, 현재까지도 불천위 제사를 예법대로 모시는 문중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대전에서는 우암송시열 가문이 또다른 불천위 가문입니다. 그만큼 충암선생의 충절을 높이 산 정조대왕이 불천위를 윤허한 것이지요. 충암 김정 선생 묘 김정선생 묘역에서 본 생가 그리고 책으로 출판된 '국역 충암집'도 보았는데요. 충암집은 원래 5권 1책으로 초간본은 명종(明宗) 7년(1552) 김천우(金天宇) 등이 간행하였고, 중간본은 인조(仁祖) 14년(1636)에 간행되었으며, 세 번째의 것은 1972년에 그 후손들이 간행하였다고 합니다. 초간본과 중간본은 현재 대전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일부만 보았는데도, 그림이 정말 예뻤습니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시·서·화에 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전은 그야말로 충·효·예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절을 지킨 사육신 중의 한 분 박팽년 선생이 회덕 출신이고, 충암 김정선생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선생이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했습니다. '2019 대전방문의 해'를 맞아 우리고장의 인물인 충암 김정 선생의 생애를 따라가 보면서 그의 우국충절을 기려 보세요. 2019 대전광역시소셜미디어기자 조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