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변 비룡동 줄골 장승과 은진송씨 이야기By 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8월 8일 | 은진 송씨는 대전에 세거하던 대표성씨이면서 성리학의 대표학자인 송시열의 본관이기도 합니다. 대청호가 있던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많은 향토적인 흔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국도변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청호를 많이 돌아다녀보았지만 이런 석장승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보네요. 장승이 있는 지역에서 장승제를 지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역의 경계를 알리고 있는데요. 금줄로 마을 입구에 해놓는 것은 잡귀가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덩치가 남달라 보이는 석장승인데 이 석장승 역시 마을을 지켜주는 주신이겠죠. 마을 장승제는 신성 구역을 선포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는 신전 정화를 마을 경계로 쓰고, 몽골에서는 금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위 장승은 비룡동(줄골) 장승입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의 석장승 2기가 마주 서 있는데 남장승은 북쪽을 향해 서 있고 여장승은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원래 두 장승은 2.5m의 간격을 두고 서 있었는데요. 대전과 추동을 연결하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여장승을 뒤로 물려 지금은 10m의 간격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남 장승의 외형은 전형적인 문관석 형으로 높이가 2m 정도이고요. 여장승은 1.7m 정도에 사람이 얼굴을 새기었다고 합니다. 거리제를 지내고 난 후 짚으로 만든 주머니에 떡과 과일을 넣어 장승의 목에 걸어두기도 합니다. 장승의 옆으로는 은진송씨 상계당공재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는 옛 지명들이 보입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며 살았겠죠. 은진송씨의 재실로 들어가는 공간에도 장승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은진 송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9명, 상신 2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하였던 성씨입니다, 특히 목사공파(牧使公派)와 정랑공파(正郞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송춘당공원의 송준길은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송시열은 좌의정을 지내고 문묘와 종묘에 종사되었습니다. 은진(恩津)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일대의 지명입니다. 백제의 가지내현(加知柰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시진(市津)으로 고치고 덕근군(德近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공주(公州)의 임내(任內)가 된 곳입니다. 그러고보니 대청호라는 지역의 광할함을 다시금 보게 되네요. 대청호(25)비룡ㅡㅇ동장ㅅ(1)송시열(8)송준길(7)은진송씨(2)장승(3)줄골장승(1)최홍대(26)대전스토리가 있는 오감만족길 정려의 길(고흥류씨 정려각, 회덕 쌍청당)By 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4월 2일 | 싱그러운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따뜻한 날씨는 자꾸만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합니다. 뿌연 하늘과 황사, 미세먼지라는 단어가 아니라면 어디든 떠나고 싶은 계절 봄입니다. 여유로움과 숲 향기, 그리고 조선 시대의 멋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대전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효와 예를 중시하던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멋진 별장과 정려비를 보며 우리 과거 조선 시대로 떠나볼까요? 대전시 대덕구 중리동에는 오감만족길로 '스토리가 흐르는 정려의 길'이 있습니다. 표지판을 보고 따라가며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살짝 귀담아 들어보려 합니다. 고흥 류씨 정려각 (유형문화재 제25호)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고흥 류씨 정려각(유형문화재 제25호)입니다.류씨 부인은 류준의 딸로서 진사 송극기에게 시집갔으나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네 살 난 아들과 함께 회덕의 시댁에 내려와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고요. 아들 송유를 훌륭히 키우는 등 정절과 행적이 남달라 송준길 일가가 상의하고 조정에 아뢰어 조선 효종 4년(1653년)에 열녀로 정려각이 세워졌습니다. 고흥 류씨 정려각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죠? 정려각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빨간 대문 안에 고흥 류씨 정려각이 있습니다. 고흥 류씨 정려각과 비에 관한 내용이 이곳에도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겠네요. 안에는 화려한 문양의 팔각지붕이 멋진 모습으로 세워져 있으며,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찍은 사진입니다. 주변의 다른 건물들 속에 이런 멋들어진 정려각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셨죠? 이 정려문에는 정려의 은전을 받게 된 내력 및 부인의 행적이 자세히 적혀 있답니다. 이제 슬슬 쌍청당으로 가 볼까요? 아까 둘러본 고흥 류씨가 훌륭하게 키운 아들 송유의 별장입니다. 쌍청당 (유형문화재 제2호) 여기에도 쌍청당의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하지만 읽기 번거로우시죠? 제가 간략하게 소개해 드릴게요. 쌍청당(유형문화재 제2호) 고려말 조선 초기에 부사정을 지낸 송유(1389~1446)의 별장이며 쌍청당은 평소 교분이 두터운 박팽년이 지어준 당호로서 청풍과 명월의 기상을 가슴에 새긴다는 의미를 가진 송유의 호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쌍청당은 은진 송씨 대종가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은진 송씨송 씨 대종가는 대전 대덕구 중리동에 대대로 은진 송 씨의 종가입니다. 