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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8년 8월 13일 |
효(孝)는 섬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효도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어 역사 속에서 만나는 그런 의미의 효도를 하는 자식들은 많지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부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한 가족을 유지한다는 자체조차 버겁다는 의미라서 참 안타깝습니다.
당장 한 달 후 혹은 1년 후의 먹거리가 걱정이 되는 판에 나외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에게 효자냐고 물어본다면 간신히 불효자를 벗어나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네요.
대전효문화진흥원에서 효에 대한 내용을 접하면서 수많은 역사 속의 효자들의 이야기를 전달하지만 그렇게 살 자신은 솔직히 없네요.
효를 가지고 무언가를 말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뿌리공원의 입구에 있는 대전효문화진흥원은 '효'를 주제로 전시관을 운영하는 곳입니다. 올해 7월 1일부터 전시체험관을 무료 운영하고 있어서 조금 더 접근성이 좋아진 곳이죠.
효문화체험관은 총 5개 전시실이 있는 효 이해실, 효 느낌실, 효공 감실, 효 실천실, 효나눔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효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배워보고 다시금 되새기기에 좋은 공간입니다. 전국에 있는 효자 향덕 비와 유명 인물들이 행하였던 효에 대해 접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환갑까지만 살아도 잔치를 할 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중기를 지나게 되면 효종 때는 양반, 서인의 신분을 막론하고 80세 이상 노인에게 벼슬을 주었는데 이는 노인의 지위와 권위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을 임금 자신부터 몸소 실천했던 것이죠.
시대가 바뀌어서 국가가 노인세대에 대한 부담을 해소시켜주지 않으면 중장년층이 더 이상 버티기 쉽지 않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경제규모가 크지 않을 때는 옛날 방식의 효가 유효했지만 경제규모가 이전과 상상과 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가 나는 지금 효보다는 경제활동을 할 인력이 만들어져야 하는 출생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역사속 인물들은 어떻게 효를 실천했을까요? 남다른 관점으로 청년들과 어울렸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충과 효를 함께 실천하다"를 몸소 보여주었던 분이고요. 도산 안창호, 만해 한용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모두 겨레에 대한 효를 직접 실천했던 분들입니다.
율곡 이이는 가정윤리를 강조했으며 퇴계 이황은 효사상을 체계화했습니다. 일이 일인지라 전국에 있는 정려문은 정말 많이 보아 왔습니다. 나라에서 내린다는 붉은 문인 정려문은 신라시대에 처음 세워졌으며 전국적으로 수많이 세워졌습니다. 정려문은 효자와 효부, 열녀, 충신을 기리기위해 만들어졌죠.
조선시대에는 부녀자들의 훈육서가 대를 이어 전해졌다고 합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더라도 가정윤리는 상당히 중요하죠. 가정이 가장 먼저 만나는 교육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효는 이미 알려질 대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은 충·효·의·신을 중시하는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80세가 중요한 기준이었다고 합니다. 세종 시대에도 남녀의 귀천과 신분을 초월하여 연령이 80세가 넘으면 벼슬을 내리고 쌀을 하사했으며 술과 고기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세조는 그 연령을 70세 낮추기도 했고요. 중종과 광해군 시대에도 양로연 제도가 이어졌습니다.
옛날에는 불효를 행한 사람에게 곤장을 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사실 효는 상호적인 가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부모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자식이 자식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할 때 비로소 효의 진정한 의미가 완성됩니다.
효는 마음에 대한 도리이며 행동에 대한 도리입니다.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노력할 때 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효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양한 설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엄동설한에 잉어를 먹고 싶다는 말에 실개천에서 잡은 잉어 이야기. 호랑이를 타고 온 홍시, 한겨울에 때 아닌 수박, 솔개가 날라준 고기 등은 교과서에서도 등장하곤 하죠.
"내 아들이 나라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 된 의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아들을 따라 죽을 따름이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말을 적은 글귀가 마음을 울립니다.
지금은 봉분 묘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묘는 효를 상징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조상숭배 사상을 실증하는 지석묘를 비롯하여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지배층의 무덤 고인돌은 지역사회의 효와 제단, 기념물로써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시대가 변한 만큼 전통적인 효에 대한 생각만 고집하는 것도 편협한 생각입니다.
효 사상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데 현대적인 의미의 효는 상호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패러다임의 효입니다. 좁은 의미로서는 자녀와 부모가, 넓은 의미로서는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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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7월 19일 |
제가 원도심 쪽을 너무 오래간만에 왔을까요. 작은 성처럼 되어 있는 공간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테미근린공원과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시민의 집까지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입니다. 테미는 '작은 성으로 둘러쌓여 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지금은 전시가 되고 있지 않지만 곧 전시가 이루어지는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입니다. 7월 25일부터 안가영 개인전, 8월 22일부터 임선이 개인전, 9월 17일부터 듀킴 개인전이 열립니다. 이어 하반기 오픝스튜디오 & 전시, 고정원, 장동욱등의 전시전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대전 테미근린공원은 대흥배수지를 중심으로 휴게쉼터와 식수대, 운동시설, 산책길이 이어집니다.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던 테미도서관으로 지금은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로 활용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대흥동 대전시립도서관 뒷편에 자리한 테미공원은 1955년 11월 음용수 보안시설로 지정되어 일반 시민의 출입이 제한되어 왔으나, 1995년도에 이를 개방하여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덥긴 무척이나 덥습니다. 조금만 걸었을뿐인데 벌써 땀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충남도지사공관으로 사용되었던 곳까지 가보려고 합니다.
아치형 현관의 벽면들을 요철 모양으로 파내어 장식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건물의 조형성을 배가하여 만든 것이 특징인 옛충남도청사! 이곳은 2002년 5월 31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됐습니다.
한일 병합 조약에 따라 강제로 일본에 병합된 이후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 2일부로 조선 13도의 관찰사를 1919년부터 도장관에서 도지사로 바꾸었습니다. 도지사(道知事) 또는 주지사(州知事)는 지방자치단체의 수장을 의미합니다.
테미오래는 숨겨진 보물을 찾는 재미도 있는 곳입니다. 테미오래 투어는 스탬프를 만들어두고 찍으면서 돌아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안을 돌아보니 지금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관리가 잘되고 있었습니다. 공관(空館)은 정부의 고위 관리 등이 공적으로 쓰는 저택을 말하는데요. 도시관리계획으로 결정하여 설치하거나 도시관리계획으로 결정하지 않고도 설치할 수 있는 시설입니다. 도시계획시설로는 공공청사에 해당합니다.
충청남청이 들어오던 해에 설계된 충청남도지사 관사촌은 조성 당시 설계된 공사는 칙임관급 한 채와 주임관급 6채였다고 합니다. 현재 이곳의 3, 4호 관사는 소실되어 도지사 공관과 1 ,2, 5, 6호 관사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공관의 안쪽에서 정원을 바라보니 여유가 느껴집니다. 마치 일본에 와 있는듯한 느낌도 주고 있습니다. 아늑한 정원과 평화로운 산책로가 조성이 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올해부터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합니다.
충남도지사 공관이 그대로 남아서 보존되어 있다는 것도 재미있고요.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간 '시민의 집'으로 자리한 것도 새로웠습니다. 옛충남도지사 관사는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 거처로 사용는데요. 유엔군 파견도 요청했던 역사적인 장소기때문에 대전 문화재 자료로 등록됐습니다.
특정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에서 모두를 위한 공간이며 대전의 시민들이 같이 만들어가는 곳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연결되어 있는 안쪽을 걸으면 일본주택의 양식을 그대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서 현대를 이어주는 유일한 일제강점기 당시의 관사촌이면서 도심 속 힐링공간이라는 의미가 새겨진 이 곳 테미오래!
테미오래라는 이름은 작년 시민 공모를 통해 만들어졌는데요. 둥그렇게 테를 둘러쌓은 작은 산성인 '테미'와 동네의 골목 안 몇 집이 한 이웃이 되어사는 구역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오래'를 합쳐서 탄생한 말이라고 합니다.
역사와 문화, 예술이 공존하는 이곳 테미오래로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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