은진 송씨들이 이곳에 모여 살게 된 것은 고려 시대부터이며 입양조는 '송명의'지만 그의 손자로 쌍청당을 지은 송유에 의해 가문이 번성해서 은진 송씨들은 '송유'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답니다. 이곳 대종가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조용히 들어와서 둘러보시면 좋겠네요. 문이 잠겨 있으면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열어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은진 송씨 대종가 모습도 참 멋지지요? 조선시대의 번성한 집안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줍니다. 그 옆으로 돌아서 가면 쌍청당이 나옵니다. 쌍청당이라는 비석이 보이시죠?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서면 멋진 별장 쌍청당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과거 우리가 TV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모습이 눈앞에 있으니 참 신기하죠? 이 쌍청당은 화려한 단청으로 유명합니다. 단청의 재료가 중국에서 비싼 가격에 수입해서 사용하므로 1429년 세종은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민가에 단청을 금지하였습니다. 국법에도 어긋나고 사대부의 성리학적 규범에도 어긋나는 일인데 왜 그랬을까요? 이 쌍청당은 개보수를 하면서 계속 단청을 입혔는 데 그 이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동안은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효라 할 수 있다는 공자의 예를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물끄러미 쌍청당을 보고 있으면 왠지 과거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참 신기했습니다. 멋진 시조라도 한번 읊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단청 색깔이나 모양이 정말 화려합니다. 이런 화려한 단청은 궁궐 또는 큰 절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데 이런 별장에서 보다니 또 다른 경험이네요. 이제 쌍청당을 다 둘러보았으니 조금 걸어 송애당을 둘러볼까요? 송애당 (유형문화재 제8호) 송애당은 조선중기 문신 김경여(1596~1653)가 세운 별장 건물입니다. (유형문화재 제8호) 경주 김씨 종중에서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독전 어사를 지낸 송애당 김경여가 병자호란의 수치를 당하고 부모를 모시고 이곳에 집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송애당이라 현판을 걸고 은거하였으며 송애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하지 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마음에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김경여의 기재와 충성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곳도 잠겨있어 안에 들어가 볼 순 없지만 단아한 팔각지붕의 별장이 놓여있습니다. 쌍청당의 화려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죠? 이제 은진 송씨 정려각으로 가 보겠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경여의 어머니 송씨 부인의 정려기를 보관하는 건물입니다. (유형문화재 제24호) 조금 전에 본 김경여의 별장 송애당을 기억하시죠? 그 김경여의 어머니가 바로 은진 송씨랍니다. 우리가 둘러본 '스토리가 흐르는 정려의 길'엔 표지판이 자세히 나와 있어 찾아가시기에 편리합니다. 은진 송씨 정려각으로 가 보겠습니다. 은진 송씨 정려각 (유형문화재 제24호) 조선중기의 문신 김경여의 어머니 송씨 부인의 정려기를 보관하는 건물입니다. (유형문화재 제 24호) 조금 전에 본 김경여의 별장 송애당을 기억하시죠? 그 김경여의 어머니가 바로 은진 송씨랍니다. 은진 송씨는 임천군수를 지낸 송남수의 딸로 계림군 김정의 후손인 진사 김광유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회덕면 백달촌 중리에서 태어나 22세 때 결혼하였는데 결혼하고 몇 달 만에 26세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남편을 따라 자결하려 하였으나 당시 임신 중이라 죽지 못하고 회덕 송촌에서 부모에 의지하며 유복자인 김경여를 낳아 훌륭하게 키웠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부친이 노환으로 위독하자 약지를 베어 피를 마시게 하고 손가락뼈를 가루 내여 먹여 아버지를 소생케 함으로써 90수를 누리게 하였으며 모친이 등창으로 위급하자 역시 손가락을 잘라 가루 내어 아픈 곳을 발라서 병을 낫게 했다고 합니다. 지금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이런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그들이 살던 고을에 영조 때 정려를 기리기 위해 은진 송씨 정려각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정말 옛날이야기지만 대단하죠? 그 내용이 이곳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은진 송씨 정려각의 모습입니다. 생각보다는 조금 단출한 느낌입니다. 아까 보신 송애당과 같이 화려한 단청이 없고 그저 평범한 팔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누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잘 키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데 실천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더 어려운 시기에 살았던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을 되새기며 과거 효와 예를 중시한 조선시대의 어머니상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 봄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도심 속 조선시대의 멋진 별장과 그 시대 어머니의 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고흥류씨정려각(1)대전명소(38)대전오감만족길(1)송애당(4)쌍청당(3)양해일(26)은진송씨(2)은진송씨대종가(1)은진송씨정려각(3)정려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